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특명, 포인트를 모아라! (4)
많은 사람들은 타격과 주루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한다.
타격은 타격일 뿐이고, 주루는 주루일 뿐이라고.
타자의 기록을 살펴봐도 그 사실은 쉽게 드러난다. 주루가 뛰어나다고 해서 타격이 뛰어날 것이라는 상관관계는 기록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발이 빠르다고 해서 타격을 잘하리란 법은 없고, 타격을 잘한다고 해서 발이 빠르리란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정작 몇몇 선수들은 다른 말을 하곤 했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다면, 투수와의 심리 싸움에서 도움이 될수 있다고.
그것이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심리적 요인에 불과할지라도, 분명 현장의 선수들은 주루가 타격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를 경험하곤 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1회에는 포수와의 사인을 확인하고 거침없이 공을 뿌렸던 투수 정한평. 그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사인을 거부하고 있었다.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투수가 해준이를 경계하는군요."
"...그럴만 하지."
조대욱 감독과 김한륜 타격 코치. 그들은 고양의 3회 초 공격을 주의깊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투수의 슬라이드 스텝이 빠른 편도 아니고, 포수의 어깨가 강한 편도 아니야. 그렇다고 견제가 쓸만한가? 그것도 아니지. 이름이 정한평이라고... 저 친구 야수 출신이었지 아마?"
"네, 최근 작년 8월에 전향했다고 하더군요. 이번 시즌은 오늘이 5번째 등판입니다."
"그래서 그러는거구만. 어쩐지 어설프더라니.. 그러니 발이 빠른 해준이를 출루시키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지. 1회처럼 도루를 허용한다면 2루타를 맞은 것과 다름없는 전개이기도 할 테고. 부담감을 느낄만하군."
고양 세오레즈는 해준이 기습 번트, 도루, 그리고 뛰어난 주루플레이로 원맨쇼나 다름없는 활약을 펼치며 선 득점을 기록했다. 그 뒤 3번 권성욱의 단타와 4번 채태오의 볼넷으로 무사만루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후속 타자가 각각 삼진과 병살에 그치며 추가 득점에 실패. 2회 공격에서도 삼자범퇴를 당한 채 3회를 맞았다.
그렇게 다시 이닝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선 해준. 포수 나종덕은 전 이닝에서 삼진을 당한 채 들어오며, 해준에게 정한평의 구위에 대한 정보를 말해주었다.
"속구는 그럭저럭인데 체인지업 각이 예리해. 왔다 싶어서 휘둘렀는데 배트에는 아무것도 안 걸리더라. 어후, 저 정도 변화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해준은 그 주의를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속구는 그저 그렇지만 체인지업이 그렇게 귀신같다고?'
그 설명을 들었을 때 해준은 자연스럽게 인천 플레인즈의 마무리, 정수호를 떠올렸다. 130km/h 중후반의 패스트볼과 120km/h 중반의 절묘한 체인지업. 그 두 구종만으로 타자들을 유린하는 마운드의 수호신.
'저 투수가 그런 급일 리가 없지.'
그렇기에 확신이 들었다. 어딘가 약점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라면 진작 1군으로 콜업 되는 것이 정상이니까. 올해 투수진이 박살 나버린 레나프 1군이 저런 선수를 2군에서 묵혀두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이미 상대 투수는 자신을 매우 경계하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어떻게든 출루를 시키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져올 정도. 그리고 해준은 투수의 구위에 대해 전해주며 뒷말로 투덜거리던 나종덕의 말을 상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친구 투수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 그런 주제에 변화구는 기가 막힐 정도네. 아무튼 재능러들은 나랑 안 맞는단 말이야."
그리고 이 말이 떠오른 순간, 해준은 망설임 없이 이번 타석에 대한 타격 어프로치를 결정지었다.
'전향한 지 얼마 안 된 투수... 느린 슬라이드 스텝, 어설펐던 견제구. ...그래, 그런거지.'
해준의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가 슬며시 피어났다.
'보통 투수들은 두 가지 유형의 타자들을 상대할 때 더욱 집중력을 쏟아붓는다.'
장타력을 갖춘 타자거나, 발이 빠른 베이스 러너의 재질을 갖춘 타자.
