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46화 (46/137)

46. 전설의 대주자 (5)

"투수!"

1루수 백호준의 외침이 들려왔을 때, 투수 고창환은 직감했다.

'아, 이거 일 났다.'

1회 초, 무사 1루.

이 상황에서 1루수가 자신에 콜을 보내는 경우는 단 한 가지.

'뛰었구나!'

도루뿐.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고창환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래도 아직은 잡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야에 2루가 들어온 순간.

'어?'

고창환은 공을 던질 수 없었다.

촤아아아악-!

2루가 이미 해준의 손에 떨어진 뒤였으니까.

"세이프!"

와아아아아아아아아-!

3루 응원석의 열광적인 함성에 그라운드가 뒤흔들렸다.

활짝 펼쳐져 있는 2루심의 양팔.

잠시 벙찐 얼굴로 해준을 바라보던 고창환의 눈썹이 휘어말려 올라갔다.

'어떻게 벌써?'

놀라기는 이 광경을 보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높은 텐션의 방송으로 유명한 캐스터 한재오.

그 또한 앞으로 이어질 치열한 주루 경쟁을 예고하듯 특유의 샤우팅을 시원하게 내질렀다.

[투수-! 공을 던지지도 못합니다! 강해준 선수의 기습적인 도루!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도루로 스코어링 포지션을 가져가는 데 성공하는 세오레즈!]

전직 메이저리거이자 이제는 완전히 해설위원으로 자리잡은 이도훈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놀라운데요. 강해준 선수의 발이야 원래 빠르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타이밍이 완벽했어요. 투수, 포수 중 그 누구도 1루수가 소리지르기 전까지 눈치채지 못했죠? 그만큼 기습적으로 허를 찔렀다는 소립니다. 강해준 선수 주루 센스가 이렇게까지 좋았던가요? 빈틈을 정말 확실하게 찔러 들어갔네요.]

하지만 가장 신이 난 측은 역시 세오레즈의 원정팬들.

그들은 경기 전의 서러움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게 바로 강해준이다, 이 말이지!"

"하루 만에 안된다고요? 되는데요!"

"니들이 못한다고 우리가 못하는게 아니야! 해준이 형에게 불가능이란 없다 이 자식들아!"

"우리가 야알못이냐, 니들이 야알못이냐! 이걸 보고도 안 된다고 할 거냐 이 야알못들아!"

"안된다고 할 때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해보고나 말해라!"

코쿤스 배터리의 허를 찔러버린 해준의 기습적인 도루.

그렇지 않아도 몇몇 언론에서 해준과 코쿤스의 도루 대결로 몰아가던 게임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먼저 도루를 성공시켰다는 사실은 분위기를 가져왔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허. 이거 놀라운걸. 주루하는 모습이 예전하고 다른 것 같지 않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속도 자체는 예전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느낌이 미묘하게 다르네."

"글쎄. 난 아직 모르겠는걸? 사람이 어떻게 하루 만에 변하겠어. 아무리 그 구해형을 인스트럭터로 초청했다고 해도."

반면, 프레스룸 내 기자들의 반응은 반신반의로 나뉘었다.

고작 한 번의 모습을 가지고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으니까.

이들은 신중히 게임을 관찰하며 해준의 도루 그 자체보다는, 도루가 가져온 변화에 주목했다.

"그래도 이 도루는 의미가 있어. 저거 봐봐. 송 감독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력으로 뺏겼으면 어쩔 수 없지만 방심하다 뺏겼다 이거지. 고창환이 저 친구. 송 감독한테 단단히 찍혔는걸?"

"양창섭은 어떻고? 포수가 가장 뒤늦게 눈치챈 것 같은데. 송 감독이 열불 날 만하지."

"야구는 분위기가 전부다! 안그래도 평소 말버릇처럼 하던 양반이잖아. 안 그래도 경기 전에 도루 대 도루, 대도의 제자 대 육상부 코쿤스. 말이 많았잖아? 분위기를 내준 게 마음에 안 든 거지."

도루는 놀랍지만, 그것으로 가져온 승기가 더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한 몇몇 기자는 벌써부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게임의 상황 변화를 기사로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대도 강해준의 선공, 짓밟힌 코쿤스의 베이스!]

[대주자의 전설, 구해형 코칭 효과? 180도 달라진 강해준의 폭풍 주루!]

[또 달라진 또해준. 이번에는 주루?]

[강해준의 기선 제압, 예고된 5툴 플레이어의 등장!]

그렇게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지자.

[서울 세오레즈 VS 서울 코쿤스 시청자 수]

[▲ 90,082명]

[▲ 89,015명]

[▲ 85,073명]

[▲ 82,099명]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

'망했다.'

코쿤스의 주전 포수 양창섭.

그는 하얗게 질린 얼굴이었다.

벤치를 박차고 일어난 송이수 감독, 저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모습은 열불이 뻗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양창섭은 팀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

이 경기 이후 송이수 감독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다.

'경기 끝나고 도루 저지 연습을 100번은 해야 퇴근 할 수 있을 것 같은 각. 이건 빼박이다.'

