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철인 (3)
8회 초, 2사.
치열했던 경기는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쳐야 한다.'
타석에는 세오레즈의 9번 타자 한민곤. 그가 배트 그립을 꾸욱 쥐며- 마운드의 투수를 노려보았다.
7과 2/3이닝 10K 1볼넷 3피안타 1실점.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더히트의 선발투수는 안태율. 세오레즈는 그의 압도적인 구위에 짓눌려 별다른 소득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한민곤의 마음이 급해졌다.
'이번 이닝에서 무조건 리드하는 상황을 만들어놔야 해!'
이제 곧이었다.
대구 더히트가 유독 기세를 폭발시키기 시작하는 그 이닝.
그것이 오기 전에 리드하지 못한다면 반쯤은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지만 의욕만으로 무언가 해결될 리가 없다.
크게 떨어지는 12-6커브. 그리고 허무하게 헛도는 한민곤의 방망이.
와아아아아아아-!
"좋았어!"
11번째 삼진.
말 그대로 압도,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안태율. 그가 포효를 내지르며 마운드를 내려갔다.
패넌트레이스 압도적 1위 팀. 그곳의 선발투수다운 모습.
한편, 삼진을 당한 한민곤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제기랄..'
웅성웅성-
약속이라도 한듯, 대구 더히트의 관중석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져 갔으니까.
'이제 오겠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세오레즈의 공격이닝이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자 조금씩, 조금씩 경기장 내부를 채워가는 소리가 있었다.
곧 있을 무언가에 대해 기대감을 높여가는 듯, 들썩이기 시작하는 경기장 전체의 분위기.
'왔구나.'
그리고.
쿵-!
예상하던 것이 오자, 한민곤은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워--!"
"우!"
쿵-!
단체로 맞추는 기합 소리에 맞춰, 발을 굴리기 시작하는 더히트의 팬들.
"워--!"
"우!"
쿵-!
그 모습에 중계석의 캐스터와 해설조차 감탄을 내뱉었다.
[...아. 시작됐습니다.]
[이게 그..]
[네, 대구 더히트 팬들이 기다리던 순간이죠.]
그런 순간이 있다.
증거도, 징조도, 그 무엇도 없지만.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은 특별한 순간.
대구 더히트 팬들은 그 순간을 이렇게 불렀다.
약속의 8회.
대구 더히트에게는 승리를, 상대팀에게는 패배를 안겨줄 그 순간.
[더히트 파크가 조금씩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중계석의 유리창도 떨리고 있네요.]
그렇기에 더히트 팬들은 발을 굴렸다.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남자, 그를 기다리며.
그리고 이신우가 타석에 들어서자,
-----...
일제히 발을 굴리던 경기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그와 함께 목청이 찢어져라 외치는 대구 더히트 응원단장의 목소리.
"약속의 8회가 돌아왔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
동시에 폭풍처럼 몰아치는 대구 더히트 팬들의 고함소리.
"우리 차례다!"
"약속의 8회 말!"
"이신우 타석이다!"
대구 더히트의 넘버 9, 이신우.
그의 존재는 그런 것이었다.
팬들이 강렬하게 원하는 만큼, 반드시 무언가를 이루고야 마는 선수.
그리고.
따아아악-!
까마득하게 넘어가는 타구.
이신우가 배트를 던져버렸다.
+++
뚝-뚝-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이 잔디 위로 떨어졌다.
숨 막히는 더위, 인조잔디를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고요한 대기.
8회 말, 개미지옥 대구 더히트 파크.
"...후우."
이신우의 역전 홈런포로 스코어는 1-2.
그 숨 막힐 듯한 긴장 속에서, 다시 한번 깔끔한 타구음이 터져 나왔다.
따아악-!
[쳤습니다! 안하성 선수의 초구를 공략해 2, 3루 간을 꿰뚫는 총알 같은 타구를 만들어내는 후안 파네다 선수! 더히트가 약속의 8회를 증명하듯, 연속 안타를 터트립니다!]
거듭이어서 찾아온 위기.
프레스룸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기자들이 탄식을 터트렸다.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가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약속의 8회, 그리고 8회의 사나이. 흐유, 무서워라. 8회만 되면 미친놈처럼 치고 나간단 말이지. 그러니까 이신우긴 하지만."
"이걸로 46홈런인가?"