'주자를 묶어둘 수 없는 기본기가 부족한 투수. 그리고 이미 나는 베이스를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즉, 지금 저 투수는 타자로서의 해준보다 주자로서의 해준을 더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해준은 내야수들의 포메이션을 슬쩍 훑어보았다.
'번트 대비도 확실히 하고 있어.'
야수들에게도, 투수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장타에 대한 경계심은 보이질 않는다.
'정해졌군.'
해준은 마운드 위의 투수, 정한평을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한참이나 포수와 사인을 나누던 그가 드디어 공을 뿌려왔다.
"볼-"
초구는 볼. 과연 패스트볼처럼 보이던 공이 홈플레이트에 거의 도달하고 나서야 뚝- 하고 떨어졌다. 스플리터와 다를 바 없는 종적 움직임.
자세를 푼 해준은 스파이크로 땅을 고르며 상대 배터리의 투구 패턴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갈 것을 직감했다.
'주루가 좋은 타자를 상대하는 방법 중 하나.'
유인구로 상대를 유인하다, 넘어오지 않으면 거침없이 스트라이크를 꽂는 것. 한국프로야구에서 몸이 가볍고 발이 빠른 선수들은 장타력이 없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투구 패턴이었다.
안타를 맞더라도 단타, 볼넷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니까.
그만큼 상대의 신경은 오로지 주루에만 쏠려있었다.
"볼."
이번에는 한복판으로 오는 듯하다 훅- 떨어지며 빠져나가는 볼. 카운트는 2-0. 이쯤 되면 의심할 여지도 없다.
해준은 자세를 취하면서도 다음 공을 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볼--"
이번에는 바깥쪽으로 다소 빠지는 볼. 또다시 체인지업이다. 3구 연속으로 체인지업이 날아오자 해준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정수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구종을 지녔지만 1군으로 올릴 수 없는 이유라..'
이거 어쩌면, 단단히 호구 잡은 것일지도 모른다. 해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곧게 뻗어오는 속구가 스트라이크존 하단을 파고들었다.
"스트라이크!"
카운트가 거의 막바지에 다다르자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며 집중력을 올리는 정한평. 해준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속으로 물었다.
'이봐, 잊은 거 없어?'
동시에 해준은 배트를 휘두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카운트는 3-1.
이번에도 포심 패스트볼을 선택한 정한평. 그의 손끝에서 출발한 하얀 궤적은 몸쪽 스트라이크존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슈우우우욱-!
지금의 해준은 패스트볼에 한해서는 그 누구보다 강타자였다.
따아아아아아악-!
경기장 모두를 놀라게 한 광폭스러운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
"쯔쯔, 멍청한 선택이군."
브래드 피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금발 머리지만 살짝 부족한 숱이 흠인 남자 존 배쉬. 그는 혀를 차며 경기장을 가르는 해준의 타구를 바라보았다.
"주루에 너무 신경이 쏠린 나머지 미스터 강이 전 경기에서 장타를 4개나 터트렸다는 사실을 간과했어. 뭐, 원래 강타자도 아니었으니 신경 쓰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는 포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타구가 날아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투수가 잊는다면 그 사실을 상기시켜야 하는 것도 포수의 역할 중 하나지. 저 친구는 글렀군."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준을 제외하고도 여러 선수를 주의 깊게 관찰한 존 배쉬. 하지만 건질만 한 재원은 보이질 않았다.
"저 투수가 그나마 조금 더 갈고 닦으면 쓸만할 것 같긴 하지만..."
메이저리그의 저명한 코치는 커브는 감각, 체인지업은 기술이라 말했다지만, 저 정도로 날카로운 체인지업은 엄연한 재능의 영역이다. 잠시 고민에 빠진 존 배쉬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아니야. 각만 날카로우면 뭐하나. 보아하니 스트라이크존에 꽂아 넣을 수는 없는 모양이지. 상대가 휘둘러주지 않으면 써먹을 수 없는 공이야."
그것이 존 배쉬가 정한평의 투구를 보아오며 내린 결론이었다.무브먼트가 유독 뛰어난 변화구는 마이너리그에도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그것을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수 있는 선수는 마이너리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이미 메이저리거일 테니까.
"강도 그걸 눈치챘으니 한 번의 스윙으로 저런 홈런을 만들어낸 거겠지. 타자로서의 수 싸움도 장난이 아니야."
