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13화 (13/137)

13. 특명, 포인트를 모아라! (2)

"오늘도 강해준 나오겠지?"

"라인업 확인해봐. 언더독리그 어플에 올라와 있어."

"나오겠지. 어제 그렇게 활약을 했는데."

"상대 투수는 누구야?"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레나프 파크. 서울 레나프 2군 선수들이 사용하는 이 경기장은 평소와는 다르게 곳곳에 자리를 잡은 관객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스포츠 베어의 허상필 기자는 동료 기자들과 입구를 들어서다 그 모습을 보고는 감탄사를 터트렸다.

"허... 관심이 이 정도로 쏠렸는지는 몰랐는걸."

"아무래도 그 유명 BJ 영향이겠죠. 딱 그 방송 경기에서 강해준 그 친구가 활약하는 탓에..."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명한가 보지? 딸아이가 보여줬는데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던데. 쯔, 이럴 때마다 이미 너무 늙어버린 게 아닐까 한다니까."

허상필 기자는 혀를 차며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평소보다 붐비는 경기장의 모습들이 렌즈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시야에 기존 관객들과는 다른 익숙한 얼굴들이 잡혔다. 허상필 기자는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허! 벌써 스카우터들이?"

"누구요?"

동료 기자의 물음에 허상필은 천천히 얼굴들을 살피며 그 이름들을 읊었다. 다들 안면 정도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 사람이 레나프에 강윤석 스카우터. 그 옆이 시갈스 스카우터. 분명 남미 담당이었는데 한국 들어왔나보구만. 다만 대화를 나눠본 지 너무 오래돼서 이름이 기억 안 나고... 아무튼. 남은 사람들은... 게이머즈에 이재민에 이칼코메드의 최진식까지?"

허상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강해준 그 친구, 아무래도 떠도 단단히 뜬 모양이다. 동료 기자도 그 말에 맞장구를 치며 대답했다.

"강해준 그 친구. 생각보다 주목받는 선수였나 보네요? KBO 소속 팀의 반이 모이다니..."

"주목받는 선수이긴 하지. 좋은 의미로나 나쁜 의미로나. 그나저나 이번엔.. 좋은 의미인 것 같구만."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타자, 0할 타자 강해준. 그렇다고 타율이 낮은 만큼 장타력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선구안? 타자로서의 툴 중 그게 최악이었다. 그런 그가 그동안 풀타임에 가깝게 1군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수비. 그 하나였다.

"타자로서 역사상 최악이라면, 야수로서는 역사상 최강. 비교할 선수가 없지."

아무리 한국프로야구가 극단적인 타고투저 현상을 띄고 있다지만, 본래대로라면 강해준은 이렇게 2군에서 썩고 있을 선수가 아니다.

수비 하나만으로 밥값을 톡톡히 하는, 그러면서도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니크한 선수니까.

"심지어 이 친구, 국대도 승선했잖아? 수비 하나만 보고. 그때 메이저리그랑 일본 리그 스카우터들이 군침 질질 흘리던 거 기억나나?"

허상필 기자는 5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대한민국 대표팀은 끈끈한 타선, 압도적인 수비조직력을 앞세워 2022년 아시안 게임과 2024년 올림픽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해준이 있었다.

"하하, 기억나죠. 수비 보고 저 선수 누구냐고 난리를 치더라니까요. 제2의 아지 스미스라던가, 시몬스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다던가. 아무튼 타격하는 모습 보고는 입들을 싹 다물긴 했지만요."

"...그래, 타격. 그게 모든 문제지. 타자란 결국 수비보단 타격이니까."

허상필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준이 서울 세오레즈 1군에서 결국 밀려난 것도 타격 탓이었다. 한국 야구의 극타고투저 성향,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현재 평균 타율 0.329, 출루율 0.399, 장타율 0.587을 기록하고 있는 세오레즈의 타선진이었으니까.