"타점 신기록도 얼마 안 남았지."
"이러다 이번 시리즈에서 신기록 기록해버리는 거 아니야?"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단일 프렌차이즈 스타 이신우. 팀이 어려운 순간마다 빈번히 자신을 빛내는 선수.
그리고, 그동안 세오레즈에서는 강해준이 그런 존재였다.
"반면... 강해준은 다르네."
"역시 전설에는 미치지 못하는 건가?"
"이럴 때 해줘야 슈퍼스타 소리를 듣는건데.."
그렇기에 기자들은 곧바로 이신우와 강해준의 비교에 들어갔다.
"수비만 보면 체력은 돌아온 것 같은데.. 타격은 영 아니란 말이야?"
"꼭 예전 모습 보는 것 같지 않아? 수비의 신, 타격고자 강해준."
"갑자기 그러니까 정감이 가는걸. 하긴, 그동안 워낙 인간 같지도 않았으니 원."
"태생부터 스타였던 이신우와는 다르긴 하지."
"이신우와 비교하던 게 어리석은 일이었어. 커리어부터가 다른데."
3타수 무안타 2삼진.
8회까지 해준의 타격 성적이었다.
체력이 돌아온 것 같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해준.
"역시 강해준이라도 이신우에 비하면 멀었다는 소리겠지."
"역대급 타격전이라고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정말일줄이야.."
"이게 경험이 차이인 거지. 정말 좋은 선수는 시즌 후반에 활약하는 법이니까 말이야."
기자들은 이신우의 승리에 의견을 모았다.
반면, 그런 의심 속에서 2루수 전용 글러브를 낀 채 그라운드에 서 있는 해준.
'..뭔가 있는데.'
전부터 한참이나 글러브를 쥐었다 폈다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속 깊숙이서부터 느껴지는 묘한 간질거림. 무언가 터질 듯, 말 듯 한 그 느낌에 해준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며 숨을 내뱉었다.
"...후우."
호흡이라도 조절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안달이 난 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뭔가 치고 올라온다. 확실해.'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언가.
그 감각이 끊임없이 성벽을 공략하듯, 둥둥거리며 가슴 속을 쳐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벽의 너머.
의식 속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무언가를 감지한 해준은 자신을 안달나게 하는 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타격... 사이클?'
급격하게 올라간 체력.
타격 사이클이 그를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져, 그 뒤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만...'
거리는 멀지 않다.
얇은 성벽, 그 하나를 통과하지 못하고 막혀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조금만 돕는다면, 금방이라도 뚫릴 그런 성벽.
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현재 종합 피로도: 68.1%
'그렇다면..'
그 장애물을 부수어 버릴 때까지, 몇 번이고 두들기면 된다.
"..후우."
다시 한번 조절하는 호흡.
해준은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를 보며 자세를 낮췄다.
'이번 위기만 넘긴다면 우리의 공격 이닝. 그 전에 타격 사이클을 완전히 되찾는다.'
물론 꼭 자신에게 공이 오리라는 법은 없다. 실제로도 6회 이후로 타구는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올 것 같다.'
그렇기에 해준은 확신했다. 이레귤러적인 야수로서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곧, 장타를 만들어내기 위해 안달이 난 상대가 반드시 당겨친다고.
더군다나 상대의 타선은 좌타자로 도배된 상태. 당겨진 타구가 높은 확률로 자신에게 향한다.
'와라. 와라.'
주문이라도 외우듯, 뚫어져라 타석을 바라보며 타구가 날아오길 기다리는 해준.
이제는 완벽하게 물이 오른 몸놀림이 그 어떤 타구라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퍼어억-!
[미쳤습니다! 또 캐치! 2루수 강해준 선수가 날아올랐습니다.]
5번 타자 박치웅의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잡아냈을 때.
[REMOTE CATCHING!]
[타구 속도....]
[....]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수비 파트가 발동합니다.]
[수비 수치를 계산합니다.]
[피로도가 8.2% 감소합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68.1% -> 59.9%
기다리던 변화가 일어났다.
[수비 연동 구간(피로도 60% ↑) 탈출!]
[타격 연동 구간(피로도 20% ↑)에 진입합니다.]
[앞으로는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타격 파트가 발동합니다.]
+++
9회 초.
폭풍 같았던 8회 말이 끝나고, 경기장은 다시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겨우 1점?"