역시 어떻게든 데려가야하는데.. 라며 존 배쉬는 베이스를 돌고 있는 해준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Execuse me?"
한국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구수한 발음. 존 배쉬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곧 눈을 살짝 크게 치켜떴다.
"huh?"
스포츠 베어의 세오레즈 전담 기자, 허상필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허상필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나 했는데 맞네. 살이 좀 많이 찐 거 아니야? 아무튼 오랜만이야, 대머리 오타쿠."
+++
해준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볼-"
3회 초, 타석에 들어선 장원진은 여태 단 한 번의 배트도 휘두르지 않고 있었다.
타석에 들어서기 전, 해준이 알려주고 간 투수의 약점.
'투수가 스트라이크존에 변화구를 집어넣질 못한다고?'
눈앞에서 도깨비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현혹되어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장원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잖아?'
배트 한번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운트는 3-2. 볼은 체인지업이었고, 스트라이크는 포심이었다.
'이러면 쉽지. 어디 나도 한번 해준이 형처럼 장타를 노려볼까.'
약점이 드러난 투수는 타자들에게 얻어맞고 내려가는 일이 십상. 장타를 노린 장원진은 배트를 길게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게임은 생각 외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부우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포심과 구별이 되지 않는 정한평의 체인지업. 스트라이크존에 집어넣지 못한다 해서 그 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더 헷갈리잖아!'
포심이라 생각하고 휘두르면 체인지업,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포심이 들어와 스트라이크존에 틀어박힌다.
덕분에 꽉 막혀있는 수도꼭지처럼 타선은 좀처럼 터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지선다의 강요 속에서, 타자들은 오히려 언제 포심이 들어올지 모른다는 초조함에 쫓겨 헛스윙의 빈도만이 높아져 갔다.
1군이라면 몰라도, 2군에서의 정한평은 충분히 게임을 지배할 만한 투수력을 가진 선수였다.
볼넷 아니면 삼진. 극단적 투구 패턴으로 이닝을 소화하며 기세를 타기 시작한 정한평.
하지만 타순이 일순한 5회 초, 해준이 다시 이닝 선두 타자로 타석에 들어섰다.
그 순간 정한평은 속이 꽉- 막혀오는 답답함에 숨이 죄어오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던지지?'
아무리 눈알을 굴려보아도, 어디로 던져도. 해준을 피해갈 곳은 보이질 않았다.
내보내자니 주루 플레이가 신경 쓰이고, 들어가자니 홈런을 허용할 것 같다.
"베이스 온 볼스-"
그렇게 멘탈이 흔들려버리니 포심의 제구조차 말을 듣지 않는다. 레나프의 배터리는 결국 어영부영하는 사이 해준을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내고야 말았다.
'이거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 상황에서 해준은 굳이 배트를 휘두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타격은 아무리 잘 쳐도 3할을 넘기면 뛰어난 편이지만, 상대가 스스로 주는 볼넷은 그저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곳에는 어떠한 아웃의 위험도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런 기회가 흔한게 아닌데.'
주자 견제에 대한 경험과 기본기가 수준 미달인 투수와 소녀 어깨를 지닌 포수. 프로 생활 6년 간 이렇게까지 허술한 조합은 처음이다.
'홈런은 2점이지만 도루는 하나에 1점. 기록까지 갱신한다면 추가 1점.'
숙련된 주자인 해준의 눈에는 2루와 3루, 그리고 홈플레이트까지 당장이라도 손 안에 들어올듯 가깝게 느껴졌다. 즉, 이 베이스선상이 해준에게는 조금만 캐도 금이 쏟아지는 골든 라인(Golden Line)이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나올게 없을 때까지 쥐어짜내주겠어.'
해준은 망설임 없이 1루 베이스에서 거리를 두었다. 셔플 스텝 과정에서 내딛는 퍼스트 스텝. 그러면서도 언제든 귀루할 수 있도록 크로스오버 스텝으로 왼발을 오른발 뒤로 가로지르도록 위치한다.
그와 함께 시선은 투수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타이밍을 잡아갔다.
그리고 곧, 투수의 손에서 체인지업이 떠난 순간.
'지금!'
해준은 폭발적인 움직임과 함께 땅을 박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