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10화 (10/137)

10. 패스트볼 사냥꾼! (2)

해준의 벼락같은 홈런 이후.

"...이거 실화냐?"

게임은 치열한 투수전 양상으로 진행됐다.

제구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특유의 강속구와 날카로운 슬라이더로 인천 플레인즈 타선을 틀어막고 있는 카일.

보더라인을 넘나드는 포심 패스트볼 제구로 고양 세오레즈를 압도하는 이정한.

꿀걱- 하며 장필준의 목울대가 크게 한차례 울렁였다.

"형님들, 이거 실홥니까? 야구도 생각보다 박진감 넘치고 생각보다 재밌네요."

-야구 중계 BJ가 이제 와서 야구 재밌다 발언 ㅋㅋㅋㅋㅋ

-축빠가 야빠가 되는 순간... 감격스럽다.

-그럼 여태까지 노잼이었단 소리?

-돈 받았으니까 재밌는 척 한 거겠지. 솔직히 여태까지 노잼이긴 했음.

-ㅇㅇ 보통 다른 2군 경기 보면 눈 썩음. 1군 경기도 썩는데 2군이라고 다를 리가?

-오늘은 좀 달라 보이긴 하네.

장필준이 야구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게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투수전. 위태위태한 외줄 타기를 보는 듯, 공 하나하나가 미트 속을 파고들 때마다 장필준은 가슴 속이 시원해지는 착각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필준아, 기록지 좀 보여줘. 무슨 공 던지는지 좀 확실히 알자.

-ㅇㅇ 재밌긴 한데 너무 답답하다. 투수가 뭔 공 던지는 지 좀 알자.

"아.. 기록지요?"

그렇지 않아도 양해를 구하고 2층 기록실에서 그라운드의 전경을 담아내던 장필준이 눈치를 보았다.

오늘 경기에 나설 일이 없어 기록원으로 일하고 있던 플레인즈 2군의 고참, 투수 정일수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는 먼저 말했다.

"카메라로 찍으셔도 괜찮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형님!"

-쟤 정일수 아니냐? 플레인즈 베테랑. 32살일 텐데.

-장필준(35). 3살 동생에게 형님 발언 파문... 족보 사라진 한국 사회, 어떻게 될 것인가?

허락을 맡은 장필준은 재빨리 카메라를 조작하여 기록지를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채팅창이 한차례 들썩였다.

-?????? 이정한 전부 포심?

-저 세상 투구 패턴. 고양 타자들은 파리채 들고 휘두르냐? 뭔 포심만 박아대는 신인 공도 못 치고 빌빌거려.

-제구력이 KBO 수준이 아닌 듯. 여윽시 NPB 출신이다 이 말이야.

-제구력 좋다 치고 다른 타자들은 못 치는데 강해준은 저 공 어떻게 친 거? 대충 보니까 보더라인 위로 때려 박아버리는 것 같은데.

-아예 타격 자세부터 싹 다 바뀌었던데. ...설마?

-설마?

-에이, 설마.

시청자들의 소심한 기대를 아는지 모르는지, 막 3회 말에 들어선 경기 분위기는 한껏 달아오를 조짐을 보였다.

스으윽-

이정한은 마운드에 올랐다. 고개를 숙이고 스파이크로 땅을 고른다. 햇볕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고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컨디션이 올라와 있었다.

도저히 공이 맞아 나가지 않을 것 같다.

"....후우."

숨을 한 번 몰아쉬자 뜨겁게 달아오른 마운드의 공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아웃!"

"어어- 마이볼, 마이볼!"

이정한은 거침없이 포수의 미트로 공을 찔러넣었고, 8번 나종덕을 삼진으로. 9번 박대현을 2루수 플라이로 처리했다.

이어 3회 말, 2아웃.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1번 타자 해준의 타석이 돌아왔다.

'기다렸다.'

로진백을 잔뜩 묻힌 손끝이 꾸우욱- 공의 실밥을 억눌렀다.

'이번에는...'

+++

타석에 들어서기 전. 게스히팅 성향의 타자들은 자신이 노릴 구종과 버려야 할 코스를 정해놓는다.

그 내용은 당연하게도 상대에 따라 달라지며, 오늘은 상대 투수가 어떤 구종이 잘 긁히는지부터 시작해 포수가 선호하는 리드 패턴까지 고려한다.

