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60화 (60/137)

60. 슈퍼스타 (2)

대구 더히트 파크, 1회 초.

"...후우."

허리 뒤로 넘어가는 팔로우스로우.

자연스럽게 타구를 쫓아가는 시선.

동시에 해준은 허파 속에서 머물던 뜨거운 공기를 내뱉었다.

미묘한 안정감이 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완벽했어.'

힙턴, 폭발적이면서도 단단하게 형성된 파워존, 공을 때려낸 순간 일어난 투텐스, 타격 순간 살짝 뜬 뒷다리까지.

정교하게 설계된 톱니바퀴 기계처럼 모든 것이 정확한 타이밍, 정확한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그려지던 이상적인 스윙 궤적.

그것을 충실히 현실로 옮겨낸 지금.

해준은 확신했다.

'넘어갔다.'

타격이란 기본적으로 날아오는 공을 배트로 맞춰내는 것.

하지만 이번 스윙, 배트 그립을 쥐고 있는 손끝에는 아무런 충돌의 여파도 전해져오지 않았다.

못 쳐서가 아니라, 오히려 완벽하게 쳐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

해준은 어떠한 힘의 낭비도 없이 공의 회전축, 그 중심을 그대로 때려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형용할 수 없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

침묵이 내려앉은 대구 더히트 파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무 오래봤나?'

타구의 궤적을 쫓던 해준이 배트를 던져버리자.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원정응원석의 세오레즈 팬들의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고, 음소거라도 걸린 것 같았던 경기장의 볼륨이 단숨에 폭발하듯 끌어올려진다.

어느새 좌측 외야 관중석 상단에 그대로 꽂힌 타구.

홈런볼을 잡은 한 세오레즈 팬이 글러브를 높게 쳐들고 있었다.

중계석의 한재오 캐스터.

그가 급히 텐션을 끌어올리며 그 광경을 중계했다.

[...맙소사! 말도 나오지 않는군요. 경기 상황을 시청자 여러분들께 전달하는 것이 저의 일이긴 하지만. 이건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정태준 선수의 3구! 스트라이크존 안쪽 보더라인을 정확히 파고드는 그 패스트볼을 그대로 관중석 상단에 꽂아버리는 강해준 선수의 라이너성 홈런 타구! 더히트의 좌익수 최해규 선수가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타구가 꽂힌 관중석을 바라보는 더히트의 팬들과 야수들, 그리고 코치진.

설마설마하는 순간에 벼락처럼 터져 나온 홈런이 강렬하게 경기장의 분위기를 휘어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광경에 압도된 사람들은 경기장 내부의 관중들만이 아니었다.

한국프로야구의 전설, 이신우의 기록이 깨질 수도 있다는 소식에 중계 스트리밍 서비스에 접속한 전국의 모든 야구팬들.

그들의 기대 섞인 심정을 뒤흔드는, 긴장감이 잔뜩 섞인 한재오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대기록까지는 앞으로 단 한 타석!]

0할 타자, 타격고자, 에드 강.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타자로 꼽히곤 했던 세오레즈의 멀티 유틸리티 강해준.

그가, 최악의 타자에서 최고를 넘어.

[새로운 전설이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전설을 향해 다가감을 알리는 목소리였다.

[서울 세오레즈 VS 대구 더히트 시청자 수]

[▲ 100,082명]

[▲ 96,015명]

[▲ 85,073명]

[▲ 72,099명]

중계 사이트의 서버가 터질 듯 가동되기 시작했다.

+++

"...."

전직 메이저리거이자 해설위원인 이도훈.

중계석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할 말을 잃었다.

베이스 위를 돌고 있는 해준을 바라보자 한여름 날씨에도 피부 위로 오도독 돋는 소름.

그만큼이나 지금 해준의 모습은 이도훈 해설위원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비선출인 한재오 캐스터는 실감하지 못한 것 같지만...'

선출, 그것도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그는 이번 타석에서 터져 나온 홈런, 아니 그 과정에서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일반적으로 대기록 달성을 눈앞에 둔 선수들의 반응은 동일하다.

극도의 긴장.

체력이 충분한 상황에서도 숨이 거칠어지거나, 시야가 좁아지고,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며 극도의 보수주의자로 변모한다.

새로운 시도를 회피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도 신중히 검토한 뒤에야 움직이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케이스의 경우.

의도와는 달리 코앞에서 대기록을 놓치고는 했다.

'그런 상태에 접어들면 여유가 사라지고, 몸에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버리지.'

이도훈 해설위원 또한 마찬가지로 경험했던 순간.

그렇기에 그것을 이겨낸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긴장을 풀어라, 몸에서 힘을 빼라. 평소에 연습하듯, 자연스럽게 플레이해라.

