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12화 (12/137)

12. 특명, 포인트를 모아라! (1)

[현재 11포인트를 보유 중입니다.]

"..."

경기가 끝난 늦은 저녁. 해준은 침대에 누워 멍하니 반투명한 메시지창을 바라보았다.

'이걸 써 말아?'

5타석 4타수 4안타. 2개의 홈런과 2개의 2루타, 그리고 1볼넷. 거기에 호수비 2개를 곁들여 벌어들인 포인트.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찝찝했다.

'이걸 써버리면 꼭 필요할 때 포인트가 없을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자고로 돈이란 평소에 모아두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 없는 법이다. 여유가 없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해준은 굳이 링크 활성화율을 높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게임을 할 때도 그랬다. 해준은 3대 RPG 병 중 하나인 궁상병 환자로 최종 보스를 깨는 순간까지 엘릭서라든가 전설의 영약 같은 아이템들을 끝까지 꿍쳐놓고 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심지어 금화는 인벤토리 한계 수치까지 차올라 결국에는 땅에 버리고 다녀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그를 꼬드기기라도 하듯, 갑작스레 기존 메시지창이 스르르 사라지더니 다른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현재 링크 활성화율: 84%]

[145.15km/h의 구속까지 시스템 보정이 이루어집니다.]

[다음 활성화율 증가를 위한 요구량은 8P입니다.]

하지만 해준은 여전히 완고했다.

'그러니까 고민되는 거지. 일단 145까지 칠 수 있다는 소리잖아.'

작년 1군 소속 투수들의 평균 구속은 144.2km/h. 현재 자신이 2군 소속임을 고려하면 넘치진 않더라도 투수들을 상대하기 충분한 구속이었다.

'애초에 그 이상 던지는 놈들은 1군에 올라가 있다고. 2군에 있다고 해도 제구도 잡히지 않은 놈들이 태반인데 무슨..'

해준은 고민에 빠져 몸을 뒤척였다.

'확실히 보정이 없으면 난감하긴 하지만...'

이정한과의 2번째 타석에서의 승부. 145.5km/h를 기록한 공이 들어왔을 때 해준은 패스트볼에 대한 감각이 살짝 흐릿해짐을 느꼈다.

결과가 파울이라 다행이었지, 그 공의 구속이 147km/h정도 됐다면 이야기는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 자신을 설득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돌린 해준의 눈앞에 또다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음 활성화율 증가를 위한 요구량은 8P입니다.]

"....?"

그제야 해준은 이상함을 느꼈다. 오늘따라 이놈의 시스템이 유독 말이 많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라도 알아서 알아내라고 쌩까더니만 뭐냐 지금?'

그 순간 스리슬쩍 변하는 메시지.

[다음 활성화율 증가를 위한 요구량은 7.9P입니다.]

"...."

욕을 먹든 말든, 세일을 때려서라도 어떻게든 유저로부터 현금을 갈취하겠다는 익숙한 모습. 국내 게임 업계의 관행 같은 그 행태에 해준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어째서 시스템이 처음부터 무뚝뚝을 넘어 음소거 모드였는지 깨달은 탓이다.

'너 내가 거지라서 무시하다가, 돈 좀 생겼다고 달라붙냐?'

시스템은 말이 없었다. 정작 대답을 해야 하는 순간에 침묵해버리는 모습까지.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해준은 기가 막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메시지창이 떠 있는 허공을 휙휙 휘저었다.

'야, 인마.'

하지만 손가락은 메시지창을 통과할 뿐 새로운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무슨... 세상이 말세인가.'

해준은 황당함에 입을 살짝 벌렸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소설에나 나올법한 시스템까지 돈을 밝히다니. 정확히는 포인트긴 하지만.

'...음, 잠깐만.'

그때 한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일단 내 포인트가 탐나긴 한다 이거지?'

성공적인 장사를 위해서는 소비자의 니즈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스템이란 놈은 전형적인 초보 장사꾼이었다.

당장 필요성도 못 느끼는 제품만 우격다짐으로 들이대질 않나, 손님 기분에 맞춰준다고 제시한 세일은 할인율이 1% 남짓이다. 보통 가게였다면 손님을 우롱하는 곳이라며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가고 결국 폐업의 길로 들어설 행동이었다.

사고를 전환한 해준은 무언가를 깨닫자 자신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이봐요, 우리 시 사장님. 제가 장사 좀 알려드릴까?'

곧바로 바뀌는 말투. 지금의 해준에게는 링크의 활성화율보다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잘만 하시면 제 포인트 바닥까지 긁어가셔서 부자 되십니다?'

[....]

흥미가 생기는지 다시 떠오른 메시지. 돈 한 푼 없을 때는 아무리 물어도 대답 한번 없더니, 돈 좀 벌게 해준다니 바로 반응한다. 해준은 살짝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른바 비즈니스 스마일.

