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8화 (8/137)

8. 보시면 아시겠죠? (3)

해준의 호수비에 힘입어 고양 세오레즈의 선발 카일은 플레인즈의 2, 3번을 각각 삼진과 우익수 플라이로 잡아냈다.

그리고 이어진 공수교대.

1회 말, 마운드에 오른 플레인즈의 선발 투수 이정한은 조금 전 장면을 회상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흐, 저 선배 소문대로 장난 아니네.'

보는 순간 플레인즈 측 선수들도, 이정한 자신도 안타라고 생각했다. 풀스윙으로 당겨진 라인 드라이브 타구. 정면 타구도 아니고 코스가 절묘했는데 그게 너무 쉽게 잡혀버렸다.

'우리 팀 야수들도 좀 그렇게 잡아줬... 아니, 됐다.'

이정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상 눈앞에 타자로 들어선 해준을 보자 정신이 든 것이다. 세오레즈의 공격 이닝, 1번 타자로 들어선 해준은 생각을 정리하는 듯 스파이크 끝을 배트 헤드로 툭툭 튕기고 있었다.

'수비가 아무리 좋아도 타자가 타격을 잘해야지. 게다가 1번 타자? 오늘은 시작부터 편하게 가겠네. 좋아.. 어디 한번.'

할짝- 마른 입술을 입술로 한번 훑은 이정한은 포수와 사인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저 선배 뭐해?'

그리고 곧 인상을 찌푸렸다.

+++

'뭐야, 저 변태 새끼.'

해준은 황당한 눈빛으로 투수를 바라보았다. 평소 루틴대로 스파이크를 배트 헤드로 3차례 튕겨주고 있는데 왠지 느낌이 싸늘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파랗게 어린 투수가 자신을 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 아닌가?

'미쳤나?'

그것도 양쪽 입꼬리가 힘껏 끌어 올려져 있는 걸 보니, 좋아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래, 호구가 1번 타자로 들어서니까 아주 좋아죽는구나, 죽어.'

아무리 건방져 보여도 할 말은 없다. 2군 경기라지만 이들도 프로. 그리고 프로는 성적으로 말한다. 야수라면 몰라도 타자로서 해준은 무시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실력이었다. 그렇다고 표정이 건방지다고 트집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이 자식을 어떻게 혼내줄까..'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과거의 이야기.

[링크를 활성화합니다.]

해준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1개의 링크가 활성화 중입니다.]

[링크 #1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대상: 토니 디에고 블랑코

-활성화율: 83%(143.42km)

이제는 익숙한 메시지. 해준은 여기에 살짝 변화를 주었다.

'어디 중심을 살짝..'

양발에 40:60 수준으로 분배되어있던 무게중심을 50:50 정도로 조정한다. 그러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링크 활성화율이 감소합니다. 83% -> 81.8% (-1.2%)]

잠시 그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본 해준이 슬쩍 균형을 조정했다.

'역시 이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되돌리고..'

[링크 활성화율이 증가합니다. 81.8% -> 83% (+1.2%)]

곧바로 활성화율이 기존 수치로 돌아갔다.

'이번엔 이 부분을 수정해보자.'

생각과 함께 탑 포지션 위치를 살짝 조정하자, 감소 폭이 더욱 증가한다.

[링크 활성화율이 감소합니다. 83% -> 79.8% (-3.2%)]

'역시 더 올라가지는 않네.'

해준은 이리저리 타격 자세를 수정해 본 뒤 생각을 정리했다.

시스템 보정이 들어간 타격폼에 순응한다면 링크 활성화율은 최대치인 83%. 그 외에 이런 식으로 인위적인 조정에 들어간다면 수치가 요동쳤다.

'타격 준비 단계만 건드려도 이 정도인데 다른 부분을 건드리면 난리 나겠어.'

허리를 더 빠르게 돌려 배트 스피드를 증가시킨다면? 힘을 모으기 위해 기존에 없다시피 한 테이크백 자세를 추가한다면? 아예 번트 자세를 취한다면 어떨까?

어젯밤부터 고민을 이어오던 해준은 아쉬움과 함께 혀를 차며 결론을 내렸다.

'쯧, 결국 이게 내 피지컬로 끌어낼 수 있는 최상의 수치라는 거네.'

팔 길이가 블랑코처럼 길어진다거나, 코어 근육이 무식하게 두꺼워진다거나. 포켓몬이 진화하듯 신체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면 모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소리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소리지, 게임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잖아?'