투수의 실수라 봐도 됐지만, 자신 또한 알아차리지 못하긴 매한가지였으니 질책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다른 것은 용납해도 분위기를 넘기는 실수만큼 용납하지 않은 송이수 감독. 양창섭은 그에게서 진하게 느껴지는 연장 근무의 냄새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이제 게임 초반이야. 넘어간 분위기는 다시 가져오면 되지.'

그렇기에 다시 마스크를 썼을 때.

양창섭의 눈빛에는 어느새 진지함이 가득했다.

'프로의 기본은 칼퇴근. 더 이상의 연장 근무는 사절이다.'

그와 함께 벤치에서 위치 이동 사인이 나왔다.

해준과는 반대로 내야를 조여오듯 위치를 조절하는 내야수들.

최근 들어 땅볼 타구가 비율이 높은 장건우를 의식한 시프트였다.

'창환아. 주자 리드폭 확실히 잡아놔.'

또한 강해준의 도루를 경계한 양창섭은 투수에게 견제구 사인을 보냈다.

더 이상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3루 도루의 난이도는 2루 도루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이미 분위기를 내준 상황에서 다시 한번 불의의 일격을 얻어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덥지도 않은 날씨, 투수 고창환은 유독 땀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퍼엉-!

연이어 견제구를 던져댔다.

"세이프-"

그때마다 올라가는 2루심의 양팔.

그 광경을 바라보던 캐스터 한재오가 입을 열었다.

[코쿤스의 투수 고창환 선수. 강해준 선수의 리드폭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군요. 이도훈 해설위원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글쎄요. 말 그대로 견제를 위한 견제로 보이네요. 견제사시킬 생각은 없어 보이고.. 뛰지만 말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고창환 선수의 견제는 뛰어난 편이 아니니 견제사시키기도 힘들겠지만요.]

결국 아웃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묶어두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였다.

해준이라고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해준은 아쉬운 듯이 혀끝으로 입술을 한차례 훑었다.

'느낌이 사라졌어.'

헐거웠던 게임, 그 빈틈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느낌.

그것이 바짝 올라선 투포수의 경계심에 묻혀 사라졌다.

그와 함께 해준의 몸속 깊숙이서 무엇인가 둥둥- 가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 느꼈던 새로운 감각에 대한 갈증, 다시 한번 뛰고 싶다는 재촉,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바짝 서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에서 전해져오던 스릴감.

그 모든 것이 도루에 대한 갈망을 끌어올렸다.

'나도 안다고.'

해준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며 거칠어지는 호흡을 애써 조절했다.

'수비 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야.'

아웃라이어 구해형의 감각을 이용한 주루.

그것은 정말 말로 형용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베이스에서 발을 떼고, 무게 중심을 낮추면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

손에 잡힐 듯 들어오는 투수의 동작 하나하나.

빈틈이 보이는 순간 시야의 주변이 늘어지고, 뭉개지며 극도로 오른 집중력.

그 속에서 모든 족쇄가 철컹- 풀리는 한없이 가벼워지는 발 끝의 느낌까지.

고막을 폭발적으로 울리는 그라운드와 스파이크의 마찰음은 덤이었다.

해준 또한 그것을 다시 한번 맛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자세를 낮추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자, 어디 보자.'

고양된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애쓰자 동공이 수축과 이완을 오간다. 동시에 머릿 속이 핑핑 돌아가며 그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경계를 한다지만 절대 도루를 못하는 상황일 리는 없고.'

견제가 뛰어난 투수도 아니고, 도루 저지에 불리한 사이드암. 구해형의 실력을 그대로 가져왔다면 훔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내 수준이 아직 낮은 건가?'

해준은 시야 한 편에 작게 떠 있는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주루 능력치]

*최대 주루 속도: 32.2km/h

*주루 센스: 50

*주루 기법: 55

*종합 평가: 55

20-80 스케일로는 평균 이상에 불과한 주루.

구해형 코치와 주루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나눈 후 살짝 상승하긴 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이 능력치로는 현재가 한계란 소리겠지. 더 다양하고 타이트한 상황에서 뛰기 위해서는 능력 자체를 올려야해.'

그렇다 해도 여전히 남들에 비해 압도적 우위를 가져간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구해형 인스트럭터의 사기적인 주루 센스.

뛰기도 전에 도루의 성공 여부를 알아차리게 만드는 이 센스는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기였다.

'그리고 이걸 더 제대로 써먹고 싶다면..'

더 미친 듯이 뛰는 수밖에 없다.

[아웃라이어 인스트럭터 파트]

*'대주자계의 전설' 구해형의 주루 기법을 익힐 수 있게 됩니다.

*'대주자계의 전설' 구해형의 주루 센스를 익힐 수 있게 됩니다.

*이번 경기 목표

-3도루 이상 기록 시, 주루 기법 수치가 상승합니다.

-평균보다 효율적인 주루를 기록 시, 주루 센스 수치가 상승합니다.

홀로그램의 내용을 살핀 해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도루는 이미 하나 했고...'

남은 것은 효율적인 주루.

그 말인즉슨, 남들이 한 베이스를 갈 때 두 베이스를 더 가라는 소리다.