'야구는 비즈니스. 그래, 나는 6년 차 프로 비즈니스맨이다.'

자신을 세뇌한 해준은 곧바로 엿장수가 순진한 동네 꼬마에게 약을 치듯 살살 구슬리는 말투로 말을 걸었다.

'언제까지 단일 품목만 고집할 겁니까. 무슨 애플이야? 아니, 애플도 결국 패드라던가 노트북이라던가 내놨어요. 스마트폰 크기도 다양하고. 그렇게 해서 결국 매출 떡상. 이거 아시죠?'

한마디로 벤치 마킹 하라는 소리다.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상품의 다양화. 이게 장사의 핵심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뭐... 브레이킹 볼이라던가, 오프 스피드 볼 구별권이라던가. 이런 거 있잖아요? 일단 주르르 진열해 놓으면 참 좋을텐데. 내가 어련히 알아서 싹 쓸어갈까.'

마치 집 안에 있는 아주 귀한 물건을 가져오면 붕어 모양의 대형 엿과 교환해주겠다는 꼬드김.

[....]

시스템은 꼬마 아이가 잠시 고민을 하듯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 모습에 해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너무 날로 먹으려고 들었나?'

포심 패스트볼만 잘 쳐도 세상 부럽지 않은데, 다른 변화구까지 잘 치게 해달라니. 야구의 신이 있다면 호통을 치며 뒤통수를 후려갈 길만 한 탐욕이었다.

'...어, 시 사장님? 내 말 오해하지 마시고. 그러니까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뭐 다른 것들도 나쁘진...'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다시 말을 걸려던 해준. 하지만 그 순간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홍수가 일어나기라도 한 듯, 수많은 메시지가 눈앞에 범람하고 있었으니까.

[요구를 검토합니다.]

[검토 중...]

[......]

[총 9개의 검색결과가 있습니다.]

['슬?이ᅟᅡᇁ??', ERROR, 로딩 불가]

['ㅋ!ㅅ패??', ERROR, 로딩 불가]

['핑E?^#?3', ERROR, 로딩 불가]

[.........ERROR........]

[...........]

['BA(below-average)레벨 체인지업' - 타이밍 모듈(Timing Module)]

순진한 꼬마 아이는 집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끝에 발견한 귀한 물건을 내밀었다.

[해당 특성권은 100p입니다.]

'....!'

생각 외의 대박에 순간 얼어버린 엿장수 해준. 하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진정해야 한다. 비싸긴 해도, 이걸 놓칠 순 없었다.

태연을 가장한 해준은 툴툴거리며 끝까지 약을 팔았다.

'아, 거... 그런데. 이게 불만이라는 소리는 아니고. 다른 가게는 확장하면 이벤트도 해주고 그런다던데 여기는 그런 것도 없어요? 아.. 그냥 사지 말까.'

그와 함께 꿀걱- 목울대를 크게 한차례 울렁이며 눈알을 굴리는 해준. 그리고, 다행히도 그 요행이 먹혔다.

[아웃라이어 스토어, 확장 기념 이벤트를 시작합니다.]

[해당 특성권은 현재 70% 할인가로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

해준은 예상외의 대박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너무 깎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중요한 사실을 잊었다.

'....저 그런데...'

[...]

'제가 돈이 없어서... 조금 기다려주실래요?'

진상은 끝까지 진상이었다.

[....]

그렇게 잠시의 침묵이 이어지고.

[71:59:59]

시스템은 뜬금없이 타이머를 띄웠다.

'...?'

째깍거림과 함께 1초씩 줄어드는 시간. 해준은 재빨리 그 뜻을 알아차렸다.

특가 이벤트 종료까지 72시간.

그전까지 30포인트를 만들어야 한다.

+++

본래 2군 경기는 비주류들의 경기다. 메인스트림에서 탈락한 자들이 다시 그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고 증명하는 곳.

그만큼 경기에 대한 주목도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사이클링 히트, 혹은 노히트노런을 달성할 경우나 메인 포털 사이트에 기사가 걸리곤 했다.

하지만 2026년, 언더독 리그로 간판을 바꿔 달며 시행한 활성화 정책 중 하나인 유명 BJ의 현장 중계가 시작되며 그 분위기는 살짝 달라졌다.

적어도 수백, 수천의 시청자들이 BJ를 따라 경기를 보기 시작한 것. 일주일에 한 번 중계를 하는 탓에, 1군 경기에 비하면 관심도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그 전에 비하면 격세지감일 정도였다.

그리고 7월 3일, 고양 세오레즈와 인천 플레인즈의 2연전 첫 경기. 많은 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2군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강해준, 2홈런 작렬!]

