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11화 (11/137)

11. 패스트볼 사냥꾼! (3)

그 뒤로도 3개의 공을 더 파울로 걷어냈고, 1개의 볼을 지켜봤다.

상황은 어느새 풀카운트. 이정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투구 자세에 들어간다. 좋은 투구 리듬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조급함이 드러났다.

까닥-

이젠 확연해진 와인드업 중 왼발의 움직임. 그를 기점으로 스트라이드가 이루어지며, 이정한이 공을 던졌다.

따악-!

하지만 다시 한번 파울.

"후.. 후읍.."

해준은 숨을 몰아쉬며 배터박스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하다.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팁핑 피치가 드러나는 타입이야.'

팁핑피치(Tipping Pitches). 다른 말로는 투구 버릇. 원로 야구인들은 쿠세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쓴다.

이는 글러브의 위치, 다리의 높이, 시선 처리 등 투수의 사소한 버릇들을 나타내는 용어인데, 경기 중 상대에게 이를 캐치 당해버리면 뜬금없이 연속 안타를 얻어맞거나, 붕붕 대던 타자들이 신들린 듯이 볼을 골라내 출루하는 경우가 빈번한 빈도로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방송과 온갖 기록 장비에 둘러싸인 1군, 혹은 메이저 레벨에 가까운 리그일수록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정한의 경우는 바로 왼발의 한번 내렸다 올리는 움직임.

플레인즈의 코치들이 왜 저런 투수를 2군에 박아두고 있는지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1군에 올라오는 순간, 저런 투수는 몇 경기도 버티지 못하고 갈려 나간다.

'특히 전력투구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 유독 두드러졌어.'

[145.5km/h]

뒤늦게 전광판에 구속이 표기됐다. 기록실에서 스피드건으로 공의 속도를 잰 후 직접 입력하는 만큼 살짝 딜레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기다리다 숫자를 확인한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처음과 비교하면 구속이 5킬로나 상승했다.'

더군다나 저 버릇은 구종만 노출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포심만 던져대는 상황이니 구종은 이번 게임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타이밍.

미묘하게 타자의 타이밍을 잡아먹어 들어가던 투구폼에 왼발의 움직임이라는 뚜렷한 기준점이 세워지며 해준은 한결 상대하기 수월해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억지로 타이밍을 맞추긴 했지만, 그래도 기준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 사람도 그걸 알텐데..'

해준은 슬쩍 포수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이 사실을 우요한이라고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포수란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주도면밀하게 투수를 관찰하는 존재.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안 드러내고 던졌으면 몰라도, 한 번 드러난 이상 경기 중에 건드리는 건 자살 행위.'

투수란 동물은 매우 예민한 생물이고, 버릇이 다시 드러났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밸런스를 잃고 구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빈번하다.

그렇기에 우요한은 굳이 버릇을 지적하기보다, 이정한의 볼 끝과 제구를 믿고 승부하기로 결정한 듯 보였다.

하지만, 판단 착오다.

'타이밍도, 궤적도 읽히기 시작하는 포심 패스트볼.'

몇 번이고 커트해낸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이제 장타를 쳐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10구. 해준이 타석에 들어섰다.

"으랴앗!"

기세가 최고조에 도달한 이정한은 자신의 기어를 최대한 올리며 투구판을 박찼다.

+++

피츠버그 파이러리츠의 스카우터 존 배쉬.

단장 보조 앤더슨의 강력한 요청 덕에 한 선수를 관찰하러 대한해협을 넘어온 이 남자는 며칠 만에 붕 떠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자신이 보러온 선수, 해준이 한 경기 만에 2군행을 통보받은 것.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신도 무심하시지.."

생각대로 보잘것없는 선수였다면 미련 없이 돌아갔을 것이다. 아무리 실세 앤더슨의 요청이라고 해도 현재 일본에서는 유망주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니까. 가망성이 없어 보이는 한국에서 더 머물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날, 존 배쉬는 보고야 말았다.

"살면서도 그런 장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동양의 작은 나라, 이름을 들어본 메이저리거라곤 추와 류, 그리고 한때 파이어리츠에서 뛰었던 강뿐인 이곳.

그런 곳에 상상도 못 할 괴물이 숨어있었다.

"수비만 본다면 수십 캐럿의 다이아몬드라고 쳐야하나...? 아니, 아프리카의 별 정도는 돼야 맞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에 어떻게 저런 선수를 아무도 모르고 있을 수 있는지. 안타까움을 느낀 존 배쉬가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다.