그런 면에서 해준에게 오늘의 플레인즈 선발 투수만큼 편한 상대는 없었다.

'오로지 포심 일변도.'

이미 무엇이 날아올 줄 알고 있으니 보고 치기만 하면 된다.

여태껏 다른 타자들의 줄지어 아웃당한 것은 어디까지나 절묘한 로케이션 형성 능력과 지저분한 볼 끝 탓이지, 볼 배합을 파악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타순도 한 바퀴 돌았어. 생각이 있다면..'

제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타자의 눈에 익숙해진다면 공략당하기 일쑤.

'슬슬 패턴을 바꾸겠지.'

해준은 배터박스에 들어서며 포수를 바라보았다. 우요한. 플레인즈의 1군 백업 포수이지만 타격 부진과 부상이 겹쳐 2군으로 내려온 상태. 내심 투구 패턴이 바뀔 것이라 예상했던 해준은 그를 보자 다른 의심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날 상대로도 그럴까?'

한 사람에 대한 편견은 생각 외로 완고하다. 이 사람은 특히나 그런 편이었다.

'검증된 데이터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람이지.'

자신 전 타석처럼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나 변수는 있는 법. 그동안 겪어온 바에 의하면 이 우요한이라는 사람은 기존의 투구 패턴을 고수할 것이 분명했다. 해준이 이토록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동안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당했다.'

지난 6년간, 수십 번은 마주쳤다. 다른 포수들은 그나마 변화구를 섞는다던가 하이패스트볼을 보여준다던가. 변화를 섞어 해준을 상대했지만 이 사람은 투수에게 철저하게 한가운데와 몸쪽을 포심 패스트볼로만 쑤셔 박도록 만들었고, 결과도 쏠쏠하게 뽑아왔다.

'더군다나 저 투수도 보통은 아닌 것 같고.'

타자를 상대로 한 구종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심줄이 굵지 않고서야 못 할 짓이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는 성공적일지라도, 투구 수가 쌓일수록 투수의 마음속에서는 조금씩 불안이 싹트기 시작하니까.

이쯤에서 변화구를 하나쯤 섞어야 하지 않을지, 스트라이크존에 너무 공격적으로 집어넣는 것은 아닐지.

노림수가 맞아떨어진다면 마이너리거도 메이저리그 에이스의 공을 때려낼 수 있는 것이 야구니까.

당연히 던지는 본인만큼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다.'

해준은 포수에서 고개를 돌려 마운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더그아웃에서 봤을 때는 긴가민가했던 느낌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해준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의미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이었다.

'나구나. 환장하겠네. 그래, 꼴에 자존심 상했다 이거지.'

투수란 놈들이 자존심과 자존감 덩어리인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럴 때마다 황당함을 머금게 된다. 공을 던지면서 홈런 하나 맞을 생각도 안 했다고? 명예의 전당에 오른 선수들도 그런 멍청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정한이라는 투수도 수없이 홈런을 맞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간단했다.

'제길, 그렇다면 남은 건 한가지인데.'

해준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독 '나'한테 맞아서 기분 나쁜 거란 소리?'

통산 타율 0.063. 이런 타자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다는 것이 투수로서 자존심을 상하게 만든 것이다.

동시에 해준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물론 처음 당하는 일은 아니다. 해준은 지나가던 초등학생 팬도 무시하는 타자였고, 투수들은 그런 해준에게 홈런을 허용하면 매우 기분을 나빠하거나, 어이없다는 웃음을 터트리곤 했으니까.

'그때는 대부분 선배라 참았는데. 그래도 후배한테 당하니까 기분이.. 후, 그래 무지 더럽다. 아주 더러워.'

컨디션도 바짝 올라왔겠다, 타자들도 생각대로 들어가는 공에 정신을 못차리고 붕붕 휘둘러댄다. 덕분에 투구 수도 절약했고, 리듬을 타기 시작한 투구는 더더욱 위력적으로 변모한다.

현재 저 이정한이라는 투수의 상태가 그랬다.

'그런 공을 네까짓 게 쳤다고? 그건 그냥 운이야.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어디 한번 증명해보던가.'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한 표정으로, 그라운드 위 가장 높은 곳에 선 채로 해준을 내려다본다.

'이번에도 던져볼 테니까 어디 쳐보세요.'

