64. 배드볼히터 (2)
프로야구시즌 후반기.
패넌트레이스의 강약 세력 구도가 굳어질 때쯤, 포털 사이트들의 스포츠란에는 한 가지 현상을 다루는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한 야구팬은 매년 반복되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가을이 오나보다.."
가을야구가 다가올 때쯤, 상위권과 하위권의 격차가 벌어질 때로 벌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
[언더독의 반란. 팔콘즈, 2위 레나프 격파! 7연승!]
[고춧가루 팍팍! 위저즈드, 갈길 바쁜 코쿤스에 위닝 시리즈!]
[역전의 사수 시갈스, 이번에도 역전승!]
[게이머즈, 고춧가루 동맹 합류! 쾌속의 2연승.]
바로 하위권 팀들의 반란, 고춧가루 부대의 출현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앞에 붙은 반란이라는 단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었다. 시즌 종료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는 이상 이들의 가을야구는 물 건너간 지 오래였으니까.
"우우~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최강! 광주! 이칼코메드!"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위권 팀들의 팬들은 야구란 이렇게 즐기는 것이라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사실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상위권 팀을 백날을 때려 잡아보아도 소용은 없었으니까. 그저 자기 위안에 가까운 응원이긴 했다.
이 모습을 보면 내년은 희망차다고.
후반기의 후반에 이토록 잘했으니, 내년도 잘할 거라고.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하위권 팀들은 팬들의 기대에 보답하듯, 시즌 전반기에는 보여주지 못했던 연전연승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8월 26일.
이칼코메드 챔피언스 파크에서 열린 리그 8위 광주 이칼코메드와 리그 2위 세오레즈의 3연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적대로라면 텅텅 비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장.
하지만 이곳은 이미 이칼코메드 팬들도 가득 채워진 만원 상태였다.
그리고 이들은 당연하게도 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는 것은 아니었다.
"발라버리자!"
"리그 3위가 뭐 별거냐! 시즌 초 때는 우리보다 낮을 때도 있었어!"
"요즘 세오레즈 투수진이 그렇게 약하다며? 야구는 투수전이지 타격전이 아니잖아? 루이스 파간의 최근 페이스를 보면 충분히 완봉승도 가능하다고 본다."
"빠따는 언제 식어도 이상하지 않지! 우리 팀처럼 투수진이 든든해야! 안그래?"
최근 전통 강호 인천 플레인즈와의 시리즈를 싹쓸이해버리는데 성공한 이칼코메드.
그 기세가 하늘 끝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이는 몇몇 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언더독 이칼코메드, 세오레즈 3연전마저 스윕 성공하나?]
[고춧가루 부대 선봉장 이칼코메드! 갈 길 바쁜 세오레즈의 앞길을 가로막다.]
[루이스 파간! 완봉승을 향해 쏘다!]
온갖 희망적인 상황을 가정하며 쏟아내는 if 기사들.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힘을 실어주며 예상외의 사태가 일어나길 기대하는 흐름이 이번 시리즈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텅!
하위권의 활약을 지칭하는 그런 사태는.
[넘어갔습니다! 이완석 선수! 이번에도 담장을 넘겨버립니다!]
세오레즈 타자들의 괴물 같은 장타력 앞에서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따아아아악-!
[이건 큽니다! 투수, 고개도 돌리지 않는군요!]
불혹의 나이에 가까우면서도 후반기 들어 완전히 살아난 모습을 보이는 상남자 이완석.
세오레즈 타자 중 가장 압도적인 타구를 만들어내는 조병민.
그 외에도 미래의 메이저리거 유장천, 악마 2루수 장건우, 준수한 장타력을 뽐내는 김지훈까지.
지명타자와 내야진의 장타력만 해도 두려울 지경인데, 외야수들의 정확성마저 치가 떨릴 수준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 일어섭니다! 만루에서 강해준 선수를 거르기로 선택한 이칼코메드!]
물이 오를 때로 오른 해준의 기세는 특출났다.
고작 3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해준을 밀어내기로 거르는 것을 선택한 이칼코메드.
그만큼 이칼코메드 측이 해준에게 정면 승부에 대한 부담감을 느낀다는 소리였다.
"이제는 아예 규격 외 취급이로군."
"그럴 만도 하지. 이 리그는 이제 미스터 강과 핏이 들어맞는 곳이 아니야. 레벨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어."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라도 해야 계속해서 데이터를 수집할텐데, 이건 걸어 나가는 것만 보다가 집에 돌아가게 생겼으니까.
물론 이칼코메드라고 무작정 승부를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해준을 최대한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타자들을 막아내지 못한 채 크게 스코어가 벌려진 경기 후반.
