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38화 (38/137)

38. 오비이락 (1)

세오레즈와의 1차전이 막을 내린 늦은 저녁.

코쿤스의 4번 타자 이근석이 얼굴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이게 어디 간 거야."

경기에 지고 난 날이면 이상하게 허리가 더욱 쑤셔온다. 결국 라커룸에 풀어놓은 짐들을 뒤적거렸지만, 진통제 통이 보이질 않는다. 이근석은 그것을 잃어버렸음을 알아차렸다.

그 모습을 본 유격수 허찬이 물었다.

"뭐 찾고 있으세요?"

"아, 내가 먹던 약 있잖아. 허리 때문에."

"잃어버리셨나 보네요."

"그러니까. 아, 다시 받으려면 골치 아픈데."

이근석은 허리를 매만지며 인상을 구겼다. 다시 받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 통증이 매우 신경에 거슬렸다.

내일 경기의 출전 여부부터가 걱정될 정도다.

"저도 있는데. ...어딨더라.. 어, 여깄네요."

주섬주섬 스포츠백을 뒤진 허찬이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주루로 먹고사는 선수들은 몸을 날리는 과정이 잦고, 자연스레 잔 부상을 달고 산다. 당연히 진통제 하나쯤은 가지고 다녔다.

"아 그럴까? 하나만 줘봐. 베테랑이나 돼서 통증 관리 못 했다고 경기 빠질 수도 없고. 일단 그거라도 먹어야겠다."

얼굴에 화색이 돈 이근석이 약을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여기 물... 이미 드셨네요."

허찬은 생수병을 건네던 도중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손을 거두었다. 이근석이 낄낄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제 살 것 같네. 내일도 하나만 더 줘라. 팀 닥터한테 말해서 새로 처방받을 때까진 네 걸로 버텨야겠다."

그리고는 스포츠백을 들고 곧바로 라커룸을 나섰다.

"일단 집이나 가자. 아, 온몸이 뻐근하네."

"어서 가야죠. 집에 가세요?"

"아니, 오늘은 근처 찜질방에서 몸 좀 녹이려고. 너도 같이 갈래?"

"전 됐습니다. 내일 뵐게요."

"어, 그래 들어가라."

잠시 뒤, 사람 하나 없는 고척돔의 원정 라커룸 불빛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7월 29일, 2차전의 날이 밝았다.

본래대로라면 오늘의 선발은 누구일지, 누가 부상에서 돌아왔는지, 어째서 저 팀의 미래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이런 기사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전날 밤을 화려하게 불태운 강해준의 압도적 활약상.

온갖 야구 관련 지면들은 그에 관련된 소식들을 쏟아내기 바빠보였다.

[한 경기 3어시스트, 국내 야구의 역사를 다시 쓰다.]

[157km/h, 159km/h, 162km/h. 실시간으로 진화하는 그라운드의 야수(野獸) 강해준!]

[코쿤스 감독 송진수 '강해준의 기록? 우리 코쿤스를 상대로 기록했다는 것이 더욱 대단한 것.']

[발이 묶인 코쿤스, 4위 세오레즈와 0.5게임 차까지 쫓겨.]

〔클린 보이가 악성 댓글을 감지합니다.〕

-야수가 160을 던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거 반올림하면 163임. KBO 구속 신기록인데;;

-도움닫기 해서 던졌으니까 10킬로는 빼야지. 어, 그래도 153이네?

-어디의 누구는 투수가 130도 못 던지더라.

-야구가 구속이 다냐? 130 던져도 제구력만 좋으면 된다.

-어제 포수 미트에 정확히 꽂히는 거 못봤냐? 외야에서 던져도 마운드에서 던지는 놈들보다 정확하게 던진다. 제구력 소오오름 ㄷㄷㄷ

-잊을 만하면 계속 뭔가를 꺼내 드는 강해준 선생 ㄷㄷㄷ

-이거 완전 도XX몽 센세잖아.

-이용자의 보호를 위해 블라인드 처리된 댓글입니다.

-이제는 백한타라는 별명이 진짜 어울리는 것 같다. 레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인데.

야구 관련 커뮤니티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오히려 포털 사이트의 딱딱한 기사보다는, 강해준의 송구 짤방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오우.... 송구 보소;;

-세오레즈는 용병 3명 쓰네. 이거 룰 위반 아님?

-레알루 외국인 용병 새로 데려온 줄 알았잖어;; 어깨 미친다 와 ㄷㄷㄷ

-ㅋㅋㅋㅋㅋ 야, 웃긴 게 댓글들이나 기사들 어디에서도 타격이 언급도 안된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못쳤음?

-5타수 3안타 1볼넷 1홈런 ㅅㄱㄹ

-존나 잘 쳤네;;

-육상부를 어깨로 박살 내버렸는데 타격 성적 같은 게 눈에 들어오겠냐. 그동안 저 코쿤스 주루에 멘탈 깨진 투수들이 수두룩한데;;

-진짜 모스퀴토 새끼들처럼 윙윙거리는 거 개빡쳤는데. 코쿤스 새끼들 뚝배기 역으로 깨지는 거 보니까 속이 다 후련하더라 ㅋㅋㅋㅋㅋ

그렇게 시간이 오전을 넘어선 무렵.

