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철인 (2)
퍼어엉-!
이글거리는 그라운드.
그 무더위를 뚫고, 투수의 맹렬한 패스트볼이 포수 미트를 찢어발길 듯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아웃!"
[안태율 선수! 더히트의 남자답게 갈수록 구위가 상승하는 것 같습니다! 7번째 탈삼진!]
4회 초, 세오레즈의 공격 이닝.
더히트의 선발투수 안태율은 1회에 허용한 홈런에 대한 세금이라는 듯, 미친듯한 페이스로 삼진을 뽑아내고 있었다.
프레스룸의 허상필 기자.
그는 그 모습을 보며 프로야구판의 오랜 격언을 읊조렸다.
"여름을 지배하는 자가 시즌을 지배한다...라."
한국 최고의 명문구단인 대구 더히트.
여름의 강자로 알려진 이 팀은 그 격언을 증명하듯 정규 시즌 최고 승률을 보유한 팀이었다.
특히나 역대 여름 기간 승률은 0.588로 KBO 10개 구단 중 최고 승률을 기록하는 여름의 지배자.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대구 특유의 폭염, 경기장의 인조잔디가 뿜어내는 열기, 통풍이란 개념을 부정하듯 설계된 경기장의 구조.
이 3가지에 익숙하기에 다른 팀의 선수들보다 여름에 강하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
"하긴 지금 그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지."
중요한 점은 하나.
그 사실이 갈 길 바쁜 세오레즈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 뿐.
"좋았어!"
"그거지! 세오레즈라고 뭐 별수 있냐! 더우니까 지들도 살고 싶어서 선풍기 돌리기 바쁘잖아!"
"얘들아, 그냥 기권하고 집에 가라! 어차피 우리가 이겨!"
4회를 마무리 짓고 들어가는 안태율,
대구 더히트의 팬들은 그를 보며 크게 환호하고 있었다.
한창 기세를 타고 있는 3위 세오레즈.
그들을 이번 시리즈에서 짓눌러놓는다면 한 달 남짓을 남겨놓은 기간 동안 편하게 갈 수 있기 때문.
한편, 그 광경을 바라보던 기자들도 벌써부터 더히트의 승리를 논하고 있었다.
"4회에 1득점이라.. 생각보다 힘들겠는데."
"그러니까. 이곳의 더위를 생각하면 초반에 힘이 있을 때 뽑아놨어야 했는데."
게임을 리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 세오레즈. 그 모습에 허상필 기자는 조용히 이곳 구장의 별명을 떠올렸다.
'개미지옥이라 이거지.'
개미지옥.
높은 습도, 작열하는 햇빛, 인조잔디에서 올라오는 열기.
이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원정팀 선수들은 이곳에서 플레이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놀림이 둔해지고, 배트가 느려지는 착각 속에 빠지곤 했다.
상상 이상의 더위에 체력이 서서히 바닥나며 컨디션조차 바닥을 쳐버리게 만드는 대구 더히트 파크의 저주.
이는 야구팬들 사이에서도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더위에 조금씩, 자기도 모르게 잡아먹히는 거지."
"눈치를 챘을 땐 이미 딱! 게임 끝."
"그나마 더위를 덜 탄 초반에 게임을 크게 리드해야 가능성이 있을 정도니까."
"그로기 상태에서 더히트한테 얻어맞아 역전당하는 게 한두 번인가? 괜히 약속의 8회가 아니야."
반면, 대구 더히트의 선수들은 이곳이 홈구장이라는 것을 뽐내듯, 별다른 체력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닝을 거듭할수록 대구 더히트는 팔팔 날뛰고, 상대 팀은 기력을 잃은 채 거세지는 공세를 버텨내기 바쁘다.
'슬슬 둔해질 때가 됐는데.'
'더위, 안 느껴지십니까?'
'어디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구 더히트 선수들.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오레즈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살폈다.
먹잇감의 체력이 떨어지는 순간, 자신들이 망설임 없이 그 목덜미를 물어뜯을 테니까.
하지만 세오레즈라고 만만히 당하고 있을 리 없었다.
4회 말, 1사 1루.
대구 더히트의 공격 이닝.
4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후안 피네다가 있는 힘껏 공을 당겨 쳤다.
따악-!
총알 같이 튀어나가는 타구. 누가 보아도 1, 2루 간을 꿰뚫는 안타였다.
[1, 2루 간! 이건 빠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촤아아악-!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해준.