"어쩔 수 없지. 유일한 안타성 타구는 강해준에게 걸려버렸으니."
"그래도 이기고 있잖아."
"그렇지."
그리고, 이제는 상황을 낙관하기 시작한 대구 더히트의 팬들.
오늘, 그 누구보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던 더히트의 선발투수 안태율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안-태율!"
"안-태율!"
"끝내버려라!"
"완투승 가자 태율아!"
스코어는 고작 1점 차.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 더히트의 벤치는 불펜 보다는 안태율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택했다.
"오늘 구위 상태가 정말 좋습니다."
베테랑 포수 전용진의 말처럼, 오늘 안태율의 구위는 시즌 중 가장 좋은 상태였으니까. 안태율 또한 모처럼 찾아온 완투승의 기회를 놓치기는 싫었다.
'커리어 첫 완투승!'
그동안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경기를 마무리하는 느낌. 안태율은 그 성취감을 너무나도 쟁취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성급한 마음으로 승부에 들어갔을 때, 1번 타자 이완석의 방망이가 다시 한번 경쾌한 파열음을 울렸다.
따아악-!
[안타! 안타! 이완석 선수가 세오레즈의 마지막 공격 이닝 기회를 살려냅니다!]
1번 타자 이완석의 안타. 그 모습에 안태율은 정신이 번쩍 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 이건 잊어버리자.'
너무 쉽게 승부에 들어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의 이완석은 4타수 3안타. 애초에 타격 감각이 너무 좋았다.
'앞으로 잘하면 돼. 앞으로.'
그리고, 안태율은 그 생각대로 2번 타자 유장천에게서 다시 한번 삼진을 뺏어냈다.
부우웅-!
크게 떨어지는 커브의 궤적에 헛치고 마는 유장천.
"좋았어!"
경기 종료까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2개. 안태율이 쌍심지를 켜며 다음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바라보았다.
'..강해준!'
그리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3타수 무안타 2삼진. 그 괴물 강해준을 자신이 완벽하게 잡아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삼진으로 처리한다.'
오늘 경기의 지배자, 안태율의 포악한 시선이 타석을 향했다.
그 순간, 해준은 그런 상대의 심리를 꿰뚫어 보았다.
'삼진을 노리겠지.'
그리고 결정구는 커브.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2타석에서 삼진을 허용한 구종은 모두 커브였으니까.
좋은 결과를 냈던 패턴을 인제 와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때, 해준아. 커브 한복판에 줄 테니까 한 번 쳐볼래?"
그리고, 그런 해준에게 포수 전용진이 물었다. 해준이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진짜요?"
"그러니까. 후배 사랑 나라 사랑 아니냐. 일단 줄 테니까 쳐봐. 알았지?"
이미 경기에서 이긴 듯 유쾌하게 낄낄거리며 입을 터는 전용진. 하지만 해준은 그 속내를 짐작했다.
'어떻게든 흔들어 보려는 속셈.'
고작 1점 차.
누구라도 방심하기 힘든 점수 차였다.
"야, 해준아 진짜 커브 준다? 아니면 패스트볼 줄까?"
해준은 그런 전용진의 트레쉬토킹을 무시하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이전의 3타석과는 다른 감각이 자신을 맞이하고 있었다.
흙은 짓밟는 스파이크의 감각, 축발에 무게가 실리며 폭발준비를 맞췄다는 듯 긴장 상태에 들어간 근육 세포들. 머릿속이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해지며 그동안 좁았던 시야가 넓어졌다.
그 끝, 저 멀리. 대구 더히트의 전광판에 눈에 들어왔다.
[서울 세오레즈 1 : 2 대구 더히트]
홈런 한 방이라면, 그대로 역전이다.
'컨디션이 바짝 올라왔어.'
체력에 억눌려있던 울분을 이번 타석에서 터트리겠다는 듯, 온 몸을 휘감은 기묘한 느낌.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잡아챌 만큼 벼려진 감각. 너무나 예리하게 벼려져 자칫하다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오래가진 않을 거다.'
해준은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흐읍.."
억눌려있던 만큼 빠르게 최고조로 치달았지만, 이번 타석이 끝난다면 다시 원래의 자리를 찾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쳐낸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지.'
"후우.."
해준은 차분하게 숨을 내쉬며 홀로그램의 내용을 떠올렸다.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
*피로도와 부상을 회복시킵니다.