말들은 좋았지만, 대기록을 앞에 두고 있는 선수들이 받는 그 프레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해준은 달랐다.

평소보다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린 것이 분명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긴장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세밀하고, 파워풀하면서도 과감한 스윙 궤적을 그려버리는 괴물.

그 결과는 홈런이었고, 어린아이의 장난감을 빼앗아버리듯 경기의 분위기마저 일방적으로 강탈해버렸다.

그리고, 그 여파는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도훈 해설위원은 조심스럽게 이번 경기에서도 세오레즈의 승리를 점치기 시작했다.

투수 출신으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보통 투수들은 저런 스윙 궤적을 보게 되면..'

잔상이라도 남듯, 뇌리에 박혀 경기 내내 투수를 괴롭힌다.

'보통 경기라면 또 모르지.'

멘탈을 수습하고, 스스로를 재정비할 여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아니었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서로의 기세를 꺾어놓아야 하는 더히트와 세오레즈.

하지만 더히트는 이미 2패를 허용하며 수세에 몰린 상황.

그것만으로 이미 부담일 텐데, 설상가상으로 같은 팀의 대선배이자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전설인 이신우의 기록이 다른 팀의 선수에 의해 깨질 수 있다는 압박감.

그 상황에서 홈런을 허용했다?

정태준의 머릿속은 이미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얽혀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더욱이 정태준의 장기는 날카로운 제구와 예리한 변화구.

잡념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그의 장점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원인은, 단 한 번의 스윙으로 경기의 판도를 바꿔버린 세오레즈의 넘버 24, 야수 강해준.

그였다.

생각을 정리한 이도훈 해설위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단 한 번의 스윙. 그리고 그 존재감만으로 경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선수라...'

이제는 조금씩 명백해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존재 자체만으로 상대 팀의 선수들을 기가 질리도록 만들고, 위축시키며, 종국에는 경기의 방향까지 가져오는 존재.

강해준은 지금.

'새롭게 탄생한 슈퍼스타... 인가.'

한국프로야구의 새로운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

이도훈 해설위원의 우려는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따아아악-!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타구음.

[안타! 안타! 우익수 앞 안타를 만들어내는 2번 타자 장건우 선수! 어제 경기의 장타쇼에 합류하지 못했다는 것이 분했다는 듯, 안타를 터트립니다!]

급작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정태준의 투구 로케이션.

따아아악-!

[당겼습니다! 한가운데 몰린 공을 그대로 강타! 유장천 선수가 다시 한번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세오레즈의 타자들이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바짝 올라온 타격 컨디션을 자랑하듯 망설임 없이 배트를 돌리기 시작하는 선수들.

그에 당황한 정태준이 스트라이크존의 공략보다는 유인구로 헛스윙을 끌어내기 위해 시도해봤지만.

"볼- 베이스 온 볼스!"

[스트레이트 볼넷! 정태준 선수 웬일입니까! 제구력 좋기로 소문난 정태준 투수가 리드오프 홈런을 허용한 후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조병민 선수의 볼넷 출루로 세오레즈가 무사 만루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이미 정태준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을 안 세오레즈의 타자들은 유인구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더히트 야수들의 입안이 바짝 타들어 갔다.

점수를 내주는 것은 상관없었다.

비록, 어젯밤의 경기에서 밀리긴 했어도 타격전이라면 자신 있었으니까.

문제는.

'큰일 났다.'

'여기서 타순이 한 바퀴 돌아버린다면...'

'강해준, 그 괴물 자식의 타석이 다시 돌아온다.'

1회 초에 다시 강해준의 타석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더히트 선수들의 심장을 바짝 조여왔다.

꿀꺽-

'그리고 만약 그 타석에 또 홈런을 때려내면..'

그 이후부터는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불리해지는 처지였다.

상대는 이미 대기록을 달성했지만, 이신우는 아직 한 타석도 들어서지 못한 상태가 돼버릴 테니까.

즉, 상대가 잡고있는 인질이 그대로인데 자신들이 잡고 있던 인질은 해방되는 꼴이었다.

세오레즈에 의해 일방적으로 뒤흔들리기 시작한 경기 분위기. 대구 더히트 파크의 분위기는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퍼어어억-!

[1루! 이신우 선수가 더히트의 아기 사자를 호수비로 구해내는 데 성공합니다!]

한국프로야구가 나은 최고의 슈퍼스타, 이신우가 활약을 시작했다. 5번 타자 김지훈의 강습타구를 몸을 날려 잡아낸 이신우.

요지부동이던 전광판의 아웃 카운트가 드디어 올라갔다.

와아아아아아-!!!!

"좋았어!"

"역시 이신우뿐이다!"

"태준아 기죽지 말아라! 니 뒤에는 최고의 슈퍼스타가 있다!"