다른 팀이었다면 멀티 백업으로라도 1군에서 살아남았겠지만, 한 게임에서 우습게 5점 이상을 뽑아내는 세오레즈에서 강해준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강해준이 타격 포텐을 터트리려고 한다...라. 놀랄만한 일이지. 놀랄만한 일이고말고."

정규 시즌이라면 몰라도, 포스트 시즌에만 들어가면 타선이 차갑게 식어버리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스포츠가 야구다. 여전히 0할 타자라면 모를까, 정말로 강해준이 스텝업을 하여 2할 초반이라도 치게 된다면...

"우승이라는 대권에 도전하는 구단들로서는 어떻게든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싶어 하는 자원이지."

허상필 기자는 독백하듯 중얼거리며 다시 카메라를 들어 보였다. 렌즈를 고양 세오레즈 측의 더그아웃으로 향한 채 줌을 당기자 경기 준비에 한창인 강해준의 모습이 담겼다.

185쯤 되는 적당한 키와 건장한 체격, 수비에서 발휘되는 괴물 같은 운동 능력까지. 여태껏 저 포텐셜이 잠잠했다는 사실이 더 불가사의였다.

찰칵-

그때, 그런 그의 시야에 전혀 새로운 얼굴이 들어왔다. 더그아웃을 내려다볼 수 있는 관중석. 그곳에 서 있는 낯선 남자가 강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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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1포인트를 보유 중입니다.]

해준은 허공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 바라보았다. 모자라다. 체인지업 특성권을 사기 위한 할당량인 30포인트에 반도 되지 않았다. 해준은 갈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혀끝으로 한차례 마른 입술을 훑었다.

'하루빨리 약점들을 보완해야 해'

물론 지금의 해준은 그 누구보다 뛰어난 패스트볼 킬러다. 아마 KBO 1군 전체를 뒤져보아도 해준과 비슷한 레벨로 패스트볼을 공략할 사람은 몇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투수와의 싸움을 한가지 무기만으로 이겨낼 수 없는 노릇.

투수와 타자의 관계는 가위바위보와 같다. 현재 해준은 주먹밖에 낼 수 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고, 상대가 그것을 눈치채는 순간 게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주먹을 상대로 가위를 낼 리가 없으니까. 그 상황에서는 안타를 칠 수 있는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낮아진다.

['BA(below-average)레벨 체인지업' - 타이밍 모듈(Timing Module)]

그런 의미에서 어젯밤 시스템이 제안한 체인지업 특성권은 놓쳐서는 안 될 물건임이 분명했다. 반푼이 타자인 해준을 보완해줄 유일하다시피 한 방법.

'문제는 어떻게 포인트를 모으냐인데....'

하필이면 72시간 제한이 걸려있다. 아니, 이틀 전 밤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러 지금은 38시간 정도. 그 안에 19포인트를 모아야 한다.

시간을 넘겨버리면 100포인트를 모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전에 뽀록 나버리겠지.'

해준이 사실 패스트볼만 잘 치는 타자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1군으로의 복귀는 매우 험난해질 것이 분명했다.

'수비로 모을 수야 있다지만..'

호수비란 운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일단 그럴만한 타구가 발생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으니까. 재수가 없는 날이면 특정 야수 앞으로 한 번도 공이 가지 않는 것이 야구다.

'내가 타자 타구를 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결국 빠른 시일 내에 1군으로 복귀할 방법은 이 세일 기회를 붙잡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플레이볼!"

그때 구심의 우렁찬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정한평 파이팅!"

"삼진 가즈아!"

그리고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응원 소리가 들려오며 경기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해준은 그 분위기에 맞춰 집중력을 가다듬었다.

'자.. 어떡한담.'

해준은 타격 자세를 잡았다. 마운드에는 레나프 2군의 우완 투수 정한평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드러나지 않은 그 모습을 본 순간, 해준은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타석에만 들어서면 눈칫밥으로 아득바득 버텨온 6년. 인제 와서는 특정 생각을 지닌 투수를 귀신같이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새끼가?'

