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패스트볼 경계령 (3)
서울 세오레즈와 광주 이칼코메드의 마지막 3차전이 예정된 고척돔. 기자실에 들어선 허상필 기자는 1루 쪽 홈팀의 응원석을 바라보고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흐. 분위기가 미묘하군.'
시작 전부터 들썩이던 지난 경기에서의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준석이 자신의 칼럼 「더 베이스볼 프릭」에서 터트린 강해준의 약점. 덕분에 제대로 된 공격을 하기도 전에 세오레즈 응원석 측의 분위기는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수위 타자로 물꼬를 트는 세오레즈의 최근 득점 루트 상, 강해준이 공략당한다면 시작부터 꼬일 가능성이 꽤 높았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른 기자들의 반응이라고 별다를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노골적인가.'
"이거... 오늘 세오레즈 좀 위험하겠는데. 강해준이 복귀하고 나서 5연승이었지. 그 승리의 득점 루트가 막혀버리면... 힘들지. 아무래도."
"지난 경기에서야 상하위 가릴 것 없이 타선 전체가 터졌다지만 오늘 선발이 워낙 막강하니까요. 가장 확률이 높았던 득점 루트가 막혀버리면 이야기가 안되긴 하죠."
"오늘 선발 루카스가 최근 7연승이지? 이야, 재계약은 따놓은 당상이네."
"그에 반해 오늘 세오레즈 선발은 임우주. 잘던지는 투수임은 분명하지만 이칼코메드 전 통산 ERA가 0승 6패 7.41... 솔직히 전 가망 없다고 봅니다."
"음. 그러면 나는 기사나 하나 미리 써놓을까. 제목 하나 멋들어지게 뽑아서. 강해준으로 흥한 팀, 강해준으로 망하다... 이거 어때."
"너무 자극적이지 않아요? 메인 기사는 힘들고 현장 화보 제목에나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욕 뒤지게 얻어먹는 건 당연하고."
"뭐 어때. 욕 안 먹는 게 우리 밥 먹여주냐? 우리 밥 먹여준 건 조회수야 조회수."
기대치가 바닥까지 떨어진 팬들과 관계자들. 그만큼이나 이준석이 제시한 데이터는 확실했다.
허상필 기자는 그 옆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이거. 이준석 그 친구가 비수를 날린 건 강해준만이 아니었군.'
야구에서 분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외로 크다. 한번 물살을 타기 시작하면 꼴찌팀도 1위 팀을 압살하기 시작하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라는 놈이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준석은 의도를 했든 아니든 세오레즈의 분위기를 확실히 죽여놓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저격당한 쪽이 더 멀쩡한가.'
허상필 기자는 글러브를 낀 채 터덜터덜 3루로 향하는 강해준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 어딘가 나른하면서도 날카롭게 빛내고 있는 승부욕 가득한 눈빛.
겉으로 봐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하긴, 멘탈 하나는 난 놈이지.'
그렇지 않다면 프로에서 6년간 조롱과 비난을 받으면서 구설수 하나 없이 버텨낼 수 없다. 작은 불화에도 SNS라던가 술자리에서 팬들과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강해준은 오히려 현장에서 팬들에게 가장 친근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허 기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최근 강해준이 뒤 졸졸 따라다녔잖아."
그때 다른 동료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잠시 고민하던 허상필 기자는 입을 열었다.
"3안타.. 정도로 하지."
동시에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오늘 세오레즈가 뽑아낼 안타 갯수 말이지?"
"자네 루카스가 저번 경기에서 1안타 완봉승 한 건 알고 있어? "
하지만 동료 기자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허상필 기자는 살짝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야구란 놈 참 어렵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강해준이란 선수가 더 어려워."
"..그게 무슨 소리야?"
허상필 기자는 그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2군에서부터 보아온 강해준의 모습을 떠올렸다.
'변화구를 못 친다고?'
웃기는 소리였다.
'강해준은 원래 포심도 제대로 못 치는 선수였어.'
그리고 현재, 투수들은 강해준을 상대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과연 이번에도 그럴까?'
허상필 기자의 망막 위로 설명하기 힘든 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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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초, 기자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선발 임우주는 무난하게 이칼코메드의 상위 타선을 막아냈다.
'정말 만날 때마다 성가신 녀석이야.'
병살을 기록한 이칼코메드의 여우, 박지수는 포수석에 자리를 잡으면서도 방금 타석에 대해 아쉬움을 삼켰다. 분명 절묘하게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타구가 어느새 강해준 글러브에 들어가 병살로 둔갑해버렸다.
