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퀘스트 링크 (2)
타격은 타이밍이고,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다.
라이브볼 시대 최강의 좌완투수 말대로, 투수들의 피칭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그렇기에 타자들은 간혹 투수와의 승부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흐트러지고, 감각을 교란되는 착각 속에 빠진다.
"..후웁, 스읍."
당연하게도 강해준 또한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했다.
'더 패스트볼 긱. 진짜 이름값 한번 잘하네.'
통산 포심 패스트볼 타율 5할, 더 패스트볼 긱 토니 디에고 블랑코. 포심을 쳐내는데 특화된 그의 감각이 변화구에 대한 감각마저 잡아먹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것만 클리어하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된다.
해준은 시야 한구석에 떠 있는 퀘스트창을 바라보았다.
[퀘스트 링크 접속 중...]
[퀘스트 링크 가이드]
*퀘스트 링크를 클리어할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목표
-아웃라이어, 더 체인지업 드릴러 브랜드 맥케이 공략하기.
*보상
-1회 공략 시 대응 구종에 써클 체인지업 추가
-1회 이후, 대응 구종 등급 상승
-최대 BA급까지 상승 가능.
아웃라이어의 몸으로 들어갔던 블랑코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웃라이어를 직접 상대하고 있었다.
물론 언뜻 들으면 전보다 까다로울 수 있는 조건이다. 한 분야에 특화된 사람의 몸을 이용하는 것과 상대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쉬울지는 명백했으니까.
하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듈을 사용했던 해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타자에게 있어서 타격 자세란 선수로서의 아이덴티티와 같다. 즉, 이번에도 타자에게 깃들어 2개의 타격 자세를 가지게 된다면 2개의 아이덴티티,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것.
2개는 어찌어찌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3개라면? 4개라면?
'내가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릴 거야.'
서너 개의 타격폼을 공존해서 쓴다? 그것도 각각 특정 구종에 특화되어있는 타격폼을? 그것은 타자에게 있어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투수들이 자세만 보고도 그 타자의 취약점을 알아낼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것으로 괜히 걱정하던 문제는 해결됐다. 해준은 관심을 마운드로 돌렸다.
'그나저나 더 체인지업 드릴러라..'
그곳에는 오른손에 글러브를 낀 작은 좌완투수가 서 있었다.
[아웃라이어(Outlier) 더 체인지업 드릴러The Changeup Driller]
-브랜드 맥케이
[소속]
-이스턴 리그
-더블A
-포틀랜드 시도그스
[특이사항]
-20세
-마이너리그 1년 차
[아웃라이어 업적 *비활성화*]
-통산 체인지업 투구비율 52.1%
-통산 체인지업 피안타율 0.121
그런데 아웃라이어라더니, 확실히 변태 같은 업적이다.
해준은 50%가 넘는 체인지업 투구비율에 주목했다.
'...체인지업을 패스트볼처럼 던진다는 소리잖아.'
모든 투구의 기본은 패스트볼.
야구선수라면 코치와 감독, 열성적인 부모님으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으며 자라는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패스트볼이란 사람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이며 제일 강력한 공이니까.
그렇기에 대다수 투수는 투구 내용의 40%, 혹은 그 이상을 패스트볼로 구성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체인지업이 절반을 넘어가는 변태적 구성. 그러면서도 피안타율은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로 하듯.
'5구 연속 체인지업? 제정신이 아니야.'
키가 175cm도 안 되는 왜소한 투수는 미친 듯이 체인지업만을 뿌려대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사이사이에 완급조절이 들어간다.
'느린 공, 더 느린 공, 더더욱 느린 공.'
보고 있는 타자 입장에서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다. 해준은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덕분에 타이밍이... 거지 같아.'
말 그대로 또라이 같은 투구 패턴. 이 남자가 이렇게 던지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공중에 멈춘 것만 같이 브레이킹이 걸리는 어마어마한 무브먼트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해준은 이 공을 포기했다.
어느새 카운트는 3-2.
해준을 처음 상대하는 아웃라이어 브랜드 맥케이는 간을 보듯 조금씩 느린 공의 속도에 해준을 적응시켜놓고 있었다.
야구선수로서 평생을 살아온 해준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올 거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이 남자는 이제 체인지업을 던지지 않는다.
그 사이 다시 왼발이 투구판 위로 올라갔다.
그와 함께 팔을 한차례 크게 뒤로 넘겼다 다시 올리는 올드스쿨 와인드업.
'이쯤 되면 올 거야.'
체인지업이 강력한 이유는 간단하다.
패스트볼과 같은 투구자세, 팔 스윙에서 뿜어져 나오기 때문. 그렇기에 제아무리 아웃라이어라도, 체인지업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강력한 체인지업은 패스트볼이 동반되었을 때야 완성되니까.
그것을 나타내듯, 이 남자의 체인지업 투구비율 또한 50%. 반대로 말하면 다른 절반의 공은 체인지업이 아니라는 것과 일맥상통한 소리였다.
해준은 그것을 노리고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이제 내가 유리하다.'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어드밴티지로 상대를 짓눌러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상대는 나를 모르지만..'
그는 상대를 안다.