[1918일 만의 4안타, 그 의미는?]

[5출루, 통산 타율 0할대 타자의 이유 있는 반란.]

퍼펙트도, 노히트도, 그렇다고 사이클링 히트도 아니었지만 포털 사이트 메인에 기사가 걸릴 정도로 이례적인 결과.

강해준의 전 타석 출루, 그것도 4개의 장타를 쓸어 담은 결과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네티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강해준이 예수님이냐? 부활하게. 아니 애초에 죽은 적도 없어, 원래 못했어. 이건 그냥 뽀록이지.

-2군 경기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1군 1할따리 놈들이 본즈 놀이 하는 곳이 2군인데.

-의미 있긴 함. 강해준 2군에서도 통산 타율 1할대임.

-윗 댓 개솔 ㄴㄴ. 의미는 개뿔. 그냥 대우주의 기운이 한번에 몰렸을 뿐이다.

-이유 있는 반란? 여태까지 이유 없어서 타석에서 그 지랄을 떨었음?

-뽀록임. 아무튼 뽀록임.

-저 중에 홈런 1개랑 2루타 2개를 한 놈이 몰아서 쳐맞았다는 게 레알 트루? 방출각 날카롭게 섰다. 0할대 타자한테 장타 3개 허용이 말이 되냐 ㅋㅋㅋㅋㅋㅋ

반면 현장에서 그 장면을 목격한 소수의 네티즌들은 반론을 펼쳤다.

-현장 직관한 1인입니다. 타격폼 완전히 뜯어고쳤어요. 개인적으로 오늘 경기도 기대되네요.

-타구 소리 들어보기나 하고 이러시나. 그냥 공 쪼개버릴 것 같던데. 확실히 달라졌음. 백한타 시절의 강해준이 아님.

하지만 결국 소수의 의견일 뿐. 수백, 수천 개씩 쏟아지는 화력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7월 4일, 본래 예정이었던 인천 플레인즈와의 나머지 경기에서 다시 한번 활약을 이어갔다면 모를까, 경기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취소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대구 더히트의 간판타자 이신우가 역대급 기록을 경신하며 해준에 대한 관심은 급속도로 꺼지기 시작했다.

[사자왕의 포효, 5연타석 홈런포!]

[역사를 새로 쓴 5연타석 홈런포, 미일의 경우는?]

[노장은 죽지 않는다. 이신우의 하루하루가 곧 역사인 한국야구.]

다만 커뮤니티에서 이따금 조롱하는 글만이 올라올 뿐이었다.

[제목: 아무래도 약인 것 같지?]

이정한 그 인간이 약쟁이 인 거 같다.

제정신이면 강해준한테 그렇게 처맞았겠냐?

[댓글]

ㅇㅇ:지나가다가 무릎 '탁' 치고 동의합니다.

고양과의 3연전, 그 첫 게임의 선발로 예고된 레나프 2군 투수 정한평.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멍청하기는... 전부 포심 승부? 아무리 강해준이라지만 너무 멍청하게 들어간 거 아니에요? 진짜 약 빤 것도 아니고. 해외파 출신이라더니 어디서 몰래 숨겨 들어왔나?"

"...그 강해준이라 멍청하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

하지만 맞은편에서 몸을 풀던 선배 투수의 부정에 정한평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긴 한데. 강해준도 컨디션이 유독 좋은 날이 있을 거 아니에요? 첫 타석에서 홈런 맞았으면 두 번째부턴 신중하게 상대했어야지. 이정한 그 녀석도 참 멍청하다니까요. 융통성이 없는건지... 아니, 포수가 문제... 앗."

정한평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눈앞의 선배 투수가 플레인즈의 2군 포수였던 우요한과 동기인 것을 건너건너 들은 탓이다. 다행히 선배 투수는 뒷말을 듣지 못했는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질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대충 넘겨듣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정한평은 괜스레 놀랐던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아무튼, 아무리 강해준이라도 패스트볼만 던지면 위험할 수 있다는거죠. 투수가 패스트볼만 던질 거라면 피칭머신하고 뭐가 다르겠어요, 안 그래요? 강해준, 그 사람 별명이 피칭머신 학살자라던데. 피칭머신 상대로는 150도 뻥뻥 쳐낸다고."

"아, 그래그래."

선배 투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트레칭을 위해 상체를 쭉 숙여 고개를 하체에 파묻었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

그 모습에 정한평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롭게 장만한 글러브에 오일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라면 포심에 오프 스피드 피칭을 간간이 섞겠어. 그 강해준이라면 붕붕 대다 끝날 껄?'

7월 5일. 먹구름이 개며 하늘에서 쨍쨍한 햇볕이 내려와 대지를 달구기 시작했다.

고양 대 레나프 2군 첫 경기. 그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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