[강해준 선수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공을 포핸드 캐칭으로 걷어버리더니.
타앗-!
"흐읍!"
그대로 역동작에 걸린 상태에서 힘껏 점프하며 2루로 백업을 들어간 유격수를 향해 공을 뿌렸다.
퍼어억-!
그리고 기어코.
"..아웃!"
1루 주자 이신우를 간발의 차로 잡아내는 호수비로 만들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동시에 유격수가 재빠르게 1루로 송구하며 완성되는 더블플레이.
와아아아아아아-!
세오레즈 응원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fuck!"
그 모습에 얼굴을 구기며 욕설을 내뱉은 후안 피네다.
반면, 마운드의 임우주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더니 해준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좋았으으으! 형님, 최곱니다!"
해준 또한 손가락으로 임우주를 한번 가리키고는 더그아웃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BOUT EVEN CATCHING!]
[타구.....]
그 사이 눈앞에 주르륵 떠올라 있는 홀로그램.
하지만 해준은 모든 자잘한 것들을 치워버리고, 가장 말미의 메시지만을 살폈다.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수비 파트가 발동합니다.]
[수비 수치를 계산합니다.]
[피로도가 4.3% 감소합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81.5% -> 77.2%
"후우.."
그와 함께 한결 더 가벼워지는 몸. 점점 바닥을 쳤던 컨디션이 돌아오며 납덩어리라도 달았던 것 같은 몸놀림이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만 가자.'
동공에서 순간 빛이 나며 해준은 더그아웃으로 몸을 감췄다.
그 모습에 대구 더히트의 선수들이 인상을 지푸렸다.
'최근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마지막 발악인가? 원래 체력이 완전히 방전되기 전에 종종 저런 모습을 보이는 선수들이 있지.'
'아직 4회야. 더 지켜보면 결국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거다.'
'..몸놀림이 조금 좋아진 것 같긴 하지만 여긴 더히트 파크야. 결국 최후에 웃는 승자는 우리다.'
그리고, 그 수비 장면을 보고 있던 기자들 또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몸놀림이 가벼운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분명 1회에는 저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에이, 수비잖아. 수비. 강해준은 컨디션이 안 좋아도 수비에서는 항상 날아다닌다고. 타격을 봐야 진짜 컨디션이 올라왔는지 알지."
"..그렇겠지?"
"그렇지."
1회에 비해 살짝 달라진 분위기를 풍기는 해준.
매번 기삿거리를 쏟아내는 해준이기에, 경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기자들이었지만 그 변화를 확신하지는 못했다.
아직은 작은 변화.
그리고, 그 변화는 이닝이 갈수록 그 몸집을 불려가기 시작했다.
+++
6회 말 1사.
"팽팽하네."
"역시 이신우야. 한가운데 몰린 싱커를 그대로 당겨서 넘겨버렸어."
"분위기를 확 가져와 버린 것 같은데? 철벽같았던 임우주가 슬슬 흔들린다."
더히트 파크의 저주.
그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적중했다.
더히트 킬러로 이름 높은 임우주가 급작스러운 구위 저하를 내보이며 동점 홈런을 허용한 것.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들길 차례인가?'
그런 임우주를 보며 대구 더히트의 타자들은 자신들의 먹잇감을 사냥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 맞았음을 증명하듯.
따악-!
[안타! 안타입니다! 중견수 앞으로 떨어지는 4번 후안 피네다 선수의 중전안타!]
딱-!
[아아! 3루수 조병민 선수의 반응이 굼뜹니다! 3루 선상을 타고 흘러가는 기습 번트에 꼼짝없이 내야 안타를 허용하는 세오레즈!]
안타에 이어 더위로 무뎌진 반응속도로 1사 1, 2루를 허용하고 마는 세오레즈.
떨어진 투수의 구위, 굼뜬 수비의 반응.
누가 보아도 대구 더히트 파크의 개미지옥에 사로잡힌 모습이었다.
세오레즈의 위기는 계속됐다.
[좌타, 유격수 김호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시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겨치는 더히트의 좌타자들입니다. 자신이 있다는 걸까요?]
[시프트가 어찌 됐든, 난 치고 싶은대로 친다. 이런 느낌이 강합니다. 프라이드 있는 명문구단의 타자들답네요. 실제로 이신우 선수도 그대로 담장을 넘겨버렸죠.]
더히트의 유격수 김호상.
임우주를 상대로 이번 시즌 0.382에 달하는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였다.