'그리고 2루에서 두 베이스면 득점이다.'

2루에 서 있던 해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타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2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장건우가 타격 자세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건우가 안타를 쳐줘야 해. 적어도 외야로 빠져나가는 타구가 나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해준은 무게 중심을 낮추며 리드폭을 조절해나갔다.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몸 속의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숨쉬듯 날뛰며 우리에서 뛰쳐나갈 준비가 된 짐승처럼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긴장이라도 한 듯 숨을 몰아쉬는 고창환 선수. 2번 타자로 들어선 장건우 선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아웃 카운트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카운트는 3-2.]

득점의 기회가 찾아왔다.

고창환을 풀카운트까지 몰아넣는 데 성공한 장건우.

결국 이대로 볼넷을 내줄 수 없던 고창환은 공을 우격다짐으로 스트라이크존에 밀어 넣는다.

따악-!

그와 함께 울려퍼지는 불쾌한 파열음.

고창환의 싱커를 때려내는 데 성공했지만 살짝 빗맞은 타구였다.

배트 끝에 걸린 공은 기묘한 스핀과 함께 낮게 유영을 하며 투수 옆을 지나갔다.

"유격수!"

그 타구 궤적을 확인한 고창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확신했다.

'타구가 죽어있어! 유격수 땅볼이다!'

하지만.

퍽-!

그라운드와 충돌하자 불규칙 바운드를 일으키는 타구. 동시에 그 궤적이 유격수에서 2루수 방향으로 급격히 튀어 올라버렸다.

'이런 제기랄!'

그 모습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 고창환.

2루수가 재빨리 커버를 하긴 했지만, 발이 빠른 장건우라면 이미 1루 베이스로 들어갈 것이 뻔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내야 안타다.

'시작부터 무사 1, 3루라고?'

고창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와 함께 그는 다시 한번 방심을 하고야 말았다.

아니, 그 뿐만 아니라 공을 놓친 유격수, 막 공을 잡아챈 2루수. 그리고 포수까지.

그 모두가 동시에 더 이상의 후속 플레이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야 땅볼이었고, 2루 주자는 3루로. 타자는 1루로. 그것이 끝이라 생각했으니까.

누가 생각해도 더 이상의 후속 플레이가 이어지기 힘든 상황.

반면, 3루 코치로 나선 이대수.

그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달랐다.

'해준아, 오버런이다!'

3루를 향해 달려오는 해준에게는 속도를 줄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그 주루 코스였다.

'3루 베이스를 그대로 돌겠다고?'

무리다.

그렇게 판단한 이대수 3루 코치가 스탑 사인을 보내려했다.

지금이라도 속도를 줄이면 3루를 지나친다해도 아슬아슬하게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와 해준의 시선이 마주쳤다.

해준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갈 수 있어요!'

그 눈빛에 담긴 확신에 이대수 코치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타구가 튀었더라도 평소대로라면 멈췄어야 옳다.

하지만 오늘따라 수준이 다른 주루 센스를 보여주는 강해준이다.

'..진짜 들어갈 수 있다고?'

짧은 순간 반신반의하며 홈에서의 세이프 가능성을 계산하는 이대수 코치.

그런 그의 시야에 무엇인가, 변수를 만들어내는 장면이 들어왔다.

막 공을 잡고는 3루를 바라보는 2루수.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벼락같이 한가지 가능성이 솟구쳤다.

'이거 설마?'

타이밍이 절묘하게 겹친 상황.

3루를 지나가려는 강해준, 그를 발견하고 뒤늦게 송구 동작에 들어간 2루수.

이대로 2루수가 홈이 아닌 3루를 향해 송구한다면...

'해준이가 3루를 지나간 뒤에야 송구가 온다!'

즉, 해준이 홈으로 뛸 충분한 시간이 확보됐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이걸 보지도 않고 확신했다고?'

이대수 코치는 등골을 타고 찌르르 울리는 전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고!"

파앗!

그와 동시에 더욱 폭발적인 발놀림으로 3루 베이스를 박차는 해준. 이대수 코치의 눈앞에서 해준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치고나갔다.

[2루 주자 강해준! 강해준 선수가 그대로 내달립니다!]

그 사이, 2루수의 송구를 받은 3루수.

"호오오오옴!"

"3루수, 던져!"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투수 고창환과 포수 양창섭 또한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지만.

촤아아아악-!

해준은 이미 홈플레이트를 통과한 뒤였다.

주심의 우렁찬 콜이 울려퍼졌다.

"세이프!"

[리드 거리: 5.1m]

[최대 속도: 31.9km/h]

[2루에서 홈까지의 소요 시간: 6.79초]

[리그 평균보다 효율적인 주루로 득점을 기록하셨습니다.]

[데이터를 종합하여 보정 계수 43.9배를 적용합니다.]

[43.9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좋았어!"

콜을 동시에 떠오른 홀로그램을 확인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해준.

그가 가슴 속의 뜨거움을 토해내며 포효했다.

스코어는 1-0.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강해준 선수의 과감한 주루 플레이! 세오레즈가 선취득점에 성공합니다!]

해준이 게임의 주도권을 가져온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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