오후 1시 10분.

포털 사이트 메인에 단독 타이틀을 단 한 기사가 올라왔다. 막 점심시간을 끝나고 살짝 늘어진 직장인들의 잠을 화들짝 달아나게 만드는 제목도 함께였다.

[단독] 서울 소재 S구단 1군 선수, 금지약물 복용 정황 포착!

기사의 요지는 간단했다.

서울 소재 S구단의 라커룸에서 금지약물이 들어있는 약병이 흘러나왔다는 것.

기사가 올라온 지 1분도 되지 않아,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

-이게 뭐냐?

-S구단이면 어디야. 세오레즈?

-서울 세오레즈, 서울 코쿤스, 서울 레나프. 서울에서 따왔다 하면 3곳이나 되네.

-뉘앙스가 세오레즈인 것 같은데.

-기자가 바보도 아니고 세오레즈라고 말하진 않을 듯. 정황만 가지고 그러면 고소미 각인데 ㅋㅋㅋ

더군다나 기사 말미 내용은 이러했다.

「믿을 수 있는 소식통을 통해 확인한 바로, 이 약통의 주인은 현재 서울 소재 S구단에서 어마어마한 활약상을 펼치고 있는 선수로...」

누가 보아도 강해준을 저격하는 기사였다.

당연히 그 내용을 확인한 세오레즈 팬들이 멘붕 상태에 빠진다.

2026년, 새로운 총재가 취임한 뒤로 KBO는 금지 약물복용, 불법 도박 등에 대한 규정강화를 추진했고, 심지어 선례까지 있었던 상태였다.

시즌 초, 금지 약물을 복용한 한 선수가 100경기 출장 제재를 받은 뒤 연이어 방출 통보를 받은 것.

그런 상황에 금지 약물을 복용한 선수가 강해준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파문은 일파만파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시즌 중반을 넘어서기 시작한 패넌트레이스 경쟁.

선수들의 체력이 슬슬 달리기 시작할 시기에 이런 사건이 미칠 영향력은 치명적이었다.

-사촌형 친구 여친이 S구단 프런트에서 일하는데 이거 레알이라는듯;; 큰일 났다.

-그래서 S구단이 어딘데?

-윗댓 ㅂㅅ아. 그걸 믿냐? 사촌형 친구 여친은 어디서 받아온 개족보야. 그냥 지인 피셜도 아니고 지구촌 이웃사촌 피셜쯤 되냐?

-이거 누가 봐도 ㄱㅎㅈ임.

-고하정? 헐, ㅅㅂ. 나 걔 팬인데. 이번에 드라마에서 비주얼 오졌다. 지구뿌셔 ㅠㅠ 우주뿌셔 ㅠㅠ외모로 다 뿌셔 ㅠㅠㅠㅠㅠ

-ㅋㅋㅋㅋ 좀 웃겼다.

-강해준 말하는 건가.

-그런 듯? ㄱㅎㅈ이 걔 말고 더 있나?

옆집 백수 형이 동네 피시방 사장님에게 듣고 온 소리조차 사실처럼 뿌려지는 인터넷.

자극적 소문들이 빠르게 퍼져나가며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해준 이 새끼 그럴 줄 알았다 ㅋㅋㅋㅋㅋ 6년 0할따리가 갑자기 저렇게 쳐대는 게 말이 되냐 ㅋㅋㅋㅋㅋㅋㅋ

-타격은 각성했다 치는데 송구 속도가 한 경기에서 10킬로나 뻥튀기됨. 솔직히 운동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지 않냐? 약 안 하면 불가능이지.

-근데 옥시코돈이면 진통제 아님?

-진통제고 스테로이드고 약빨인건 변함없지 ㅋㅋㅋ 졸렬한 약쟁이들 변명일뿐이다.

-지들이 못한다고 남들도 못 한다네;; 집구석에서 열등감 드러내지 말고 나가서 알바라도 해라.

-ㅋㅋㅋㅋㅋ 왜. 팩트 들이미니까 반박 못 하고 인심공격하죠? 내가 왜 백수냐 300평대 주택에서 거주하는 자수성가 사업가다 ㅉㅉ

-인심공격은 뭐냐. 뻐큐 머겅 두 번 머겅 이거랑 비슷한 건가. 임신이라고 안 쓴 게 다행일 지경이네. 그 머리로 무슨 자수성가 사업가 ㅋㅋㅋㅋㅋ

그렇게 코쿤스 팬과 세오레즈 팬, 어그로 냄새를 맡고 몰려든 다른 팀 팬들까지 한 곳에 몰려 서로 치고받기 바쁠 때.

고척돔의 감독실로 해준이 호출됐다.

"...해준아."

"네, 감독님."

세오레즈의 박이인 감독은 강해준을 뻔히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언론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실 확인을 위해 불러낸 모습.