그와 함께 되살아나는 더히트 팬들의 응원 공세. 다시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팬들의 열기 속에서, 이신우는 글러브로 정태준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다! 수비를 믿어! 그냥 찔러넣으면 우리가 알아서 잡아줄게!"

그리고 잠시 뒤.

"...후우."

날카로워진 기세를 되찾은 정태준이 마운드를 박찼다.

[삼구삼진! 7번 문찬용 선수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볼배합! 더히트가 이렇게 위기를 탈출합니다!]

6번 이완석과 7번 문찬용을 연이어 삼진 처리한 정태준. 호수비에 힘입어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역시 태준이다.'

'말 한 마디에 태준이 상태를 돌린 신우 선배도 대단해. 역시 존재감 자체만으로 힘이 된다.'

그와 함께 더그아웃으로 돌아가 공격 이닝을 준비하는 더히트 타자들. 그들의 눈빛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다.'

'두들기고, 또 두들겨서.'

'강해준의 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이신우 선배님이 기록을 먼저 달성하도록 돕는다.'

반격의 시간이었다.

+++

보통 경기에 앞서, 전문가들이 꼽는 경기의 관전 포인트는 제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팀의 분위기, 타선의 타격 사이클, 선수들의 체력, 정신력, 응집력, 감독의 리더십 등등.

하지만 8월 25일 화요일.

1위 대구 더히트와 3위 서울 세오레즈의 3차전에 대해서는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이신우와 강해준의 대기록이지."

"연타석 안타, 홈런, 최소경기 타점, 홈런. 살면서 이 모든 기록이 한 경기에 걸려있는 걸 언제 또다시 보겠어?"

"미친 날이지. 미친 날이야. 이런 선수들이 한 날, 한 경기에서 맞붙게 된다니."

바로 해준과 이신우에게 걸린 대기록.

11연타석 안타, 그리고 5연타석 홈런을 노리는 해준.

최소 경기 50홈런, 그리고 1500타점을 노리는 이신우.

보통이라면 이 상황에서 그 어떤 투수도 정면으로 승부를 들어가지 않는다.

이 두 괴물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타격존에 공이 들어온다면 가차 없이 그 투수를 박살 내버리니까.

더욱이 대기록에 대한 집념으로 바짝 독이 올라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문제라면, 이 대기록을 노리는 타자들이 하필이면 한 경기에서 만나버렸다는 것.

그렇기에 투수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승부는 한다.'

'단, 우리 팀 타자가 대기록을 작성할 때까지만.'

'그 뒤에? 뭐하러 물어. 대놓고는 아니겠지만, 교묘하게 거르겠지.'

바로, 어느 한쪽이 대기록을 달성할 때까지는 승부한다는 것.

그렇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수비보다는 타격 쪽에 쏠리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타석수가 관건이겠네. 타자들이 얼마나 터지느냐. 강해준이야 그렇다쳐도, 이신우는 타석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기록을 달성할 가능성이 커지니까 말이야."

"정확히 말하면 강해준의 다음 타석이 돌아오기 전에 이신우의 타석이 얼마나 돌아오느냐지. 솔직히 아무리 많아도 두 번이 한계일걸? 1회에 10점씩 낼 게 아니라면 말이지."

하지만, 코쿤스와의 경기를 제외하고는 평소 내야수로 나서던 해준이 우익수 글러브를 낀 채 그라운드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중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우익수?"

"2루수가 아니라?"

"어떻게 된 거야? 더히트를 상대로 강해준의 저격 시프트는 유명한데."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강의 멀티 유틸리티 강해준.

보통이라면 그가 외야수로 나선 것이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포지션이든 믿기지 않은 수비를 선보이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대구 더히트와의 경기는 달랐다.

좌타자 일색에 당겨치기로 도배되면서도 리그 최강을 자랑하는 기형적인 타선. 그 타선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유일한 2루수가 바로 강해준이었으니까.

하지만 2루에는 이미 장건우가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뭐지?"

"박이인 감독이 총을 맞지 않은 이상 아무런 의미 없이 강해준을 외야에 뒀을 리는 없는데.."

"장타가 터져 나오는 걸 경계하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네. 단타는 내주고 장타를 억제하겠다는 의도일 거야."

"그건 이상한데.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긴 더히트 파크잖아. 최악의 타격구장. 더히트의 좌타자들한테 걸리면 그건 2루타나 3루타가 아니라 홈런이라고."

혼란에 빠진 더히트와 세오레즈의 팬들.

그 누구도, 해준이 우익수로 나서는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다.

"...후우."

그런 관중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라운드에 서 있는 해준.

'한번 제대로 막아볼까.'

그 동공 속, 무언가를 노리는 빛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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