*타격 관련 트리거 감지 시, 발동됩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59.9%
수비 파트에서 타격 파트로 바뀌며 설명도 함께 뒤바뀐 특수 모듈 철인. 그것을 본 순간 확신했다.
치면 칠수록, 피로도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타격 사이클은 올라오리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비도 그랬어.'
단순히 체력이 올라왔다고 해서 수비 감각이 함께 올라오지는 않는다. 무뎌졌다면, 그 무뎌진 감각을 다시 갈고닦고 끌어올리는 과정을 동반해야지만 이루어지는 감각의 수복.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과정도 없이 너무나 급속도로 수비의 몸놀림과 감각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렇다면 타격도 마찬가지겠지.'
이번에도 같을 것임을 깨달은 해준은 투수를 바라보았다.
대구 더히트의 2선발, 시즌 들어 최고의 구위 상태를 자랑하는 오버핸드 스로우 투수.
그리고, 자신을 완투승의 제물로 삼으려 드는 사냥꾼.
해준의 동공 깊숙이서, 무언가 번뜩였다.
'쉽지는 않을 거다.'
지금의 자신은, 모듈이 없더라도 그 어떠한 구종도 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타앗-!
안태율이 마운드를 박찼다.
긴 다리로 형성하는 미친 거리의 스트라이드, 강하게 형성된 킥킹.
힙이 그대로 밀고 나오며 테이크백에 들어간 듯하던 상체가 순식간에 강한 회전을 동반한다.
그에 이어 보통 투수와는 격이 다를 정도로 높고, 전방에서 형성된 릴리스 포인트. 그곳에서 하얀 궤적이 쏘아졌다.
'온다!'
동시에 해준의 집중력이 극에 달했다.
'커브? 패스트볼?'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궤적을 파악한 순간, 휘두를 생각이었으니까.
그 순간.
피이잉-
이명과 함께 소리가 뭉개지고, 풍경이 흐려지며, 신경 세포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건...'
극도로 끌어올린 수비 때와 비슷한 감각. 계속해서 치고 올라오던 타격 사이클이 마침내 한계에 도달한 것이 분명했다.
모든 것이 늘어지고 뭉개지는 속에서 단 하나의 흰색 궤적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그와 뚜렷하게 전해지는 이질감.
'커브다!'
순간 확신했다.
패스트볼과는 너무나 다른, 가장 이질적인 궤적을 그리는 구종. 커브가 분명했다.
하지만 구종의 정체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린다...!'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몸을 최대한 억누르며, 폭발력을 키워나간다. 단순히 휘두르기보다는, 말 그대로 공을 박살내버리기 위한. 그리고 정확히 맞혀내기 위한 안배.
'커브의 궤적이 유독 그렇지.'
다른 변화구도 마찬가지지만, 커브야말로 인간의 뇌가 가장 쉽게 혼동을 일으키는 구종. 그리고, 오늘의 안태율처럼 압도적인 스핀량으로 떨어지는 낙폭이 더더욱 급작스러운 구질은 더더욱 그랬다.
'단순히 커브라 생각하고 휘두르면 오히려 당한다.'
그만큼이나 오늘 안태율의 12-6 커브는 최고였다.
하늘로 조금 솟는가 싶더니, 독수리가 사냥감을 노리듯 훅- 하며 궤적이 반전되어버리는 공.
끼이이익-!
그 순간.
"흐읍...!"
드디어 해준이 움직였다.
축발이 폭발적으로 몸을 밀어내며 중심이 이동한다. 동시에 콰짓-! 소리와 함께 벽을 만들어내며 어마어마한 힘으로 바닥을 짓밟은 왼발 스파이크.
치이익-! 얼마나 전진력이 강력했는지, 그 왼발 스파이크가 살짝 밀릴 정도였다.
그 상태에서 해준의 괴물 같은 동체 시력은 커브의 궤적을 마침내 완벽하게 읽어 들였다.
'..여기다!'
그와 함께, 최고조에 도달한 타격 감각이 오류와 착각으로 가득 차 있던 외부 정보를 과감히 필터링.
커브가 떨어져내리는 궤적을 정확하게 예측한다.
동시에 테이크백의 징조도 없이 번뜩 휘둘러지는 배트.
그 배트가.
따아아아아아악-!
마침내 상대의 숨통을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