누가 보아도 분위기가 한 번에 넘어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
해설 또한 이 순간이 이번 게임의 분기점이 될 것을 말하고 있었다.
[높은 확률로 칠 수 있을 겁니다. 상대 전적뿐만 아니라 김호상 선수의 컨디션은 지금 최고조니까요.]
[그에 반해 개미지옥에 먹힌 듯 급격한 구위 저하를 보이는 임우주 선수. 이번에는 신중하게 가야 합니다.]
"...후우."
인상을 지푸리며 호흡을 가다듬은 임우주.
'그렇다고 도망갈 수는 없어.'
체력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도망가는 피칭으로 투구수를 늘릴 수 없었다.
'그리고 도망갈 수 없다면...'
임우주가 이를 악물며 마운드를 박찼다.
있는 힘껏 구위를 끌어올려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박아버리는 싱커. 그것이 그의 선택이었다.
그런 임우주의 공에 눈빛을 빛낸 김호상.
따악-!
그가 망설임 없이 초구부터 있는 힘껏 배트를 돌렸다.
[초구, 쳤습니다! 1, 2루 간으로 향하는 타구!]
'이런 제기랄!'
하지만 자신감과 다르게 코스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은 김호상.
싱커에 제대로 배트가 먹어버렸다. 더군다나 타구가 향한 위치는 2루수 강해준이 있는 곳.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병살타였다.
'일단 뛰자!'
손끝에서 빗맞은 불쾌한 진동이 전해 져왔지만, 김호상은 이를 악물며 1루 베이스를 향해 달려나갔다.
[..어, 그런데. 타구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커다란 변수가 나타난다.
배트 끝에 걸리며 평소보다 더한 스핀이 걸린 타구.
퍽-!
설상가상으로 그 타구가 그라운드의 튀어나온 부분과 부딪혀버렸다.
[튀었습니다!]
동시에 공을 잡기 위해 달려 나오던 해준의 왼쪽으로 크게 튀어버리는 궤적.
그 순간 모두가 내야 안타를 예상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의 반응속도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흐읍!"
여기서 해준의 말도 안 되는 플레이가 펼쳐졌다.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에 타구를 끝까지 예의주시하던 해준.
그리고, 타구가 튀었을 때.
해준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보지도 않고.
퍽-!
그대로 대각선 사선 방향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그와 함께 손에 걸리는 타구.
[맙소사! 강해준 선수! 코앞에서 일어난 불규칙 바운드! 하지만 그 타구를 짐승 같은 반사신경으로 낚아채 버립니다!]
그 뒤로는 걸릴 것이 없었다.
2루에 들어온 유격수 유장천에게 송구를 한 해준.
유장천이 그 공을 다시 1루로 뿌림으로써 더블 플레이가 완성됐다.
경악에 빠지는 대구 더히트의 홈구장, 그리고 팬들.
[4-6-3 병살! 강해준 선수가 다시 한번 더 비스트beast! 그 별명 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며 임우주 선수를 위기에서 구해냅니다!]
공이 튀는 순간, 꼼짝없이 역전을 허용할 것으로 생각했던 투수 임우주조차 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 어. 그러니까 이게."
"날파리 들어간다. 입 닫아라."
해준은 그런 임우주의 어깨를 툭 치며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REMOTE CATCHING!]
[타구 속도....]
[....]
[특수 모듈 '철인The Iron man'의 수비 파트가 발동합니다.]
[수비 수치를 계산합니다.]
[피로도가 9.1% 감소합니다.]
-현재 종합 피로도: 77.2% -> 68.1%
그와 함께 다시 한번 떠오른 홀로그램.
'슬슬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온다.'
해준은 근육의 피로도가 사라지고, 뻣뻣하게 굳은 것 같았던 관절의 유연성이 돌아온 것 같은 감각에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진짜 돌아왔는데?"
"어라?"
"아니. 저 반사신경 뭐야. 저건 아무리 강해준이라지만 컨디션이 내려간 상태에선 나올 수 없는 움직임인데.. 진짜 체력이 돌아왔나?"
프레스룸의 기자들은 그 광경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대구 더히트의 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응속도가 더 올라갔어?'
'저 모습 어디에서 체력 부진 징조가 나타난다는거야?'
'이 더위에서 저런 플레이라고?'
원정팀에게 내려지는 대구 더히트 파크의 저주.
'말도 안 돼. 컨디션이 쳐지기는커녕 더 올라간다고?'
해준이 그 저주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