패전조로 올라온 투수 이태훈.
'... 지금쯤이면 한번 내 손으로 잡아봐?'
그가 은근슬쩍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기를 시도했다.
경기 내내 계속됐던 볼들의 행진. 이 한 개쯤이라면 허를 찌를 수 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흐읍!"
따아아아아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를 돌려버리는 해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간 타구가 전광판과 충돌하며 외야로 떨어졌다.
[홈런! 홈런입니다! 강해준 선수가 다시 한번 홈런을 기록합니다!]
그 광경을 보던 스카우트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 배리 본즈잖아?"
"그가 전성기 시절에 딱 저런 모습이었지. 걸러내다가 승부에 들어가면 기다렸다는 듯이 홈런."
"타격폼이고, 스윙 궤적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똑같군. 리그를 지배하는 위압감. 그게 느껴져."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가장 압도적인 타격 시즌을 남긴 배리 본즈.
리그 수준을 벗어나는 타격을 보이는 해준.
스카우트들의 머릿 속에서 타격폼도, 체형도 다른 이 두 명의 타자가 오버랩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터어억-!
그라운드 위를 날고 있는 해준의 모습에 스카우트들은 자신들이 잠시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캐치! 다시 한번 날았습니다! 세오레즈의 야수 강해준 선수! 좌익수 수비 또한 리그 탑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바로 해준의 괴물 같은 수비 실력.
반응속도, 목표지점까지 끊는 스타팅 속도, 캐칭, 글러브 핸들링, 송구까지. 그 어느 면에도 결점을 찾을 수 없는 저 플레이는 설령 배리 본즈라 하더라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었다.
"... 배리 본즈라니. 내 실수로군. 저건 그냥.."
"윌리 메이스?"
"아니지. 아니야.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강해준은 그냥 강해준이지. 앞으로 역사에서는 그렇게 말하게 될거야."
결국 해준을 누군가에 비교하기 포기하고, 그 자체로 평가하기 시작한 스카우트들. 그 모습을 보며 탄식을 터트리기는 다른 야구팬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이젠 뭐 할 말이 없다;;
-타격, 수비, 주루. 삼위일체 ㅇㅈ이요.
-강해준이 아니라 갓해준이라니까. 기사는 왜 자꾸 오타내냐? 기레기 티내지 말고 어서 수정해라. 갓해준 님이시다.
-아, 다다음 시리즈 세오레즈랑 하는데;; 직관 가는 날에 또 쳐 발릴 생각하니까 슬프다.
-이젠 진짜 메이저리그로 가야 할 듯. KBO는 강해준 추방 안 하냐? 당장 국내 활동 금지부터 시켜라.
당장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맞붙는다 생각한다면, 투수들이 박살나고 안타성 타구가 잡히는 모습 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유일하게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이는 팀이 있었다.
[올림픽돔에 모습을 드러낸 닉 스윈스키 '컨디션 최고!']
[올림픽돔 세오레즈-레나프 전. 레나프 선발은 메이저 100승 투수 닉 스윈스키.]
[전문가 10인 중 8인. 닉 스윈스키, 강해준을 충분히 누를 수 있는 대투수.]
[닉 스윈스키, '강해준? 나에게는 9명의 타자 중 1명일 뿐. 특별한 대책은 없다.']
바로 메이저리그 100승의 대투수, 닉 스윈스키를 영입한 서울 레나프.
패넌트레이스 5위라는 애매한 위치.
그곳에서 어떻게든 가을야구를 확정 짓기 위해 큰돈을 들여 영입한 비장의 카드에 김태문 단장은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허헛. 강해준이요? 뛰어난 선수이긴 합니다만, 닉은 메이저리그 투수 아닙니까. 그것도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우리가 불리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그렇게 김태문 단장의 짧은 인터뷰 전문이 실려 나간 기사.
당연하게도 레나프 팬들은 곧바로 이 발언을 지지했다.
-하긴 그건 그렇지. 3할 후반 40-40하던 용병이 메이저 가서 플래툰 기용에 2할 초반 치는데.
-그런 메이저에서 100승 거둔 투수면 레베루가 다르다 이거야 레베루가.
-메이저랑 크보의 레벨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다. 강해준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하늘에서 날던 사람이랑 비교가 되겠냐?
-그것만 알아둬라. 우리나라 투수들 다 데리고 가서 메이저리그에서 10년 동안 뛰게 해도 100승 안 나온다. 왜냐고? 다들 한 경기에서 얻어터지고 마이너 가서 평생 못 올라올 거거든.