어떻게든 그를 데려가서 별들의 리그, 메이저리그에 내보이고 싶었다. 그 사이에서 얼마나 더 빛이 날 수 있는지 그는 궁금해 미쳐버릴 것 같았고, 천성이 그랬기에 이 나이에도 이역만리 타국까지 와서 스카우터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야구 트렌드는 프로 야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악의 타고투저. 그렇기에 수비의 가치를 등한시할지 몰라도 투고타저의 흐름을 타고 있는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강은 분명 이름을 날리게 될 거야."

거기에 더해 파이어리츠의 투수진은 모두 땅볼 유도에 능한 투수들이다. 해진을 내야수로 써먹는다면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다.

"흐음, 그나저나 생각보다 늦었군."

시간은 오후 2시 33분. 예상치 못한 교통체증으로 경기장에 다소 늦게 도착한 존 배쉬가 택시에서 내렸다.

도착지는 고양 경기장. 서울 세오레즈의 2군 경기가 있는 곳이었다.

"타격, 그 놈의 타격이 문제인가.. 어떻게 단장을 설득해야 할지 생각을..."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생각을 정리하며 중얼거리는 존 배쉬. 경기장 입구에서 입장료 징수를 위해 서 있던 직원의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2군 경기에 찾아오는 외국인은 드문 탓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한 존 배쉬는 중얼거림을 멈추고 손가락 5개 펼쳐 보였다. 그 모습에 직원이 살짝 어벙한 어투로 반응했다.

"...네?"

"five thousands in korean, right?"

"...어.."

"입.장.료."

그제야 직원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오천 원."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 건네준 존 배쉬. 안도의 한숨을 내쉰 직원이 티켓을 건네주자, 그것을 받아들고 경기장에 들어섰다. 입구에서부터 몇 분은 걸어가야 나오는 1군 경기장과 다르게, 이곳은 마이너리그 경기장처럼 곧바로 야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존 배쉬는 이 풍경에 오히려 익숙함을 느끼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미리 깔아놓은 언더독 리그의 애플리케이션. 그곳에서 오늘의 라인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 아니. 강은 흔한 성이라고 했으니 겹칠 수도 있겠어. 어디보자 해준이.. 흠, 여기 있군. 그런데 1번 타자?'

그의 타격을 고려한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타격 성적. 애플리케이션에 떠올라 있는 해준의 성적을 확인한 존 배쉬의 눈이 살짝 커졌다.

'3타수 3안타 1홈런 2 2루타.. 혹시 2군에서는 타격이 살아나는 타입인가? 아니야. 분명 어제 확인한 자료에서는 2군 통산 타율은 1할대에 머물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단순히 잘 맞은 날이라고 하기엔..'

의문을 뒤로하고 존 배쉬는 타석에서 가장 가까운 관중석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거대한 양산이 여기저기 펼쳐있어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은 삼삼오오 그늘 아래에 몰려 게임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때, 전광판에 해준의 이름이 떠올랐다.

"---오오."

"또 강해준이다."

"여보, 빨리 찍어. 이거 오늘 무슨 날이다. 백한타 4안타 경기 도전!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무뚝뚝한 양반이 오늘따라 웬 호들갑? 무슨 역사까지 들먹이면서.. 옛다, 그럼 당신이 찍던가."

"에잇, 줘봐. 내가 찍어야지."

순간 들썩이기 시작하는 관중들. 그 모습에 존 배쉬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과연 마이너한 게임까지 직접 챙겨보는 사람들답군. 열정적이야.'

실상은 해준의 보기 드문 연속 안타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지만, 대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는 존 배쉬는 그러려니 하며 관심을 전광판으로 넘겼다.

'다행히 전광판이 작아도 있을 것은 다 있어. 간단하게 스코어와 카운트 같은 것들만 표시되는 곳이 태반인데. 그런데 타석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선수가 아닌가? 직원이 실수를 했나 보군.'

고개를 갸웃거리는 존 배쉬. 타석에는 전에 보았던 해준과는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타자가 서 있었다.

'흐음.. 저건 완전히 메이저리그식 준비 자세인데. 확실히 한국도 일본의 영향에서 많이 벗어났어. 게다가 골격도 튼실하군. 마치 강을 보는 것 같아.'

타격이 안 좋을 뿐이지, 피지컬이라면 해준도 그렇게 밀리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타자에 대한 평가에 들어간 존 배쉬.