오히려 체인지업만 뿌렸다면 삼진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대는 해준이 패스트볼에 비정상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체인지업의 속도에 적응된 타자는 패스트볼이 올 것이 알면서도 헛스윙, 혹은 범타에 그칠 확률이 높다는 것을.
'하지만 난 아니야.'
패스트볼에 대한 블랑코의 감각은 그 무엇보다 예리해서, 느린 공을 몇 번 본 것만으로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사이 투수의 왼발이 폭발적으로 투구판을 밀어냈다. 그와 함께 상체가 역동적으로 회전하며 강속구 투수의 그것처럼 폭발시키듯 공을 때려온다.
슈우우우욱-!
홈플레이트와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오며 날아오는 공.
'왔다!'
드디어 공에서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며 타이밍을 앗아가던 브레이킹이 사라졌다.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던 해준은 확신을 가지고 울분을 폭발시키듯 배트를 휘둘렀다.
따아아아악-!
볼 것도 없이, 해준이 그려낸 배트의 궤적은 그대로 공을 잡아먹었다.
[상대할 수 있는 대응 구종이 추가되었습니다.]
*포심 패스트볼 55
*써클 체인지업 0 -> 20
+++
고양 세오레즈 대 레나프 3차전.
1차전 게임을 망치다시피 했던 이훈이 결장하며 2차전부터는 2군의 또 다른 포수, 김동수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뛰어나진 않지만, 안정적인 프레이밍과 블로킹으로 투수를 리드해나가는 김동수.
그렇게 4회 초, 다시 세오레즈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자 김동수는 별다른 고민 없이 사인을 보냈다.
'써클 체인지업. 바깥쪽으로 빠지도록.'
투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좌완투수가 던지는 써클 체인지업은 해준 같은 우타자에게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구종 중 하나였다.
홈플레이트를 향하는 것 같으면서도 마지막에는 휘어져 나가며 떨어지는 궤적.
더군다나 상대는 그 강해준이었다.
'최근에 패스트볼은 좀 잘 치게 됐다지?'
김동수 또한 눈이 있으니 1차전에서 정한평이 해준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눈앞의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타자로서 해준에 대한 편견은 모든 선수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있었으니까.
이 사람은 안 된다. 수비는 몰라도 타자로서는 힘들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달랐다.
'진짜 미친놈처럼 후려갈기잖아?'
130km/h의 공에도 헛스윙을 연발하던 선수가 140km/h가 넘는 공을 수월하게 담장 밖으로 넘겨버린다.
어느 코스로 가도 그랬다.
'..도대체 무슨 변화가 있던 거야?'
그리고 놀라움에 해준의 타격 내용을 유심히 분석한 김동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전부다 패스트볼만 공략했어?'
간혹 나오는 변화구에는 헛스윙. 1차전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2차전에서 직접 리드를 한 김동수는 그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생각해보면 강해준은 한평이의 체인지업을 공략한 적도 없지.'
첫 타석에서는 방심을 노린 기습 번트.
두 번째 타석에서는 패스트볼을 때려 넘긴 홈런.
안타를 때려낸 다른 타석이라고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2차전 중후반 이닝부터 투수를 철저히 변화구 승부로 리드한 김동수는 확신했다.
'이거, 변화구를 건들지도 못하는구나.'
덕분에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린 해준의 배트.
이번 경기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첫 타석에서 이미 삼구삼진을 뺏어냈으니까.
퍼어엉-!
"볼--"
그 사이 초구가 미트에 틀어박혔다. 스트라이크존 바깥을 살짝 벗어난 공.
김동수는 슬쩍 해준을 바라보았다.
'미동이 없잖아? 아예 휘두르지 않기로 결심했나.'
간혹 이런 타자들이 있다. 맞추지 못할 것 같으면 걸어 나가겠다는 요행을 바라는 선수들.
김동수가 마스크 뒤로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원하는 대로 될까?'
이번 미트의 위치는 스트라이크존 한복판. 위험할 수도 없는 선택이었지만, 지난 2차전에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해준을 관찰한 김동수는 직감하고 있었다.
'이것도 못 건드린다.'
슬라이더, 혹은 커터 같은 공들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같은 패스트볼 계열의 공들은 궤적으로 승부하기에 이렇게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공은 타이밍이 맞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타이밍을 흐트러트리는 체인지업은 달랐다.
해준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으니까.
"스트라이크!"
그것을 아는지 해준은 배트를 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멀뚱히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 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해준.
김동수는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살짝 미트를 옮겼다.
'그래도 두 번 연속이면 투수가 불안해하니..'
고개를 끄덕인 투수가 다시 투구판을 박찼다.
"스트라이크!"
카운트는 1-2. 투수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
'자, 이제 그만 들어가자.'
망설임 없이 같은 위치, 같은 구종으로 투수를 리드하는 김동수.
이제는 확신에 가득 찬 투수가 자신감이 깃든 팔스윙으로 써클 체인지업을 뿌려왔다.
슈우우우욱-!
'오케이, 삼...'
그리고 곧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한 공이 미트에 박힐 것은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던 김동수.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예상치 못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딱-!
"파울-"
해준이 내민 배트 끝에 걸려들며 3루 선상 밖으로 벗어나는 타구.
'..뭐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김동수는 알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아까보다 타이밍이 맞는 것 같은데?'
비록 파울이었지만, 해준이 써클 체인지업을 쳐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