하지만 그 일반적인 반응에 반발하듯 반대 의견 댓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강해준은 40-40 수준이 아니지 않나...?
└아니지. 40홈런도 못쳤고 40도루도 못했는데 ㅋㅋㅋㅋ
└에바참치;; 강해준 각성에 얼마나 됐다고 40홈런을 말하냐;
-애초에 단기간 포스는 강해준이 갑이다. 이신우도 발리는 거 보면 답 나왔지.
-그래도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면 이름값부터가 다르다. 강해준 떡발릴 듯;;
-강해준이 진다고? 개소리하네 ㅋㅋㅋㅋㅋㅋ지금은 누가 와도 때릴 것 같은데.
닉 스윈스키의 우세를 점치는 레나프 팬들, 그리고 강해준의 승리를 점치는 세오레즈 팬들. 그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저물어가는 새벽.
그리고 다시 동이 텄을 때.
세오레즈와 레나프의 1차전.
그 막이 올랐다.
+++
저녁 6시 30분, 잠실 올림픽돔.
돔구장답게 햇빛이 차단되어 선선한 공기를 만들어낸 이곳.
드디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은 경기의 막이 열리고 있었다.
타격 1위 서울 세오레즈 대 언더독의 선봉장 광주 이칼코메드.
야수 강해준 대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팔색조 닉 스윈스키.
경기장은 이미 레나프와 세오레즈 원정팬들도 가득 찬 상황.
"후우.."
배터박스에 들어선 해준이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닉 스윈스키라..'
정통 쓰리쿼터를 구사하는 좌투수.
190cm는 될 것 같은 커다란 신장의 소유자인 그는 여유가 넘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이저리거인가.'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들어온 지 고작 이틀.
처음 밟은 마운드와 구장, 생소한 한국 야구의 응원 분위기 속에서도 어떠한 어색함도 보이지 않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100승을 넘게 거둔 대투수에 걸맞은 모습.
비록 부상으로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오광녹의 말에 따르면 재활이 상당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상태라고 했다.
주 구종은 포심, 슬라이더, 체인지업, 스플리터.
이 4구종을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팔색조 투수.
'일단 초구는 지켜볼까.'
고개를 끄덕인 해준이 타격 자세를 잡았다.
재활 기간을 거친 만큼, 비디오 영상으로 파악한 것과는 다를 수도 있으니까.
"플레이볼!"
그와 함께 구심의 우렁찬 콜이 울리고.
퍼엉-!
망설임 없는 초구가 홈플레이트 중앙을 파고들었다. 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과감한 선택.
'.. 과연.'
타자의 호흡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자신이 몸에 힘을 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않고서는 저렇게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가운데에 찔러넣을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구위가 뛰어나.'
팔색조, 변화구 위주의 피네스 피쳐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메이저리그 기준. KBO에서는 충분히 강속구 투수로 뽑힐만한 구위를 지닌 닉 스위스키였다. 실제로 전광판에 떠오른 구속은
149.2km/h.
재활이 성공적이라는 증거였다.
'그래도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무언가 만족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속이 나온다고 메이저리그급의 선수라는 것은 아니니까. 피칭 센스, 로케이션 형성 능력, 커맨드, 타자의 스윙 궤적을 읽는 능력까지.
고작 구속만으로는 아직 저 투수를 판단할 수 없었다.
'더 보여봐라.'
메이저리그 100승 투수. 해준에게는 지금 그 실력을 지닌 투수가 필요했다. 그 사이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은 닉 스윈스키.
그가 곧바로 투구판을 밟았다.
'듣던 대로 빠른 투구 템포.'
타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자신의 페이스를 강요한다.
해준이 자세를 잡자, 재빠르게 다시 박차는 투구판.
큰 몸에 가려지는 팔스윙이 디셉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퍼어엉-!
"... 볼!"
하지만 이번에는 살짝 홈플레이트 바깥쪽을 벗어나는 코스. 무언가를 알았다는 듯, 닉 스윈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트라이크존을 파악하는 건가?'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코스가 정말 의도한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수준의 투수란 말이지.'
가지고도 써먹지 못하고 있던 것을 써먹을 때가 왔다는 소리였으니까.
'6연타석 홈런과 11연타석 안타 보상.'
그 중, 마침내 써먹을 수 있는 보상은 한 가지. 기다렸다는 듯이, 시야 한구석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PP급 퀘스트 모듈 '더 히팅 프릭The Hitting Freak']
*메이저리거급 투수를 상대로 안타 기록하기.
그것을 잠시 바라본 해준의 눈동자 깊숙이서, 무언가를 노리는 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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