그때 바로 옆에 서서 경기를 관람하던 학생들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와아아- 강해준 파이팅!"

"해준이 형, 4안타 가즈아~!"

'해준?'

거기서 해준의 이름을 알아들은 존 배쉬는 다시 한번 타석의 선수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저 자세가 강일리가 없..'

하지만 직업병처럼 반사적으로 훑었던 키, 골격, 자세 등에서 시선을 돌리자, 비로소 등 뒤에 마킹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KANG

그것을 확인한 존 배쉬는 딱딱하게 얼어버렸다. 순간 성이 같은 선수일까 했지만, 유니폼에는 그의 넘버인 24가 떡하니 박혀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진 존 배쉬는 고개를 한차례 크게 흔들었다.

'...저게 강이라고?'

그가 강해준의 타격 자세를 본 것은 한 경기뿐만이 아니다. 그 경기 뒤로 영상 자료를 구해 몇십번이고 돌려보았다. 어떻게든 저 타격을 고쳐서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면, 당장 미국으로 날아가 단장을 만나 소리칠 생각이었다.

'얼마가 돼도 좋소! 100만? 200만? 이 선수에게 내 스카우트 30년 인생을 걸겠소!'

거부한다면? 멱살을 잡을 준비까지 되어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생각했지.'

강의 타격은 자세의 문제가 아니었다. 피지컬에 어울리지 않은 소극적인 구시대적 타격 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눈과 손의 협응 능력이 절망적인 수준이었어.'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공을 안 보고 휘두르는 수준. 그렇다면 수비는 어떻게 그렇게 뛰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존 배쉬는 오랜 스카우트 경험으로 그 사실을 그저 받아들였다.

세상에는 설명하기 힘든 별의별 선수가 다 있고, 해준은 그저 수비가 믿을 수 없도록 뛰어나고 타격이 처참한 선수라는 것을.

'오늘도 그저 수비 모습을 보러 온 것이었는데...'

존 배쉬는 왠지 모를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끔찍한 무더위 속에서도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조금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마운드의 투수가 초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

변화구처럼 보이는 그 볼을 해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냈다. 아니, 치려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르군. 달라...'

존 배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전해지는 느낌이 변해있었다. 그리고 베테랑 스카우트답게, 존 배쉬는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아챘다.

해준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전에는 공 하나하나에도 급급하게 반응하는 모습이었는데..'

아무렇게나 찍은 번호가 슈퍼볼에 당첨되길 바라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자세와 스윙. 보다 못한 존 배쉬가 눈을 질끔 감아버릴 정도였다.

'이제는 침착하다.'

타격을 포기하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존 배쉬는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 그것과 닮아있었으니까.

"다이아몬드. 아프리카의 거대한 별 정도(Great Star of Africa) 되는 크기의 다이아몬드.."

그렇기에 존 배쉬는 경기장에 들어서기 직전 떠올렸던 해준에 대한 평가를 떠올렸다. 그러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말을 열심히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커다란 단점이 있었지.'

아프리카의 거대한 별이란 보석은 단지 크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란 크기에 국한되지 않으며, 캐럿, 투명도, 컬러, 컷팅 이 4가지 요소가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야지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런 면에서 해준은 캐럿, 투명도, 컬러에서는 만족스러웠지만 컷팅 단계에서 실패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선수였다.

"볼"

"볼"

"스트라이크!"

존 배쉬가 바라보는 와중에도 투수와 해준의 대결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카운트는 이제 2-2.

"악!"

기합 소리를 내지른 투수가 있는 힘껏 공을 뿌렸다.

그리고 마침내 언제까지만 보고 있을 것 같던 해준의 배트가 움직였다.

'맙소사..'

그 광경이 존 배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간결하지만, 거칠게 몸을 밀어내는 오른발. 앞다리의 무릎과 앞 팔꿈치가 펴지며 투 텐스(two tense)가 발생하고, 공을 타격하는 순간 몸을 밀어냈던 뒷다리가 허공으로 살짝 떠오른다.

허벅지에서 시작해 힙을 관통하여 허리까지 이어지는 완벽한 힘의 생성이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따아아아아아악-!

그와 함께 버스터(buster). 배트가 휘둘러지며,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구장은 순식간에 반으로 갈라놓았다.

존 배쉬는 넋을 놓은 채 작게 중얼거렸다.

"Oh my goodness..."

일그러진 보석은, 어느 새부터인가 그 자리에서 완벽한 형태와 함께 찬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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