'수비에서는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지.'
그라운드에 풀어놓은 야수 그 자체.
스파이크가 잔디밭을 박차며 역동적으로 수비하던 강해준의 모습을 떠올린 박지수는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른 잔상을 흩어버렸다.
'이제 집중하자.'
마운드에는 루카스 파간이 올라가 있었다.
이칼코메드의 1선발이자 선발 7연승을 내달리고 있는 마운드의 괴물. 하이패스트볼 코스와 그 반대로 날카롭게 떨어지는 스플리터, 바깥으로 훅- 달아나는 슬라이더를 조합하여 삼진을 양산해내는데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투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투구 패턴에 포심이 포함되어있지 않았다.
'이미 지난 2경기로 확인은 끝냈다.'
몇몇 사람들은 이준석의 칼럼으로 이칼코메드가 이득을 볼 것이라 말하지만, 그 말은 명백히 틀린 말이었다.
현장의 선수들은 눈뜬장님이 아니다. 이준석의 칼럼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며 지난 2연전에서 강해준의 약점을 확신한 지 오래였다.
'공략 포인트는 변화구. 포심은 던지지 않는다.'
루카스 파간과 박지수가 사인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런 박지수의 생각을 강해준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해준은 구종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가장 먼저 1루 관중석을 바라보았다.
'조용하다.'
물론 응원가는 울려 퍼지고, 치어리더들은 흥을 돋우기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제일 중요한 것이, 관객들에게서 느껴져야 할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대감. 그게 없어.'
지난 5경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때는 강해준이 타석에 들어서기만 해도 사람들은 소리쳤고, 열광했고, 주먹을 불끈 쥐며 무언가를 강렬히 기대했다.
그때마다 해준은 그에 보답했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분위기에 탄력을 받은 세오레즈의 타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들이 그라운드를 내려다보는 눈길에는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실려있었다.
그리고 해준은 지금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내 약점.'
변화구를 못 친다는 그의 약점.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한 타자로서의 불완전함이 관중과 팀원들 사이에서도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기대감을 앗아갔다.
이 상황에서 해준은 자신이 해야 할 것을 너무나도 명확히 꿰뚫고 있었다.
'쳐낸다.'
바로 타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모두가 안 된다 할수록, 강해준은 이를 악물고 해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이전만큼 악으로, 깡으로 버텨낼 필요도 없다.
사이클링 히트로 얻은 보상. 강해준은 숨을 한차례 몰아쉬고는 아이템을 사용했다.
[게스히팅 보상권(1경기)을 사용합니다.]
[초구를 예측하세요.]
*투수 - 루이스 파간
1.포심 패스트볼
2.슬라이더
3.스플리터
4.체인지업
해준은 떠오른 선택지를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보았다.
'루이스 파간의 구종 구사율은 포심 패스트볼 54%, 슬라이더 35%, 스플리터 10%, 그리고 나머지 1%가 체인지업...'
이 중 피해야 할 구종은 포심과 체인지업. 날아올 확률도 희박하지만 설사 날아온다 하더라도 쳐낸다면 손해였다.
'오늘만 경기할 건 아니니까. 어떻게든 슬라이더, 혹은 스플리터 모듈을 확보해야 해.'
결정은 쉬웠다.
[초구 예측 – 슬라이더]
그 사이, 포수와 사인을 나눈 루이스 파간이 마운드를 박찼다. 높은 곳에서 찍어내듯 때려내는 공, 그리고 18.44m의 공간을 단숨에 꿰뚫어오는 궤적.
부우웅-!
"스트라이크!"
공이 홈플레이트 한가운데로 오는가 싶더니, 훅- 하고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결과는 헛스윙. 하지만 해준은 오히려 가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던, 무언가가 바뀌었다. 기차가 다니는 철로 길처럼 강제되던 배트의 궤적이, 이제는 어디든지 뻗어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2구 예측 – 슬라이더]
다음의 예측은 또다시 슬라이더. 루카스 파간은 슬라이더와 스플리터를 모두 구사하지만, 상대 타자가 약점을 보이는 코스와 구종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유형이었다.
"볼-"
바깥으로 크게 휘어나가며 카운트는 1-1. 미동도 하지 않은 해준의 배트에 루카스는 살짝 홍채에 이채를 띄고는 다시 포수와 사인을 나누었다.