박이인 감독이 잠깐 침묵을 지킨 채 바라보기만 하자, 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절대 그런 적이..."

그때, 박이인 감독이 해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오늘 점심 짜장면이었냐?"

"네?"

"짜장면이구나. 입가에 다 묻었다. 먹다가 왔구나."

해준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박이인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거 물으려고 불러봤다. 꼽냐? 꼬우면 니가 감독해라.그나저나 말하지 않아도 알려주는 재주를 갖고 있는구나. 거참, 요즘 따라 새로운 재주가 자주 보이네."

무뚝뚝한 어조와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박이인 감독 특유의 화법. 해준이 대답했다.

"...어. 감독님."

"왜."

"그거 물으려고 부르신 거 아니죠?"

기쁜 소문이 지속력이 약한 향수라면 나쁜 소문은 구린내와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향수 냄새보다는 구린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기사가 올라온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금지약물 복용자가 강해준이라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팀 동료들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평소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내심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이런 부정적인 소문은 팀의 멘탈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당연하게도 팀을 관리해야 하는 박이인 감독의 입장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기껏 불러놓아 놓고 하는 말이 점심 메뉴라니.

소문의 당사자인 해준조차 그 무조건적인 믿음에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아니,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면 갑작스러울법한 활약에도 팀원들은 장난스러운 말투로라도 약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신인 시절의 제 모습을 찾았다고 말했을 뿐.

속마음이 어떨지는 몰라도, 그것이 세오레즈 선수들이 생각하는 한 동료들 간의 신뢰였다.

해준의 반응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박이인 감독이 입을 열었다.

"해준아."

"네, 감독님."

"너 약 빨았냐?"

이번에는 너무 돌직구 같은 물음.

해준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 대답에 박이인 감독이 손을 휙휙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뭘 물어? 어디서 헛소문이나 듣고 와서 감독 괴롭히지 말고 어서 나가."

그렇게 해준은 감독실에서 쫓겨났다.

어안이 벙벙해진 해준이 홀로 중얼거렸다.

"....헛소문이긴 하지."

그때, 조금 전의 물음이 떠올랐다.

'진짜 묻었나?'

해준은 입가를 훔쳤다.

"..."

손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

겉으로 보이는 프로야구의 세계는 화려하다.

평균 억대의 연봉, 높은 인지도, 그리고 스타 플레이어.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주목도가 높은 바닥이었고, 그만큼 온갖 루머가 자연스럽게 퍼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루머에 가장 민감한 직군은 무엇일까?

물을 것도 없이 현장에서 먹고 자며 안테나를 곤두세우는 야구 기자들이었다.

스포츠베어의 세오레즈 전담 기자 허상필.

그는 기사를 확인하고는 물기 직전의 담배 개비를 다시 곽에 집어넣었다.

'...터질 게 터졌군.'

기사의 신빙성은 뒤로하더라도, 분명 강해준의 활약은 비정상적인 면모가 있었다.

'이쯤에서 한번 정리하고 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고는 한 이름을 검색했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가기 시작했다.

띠이이이- 띠이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허 선배. 오랜만입니다?

이번에 단독 타이틀을 달고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

그곳에서 일하는 유치우 기자였다. 허상필과는 3년 차이나는 대학 후배이기도 했다.

"유 기자. 반갑긴 한데. 한 가지만 묻자."

-어, 그 약물 소문 때문에 그러시죠?

유치우 기자는 허상필이 원하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하긴, 세오레즈 전담 기자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면 원하는 소식은 그것밖에 없었다.

허상필 기자가 대답했다.

"어, 그거. 옥시코돈? 그게 KBO에서 지정한 금지약물이긴 하지. 그런데 그거 어디서 흘러나온거야?"

기사 전문에는 서울의 모 구단 라커룸에서 흘러나온 것을 입수했다고만 나올 뿐, 구체적 과정은 적혀있지 않았다.

'심지어 홈인지, 원정 라커룸인지조차 안 적혀있었지.'

팩트에 기반한 기사는 절대 그런 것을 빼먹지 않는다. 허상필 기자가 보기에 이번 기사는 어딘가 구린 곳이 있었다.

'누가 봐도 어그로성이 강하단 말이지.'

그리고, 유치우 기자의 대답은 그의 생각대로였다.

-...어. 이거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나도 저번에 도움받았으니까 알려드리는 건데.

그렇게 통화가 끝났을 때, 허상필 기자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라커룸 청소가 끝난 뒤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뒤져서 발견했다고?'

정말로 교묘한 제목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 소재의 S구단.

구장 내의 모든 쓰레기가 뒤섞인 봉투를 뒤져 발견했으니 당연히 저 S구단이 어디인지는 기자 본인조차도 모를 것이다.

세오레즈인지, 코쿤스인지. 심지어 그 전 시리즈에서 원정 라커룸을 사용한 팀인지조차.

'그놈의 조회수가 뭔지...'

허상필 기자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KBO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형님. 저 허상필입니다. 네, 네. 오랜만입니다. 저 혹시 사전에 금지약물 복용을 허가받는 선수리스트 같은 것도 공개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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