넌 던지지 않아도 이미 잡았다는 분위기. 정한평의 자세나 표정은 해준에게 아주 익숙한 그런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 순간 해준은 자신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만 인지했음을 깨달았다. 정작 상대 투수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이 편해 보였으니까.

해준의 무언가를 경계해야 한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허접이었구나!"

타격감이 절정에 올라온 타자라면 평소 성적과 상관없이 투수들의 주의를 사는 법이다. 야구를 하다 보면 누구나 미치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에는 상성 관계를 뛰어넘어 리그 에이스들도 폭격해버리는 일들이 빈번했으니까. 하지만 타자로서 해준의 심각한 이미지는 전 경기에서의 활약을 덮어버릴 정도였다.

'...이거 더 쉬워질 수도 있겠는데."

1회 초, 고양의 공격 이닝.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해준은 앞으로 돌아올 타순에서의 계획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포수와 간단하게 사인을 나눈 정한평이 투구판을 박차며 공을 던졌다.

몸쪽을 찔러 들어오는 패스트볼. 다만 포심 패스트볼로 장타를 3개나 허용한 이정한의 소식을 들은 탓인지, 좀 깊었다.

그대로 둔다면 볼이 될 것이 분명한, 탐색의 의미가 담긴 초구.

'이걸 헛스윙한다면 예전의 나고..'

그대로 배트를 휘둘러 장타를 만들어낸다면 지금의 해준이다. 하지만 해준은 이번 타석에서 그 둘 중 어떠한 것도 보여줄 생각이 없었다. 대신 다른 선택지를 취하기 위해 몸을 숙였다.

---퉁!

어느새 해준의 코앞까지 날아온 공이 배트 스팟과 정확히 부딪힌다. 기습 면에서 완벽한 발군의 번트 실력. 최대한 반발력을 죽인 타구는 3루 선상을 따라 또르르 굴러갔다.

"3루수!"

그 모습에 정한평이 다급히 소리를 질렀지만, 당황한 3루수가 공을 집었을 때 이미 해준은 1루 베이스를 통과하고 있었다.

"세이프!"

1루심의 콜이 울려 퍼졌다.

"이런.. 시..."

생각지도 못한 출루를 허용한 정한평은 구겨진 입가를 글러브로 가리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더그아웃 한편을 슬쩍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투수코치의 안색이 좋질 않다. 차라리 안타라면 모를까 이건 순전히 방심으로 인한 출루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후욱. 후욱."

반면 해준은 베이스를 밟은 채 짧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가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1루타]

[타구질 분류 soft 판명]

[속도 41.68km/h]

[발사 각도 -11.2˚]

[캐치 확률 33%]

[0.5 포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정한평은 방심으로 내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내야수들의 위치를 고려하면 오히려 처리하기 힘들었던 절묘한 번트 타구.

하지만 해준에게는 정한평이 방심으로 인한 실책이라 생각해주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래. 그렇게 계속 다른 요인으로 생각을 돌리라고.'

3루수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글러브를 위아래로 흔드는 정한평. 더그아웃의 따가운 시선에 누가 봐도 남 탓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3루수의 표정은 썩어가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실책이든, 운빨이든. 그것들은 해준의 날카로운 발톱을 가려줄 것이 분명했다.

'조금씩 조금씩 먹어치워 주마.'

해준의 플랜은 간단했다.

바로 상대의 역치값을 서서히 높이는 것. 처음부터 패스트볼을 두드려 홈런이 터져버린다면, 이정한의 선례도 있는 만큼 돌아올 두 번째 타석부터는 패스트볼을 던져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자, 그럼 가볼까.'

물론 해준은 계획대로 1루에 출루했다 해서, 이 베이스 하나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장타를 치지 않았다 해서 1루에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제때 포인트를 모으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슬쩍슬쩍 1루와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해준.

투수와 1루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해준의 도루 실력은 처참한 타격 실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출루를 못 하니 보여줄 기회가 없었지.'

아직은 이른 1회 초.

"투수!"

갑작스럽게 내달리기 시작하는 해준의 모습에 깜짝 놀란 1루수의 당황 어린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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