라고-.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그 모습에 해준은 가슴 속 한구석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이정한의 모습 위로 지난 6년간 다른 투수들의 모습이 겹치기 시작했다.

'본인들이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배트를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개소리.'

퍼어어어엉-!

"스트라이크!"

그 사이 이정한이 던진 공이 바깥쪽 하단을 꿰뚫었다. 확실히 자신감을 가질만한 코스와 궤적. 이런 공을 10번에 4번만 던질 수 있어도 이 투수는 머지않아 1군에서도 핵심 주전으로 자리 잡을 것이 분명했다.

'그 말은 6번은 아니란 소리지.'

해준은 저 오만한 콧대를 꺾어주기로 결심하며 스파이크로 땅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는다.

퍼어엉-!

리드미컬하게 움직인 포수 미트가 낮게 깔리며 들어오는 공을 살짝 들어 올린다.

"볼"

하지만 무릎 높이에 살짝 걸치는 그 공에 구심은 볼을 선언했다.

"쓰으읍--"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는 투수.

하지만 해준은 개의치 않은 채 차분히 숨을 골랐다. 뜨거운 무더위. 이런 날일수록 투수들의 공 끝은 살아난다.

아니나 다를까, 3구. 이번에는 투수의 공이 날카롭게 스트라이크존 바깥쪽을 공략해 들어왔다.

공을 기다리던 해준은 망설이지 않고 배트를 돌렸다.

따아악-!

거칠게 밀고 들어온 바깥쪽 포심이 배트 윗동에 걸리며 그대로 포수 뒤 그물망에 직격했다.

"파울!"

그 순간 해준은 자신이 투수의 무기 중 하나에 완전히 적응했음을 깨달았다.

'타이밍은 맞았다.'

-어어어어! 아, 순간 쫄았다. 그런데 형님들, 이거 파울치고는 상당히 날카롭지 않습니까? 조금만 정확히 맞았으면 앞으로 쭉 뻗어 나갔을 것 같은...

2층 기록실에서 카메라를 들고 혼자 열심히 떠들던 남자의 탄식을 들려왔다.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저 말대로 조금만 배트 아래쪽으로 걸렸으면 그대로 안타가 됐을 공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군데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심지어 기록실에서 찍고 있네.'

아까부터 경기장과 더그아웃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아내며 무언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 관심을 돌린 해준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이제 카운트는 1-2.

다른 투수라면 한 번쯤 뺄법한 상황. 하지만 저 투수의 공격적인 성향을 고려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할 것이 분명했다.

'패스트볼이 날아올 것도 알고, 스트라이크존에 던질 것도 안다. 해준아, 집중하자. 높은 확률로 안타를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더 빠르고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느냐. 단타로 만족하기엔 이미 자존심이 상했다. 해준의 동공이 미미하게 수축하며 사고 능력이 팽창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 링크된 아웃라이어 블랑코의 감각이 만들어내는 직감.

그 모든 것을 이용하며 해준은 본인이 가장 완벽하게 대응 할 수 있는 코스들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물론 블랑코, 그 사람도 모든 포심을 때려내지는 못했어.'

야구란 그런 것이다. 통계를 벗어났다는 아웃라이어조차 100%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같은 포심 패스트볼이라도, 투수들이 그려내는 공의 궤적과 코스, 구속, 회전수는 모든 다르고 그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에 완벽하게 대응할 수는 없는 노릇.

싱킹성, 투심성, 커터성 등 그립만 포심이지 제멋대로 휘어져 들어오는 것들 천지였다.

'하지만 확률이라도 높여봐야지.'

상대를 파악하기도 전에 기습적인 일격을 날리는 데 성공했던 해준은 이번 타석에서 차근차근 상대의 공을 눈에 담아내고 조금씩 그 확률을 높여나가고 있었다.

더욱 완벽하게 무너트리기 위해.

그 순간, 이정한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해준의 시야에 무엇인가 걸려들었다.

'저건?'

와인드업에 들어간 투수의 왼발이 까닥- 한차례 미미하게 움직이고는,

퍽-!

여전히 빠른 후속 동작으로 공을 뿌려내며 몸쪽을 파고들어 온다.

"...볼!"

심판이 움찔했을 정도로 날카로운 코스.

이제 카운트는 2-2.

'그런 거구만.'

씨익- 해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저 투수가 어째서 이 좋은 공을 지니고도 2군에서 뛰고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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