'이번에는 하이패스트볼, 혹은 스플리터. 루카스가 슬라이더를 3연속 구사한 경우는 카운트가 0-2였을 때가 대부분.'
거기에 더해 포심 패스트볼마저 배제한다. 자신이 지난 경기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낸 약점이 오히려 구종의 선택지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루카스가 다시 한번 투구판을 박차기 직전, 다시 한번 예측한다.
[3구 예측 – 스플리터]
퍼어억-!
몸쪽 하단 스트라이크존으로 오는가 싶더니 훅-하고 떨어지며 홈플레이트와 충돌하는 공.
'포심을 배제하니까 골라내기 정말 수월하다.'
해준은 잠시 타임을 부른 채 타석에서 벗어났다. 까딱하다가는 휘두를 뻔했다. 다행히 포심이 아니라는 것을 거의 확신했던 탓에 참아낼 수 있었지만.
'자, 그럼 다음 공...'
[4구 예측 – 스플리터]
해준은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숨을 몰아쉬며 뚫어져라 자신을 노려보는 루카스 파간. 어떻게든 기선을 제압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카운트는 2-1.
그리고, 해준은 상대 배터리가 걸어올 수 싸움을 꿰뚫어 보았다.
'이 여우가 내 반응을 놓칠 리 없지.'
3구 스플리터에 배트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몸이 움찔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박지수는 그 점을 기억하고는 다시 같은 구종으로 승부를 걸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어디 한 번 더 그 감각을...'
배트의 궤적이 마음껏 풀려나가는 그 느낌. 해준은 스플리터가 올 것을 알면서도 배트를 휘둘렀다.
부우우웅- 퍼어억-!
"스트라이크!"
다시 한번 같은 코스, 같은 궤적으로 오다 사라지는 스플리터. 이제 카운트는 2-2.
여태까지 2번을 휘둘러 2번의 헛스윙. 까딱하다가는 삼진을 당할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해준은 차분히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까지 쭈뼛 서는 것 같은 예리한 감각.
드디어 배트 컨트롤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그때부터 해준은 끈덕지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5구 예측 – 슬라이더]
따악-!
허전하기만 하던 배트 끝에 드디어 무언가 걸려든다. 결과는 파울.
[6구 예측 – 스플리터]
따아아악-!
홈플레이트 앞에서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걷어내 3루 쪽 파울을 만들어낸다. 극단적으로 앞에서 형성되는 히팅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배트 컨트롤이 이루어지며 공을 제대로 커트해냈다.
'온다, 이제 올 거야.'
그리고 해준은 상대 배터리가 슬슬 승부수를 걸어올 것을 눈치챘다. 강력한 구위를 내세우는 상대 투수는 자신처럼 끈덕지게 달라붙는 타자들을 제일 꺼리니까.
그 증거로 스트라이크존 바깥을 향해 확실히 달아나던 루카스의 공들이 어느 순간부터 보더라인을 노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피해가기보다는, 반대로 구위를 믿고 어떻게든 스트라이크존에 구겨 넣는 스타일.'
숨을 사납게 몰아쉬며 눈에서 불이 나고 있는 루카스 파간.
포수 박지수 또한 계속되는 커트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끝까지 포심 패스트볼을 배제했다.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7구 예측 – 슬라이더]
해준은 호흡을 고르며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찬 기색으로 타격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사람은 기계가 아니고...'
미래를 보여줄 것만 같은 데이터는 때때로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
루카스가 다시 한번 마운드를 박찼다.
2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기묘한 궤도. 그 상태에서 우타자인 해준의 몸으로 직진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훅- 프론트 도어성 움직임으로 홈플레이트를 파고들었다.
완벽하게 제구가 되었다면 아슬아슬하게 배트를 빗겨나갔을 루카스 파간의 슬라이더.
하지만.
'....몰렸다!'
행운의 여신은 강해준의 손을 들어주었다.
"흡!"
호흡을 멈추며, 있는 힘껏 배트를 휘두른다.
순식간에 홈플레이트 위를 가른 배트의 궤적.
그동안 보여주지 않았던 선을 그려내며, 스윗 스팟이 정확히 공을 때려냈다.
----텅!
그렇게 또 한 번.
[....런! 이럴수가, 이건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와아아아아아아아-!
[경기 시작 전, 약점이 유출되며 무참히 공략당할 것이라 예상되었던 강해준 선수! 7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그 루카스 파간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합니다!]
해준은 모두의 예상을 부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