게임 속 캐릭터가 강해지는 이유는 스탯 수치가 올라가기 때문이지, 아바타의 키가 커지거나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 아니다.

[현재 4포인트를 보유 중입니다.]

해준은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건 게임이나 다를 바 없지.'

괴물을 잡고 경험치를 획득하듯, 수비 보상으로 벌어들인 포인트. 그리고 보통 이런 것들에는 쓰임새가 있다. 마음을 굳힌 해준은 망설이지 않고 포인트를 사용했다.

'원래 게임에서 벌어들인 경험치는 레벨업 하라고 있는 거 아니겠어?'

그와 함께 변화가 찾아왔다.

[4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여기서 문제라면, 해준이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

게임 속 아바타는 0과 1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숫자를 수정하면 될 뿐이지만 현실의 몸은 다르다. 빠르고, 강하며, 내구성 있는 몸을 위해서는 몸의 변화가 필수적이었다.

[링크 활성화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급속 신체 변화를 유도합니다!]

"흡!"

갑작스레 전신에 가해지는 끔찍한 고통. 머릿속이 새하얘진 해준은 급히 숨을 들이켜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였다.

고통으로 부릅떠진 해준의 눈, 그 속의 동공이 팽창과 수축을 빠르게 반복했다. 겉으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속에서 격렬한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근육 세포가 자극을 받자, 자율신경계의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이 분비되기 시작하며 활동 전류가 발생한다. 수축을 시작한 근육. 서서히 가해지는 자극이 늘어나며 근원섬유의 손상이 급속도로 진행됐다.

그와 함께 회복 사이클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급속도로 작용하며 손상 난 근육과 결합 관절들을 치유했다.

그리고 잠시 뒤.

[링크 활성화율이 증가합니다!]

*83% -> 84%

*143.42km/h -> 145.15km/h

[다음 증가를 위해서는 8포인트가 필요합니다.]

"...후웁...후욱."

어느새 해준은 평온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미친. 사람 잡을 일 있냐?'

고통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순간 끔찍했던 감각까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해준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쭉- 허리를 편 채 새로운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응 구종에 대한 20-80스케일이 조정됩니다.]

*포심 패스트볼 50 -> 55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 해준. 끔찍한 고통이었지만 남들은 백만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순간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네.'

"후웁...후웁..."

'자, 와라. 박살내버리게....'

근육과 결합 관절의 성장 여파로 급증한 테스토스테론. 숨이 거칠어지고 가슴이 들썩인다. 해준은 세포 하나하나에 가득 들어찬 흥분감을 애써 가라앉히며 자세를 잡았다.

턱-

어깨 위에 편안히 얹어진 배트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

'뭐야?'

투수 이정한과 사인을 주고받던 포수 우요한의 시선에 이상징후가 감지됐다. 고개를 살짝 돌린다. 과연, 이상한 느낌의 근원지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였다.

우요한은 미간을 좁힌 채로 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타격 자세가 갑자기 변했잖아.'

1군에서 수많이 마주친 만큼, 우요한은 해준의 타격폼을 꿰뚫고 있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준은 난생 생전 처음 본 타격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폼이 완전히 달라졌어.'

타격이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는 경우, 그에 대한 대처법은 크게 두 가지다. 비디오를 끊임없이 돌려보며 기존의 타격폼을 찾으려 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거나.

많은 프로들은 그중 후자를 선호했다. 시즌 중 변화를 주는 것만큼 모험은 없으니까. 변화를 주더라도 극히 미미한, 본인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강해준이라는 놈은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아예 리모델링을 해버렸군.'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타격에서도, 수비에서도 강해준은 일반 상식을 월등히 넘어버린 놈이었으니까. 특히 타격 같은 경우는 어떤 식으로 수정해도 그보다 최악이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뒤의 행동이 문제였다.

몸의 중심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뒤로 넘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더니, 허공을 보며 헤헤-거리며 멍청한 웃음을 짓기를 반복했다.

'이 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런 행동에 불쾌감이 든 우요한은 해준을 저지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정식 중계 카메라가 없는 2군 경기라지만, 태도만큼은 다들 진지한 곳이었다.

"야, 해준아. 적당히..."

하지만 갑작스러운 신음이 우요한의 입을 막았다.

"흡!"

해준이 명치라도 맞은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움찔-

순간 놀란 우요한이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을 정도. 심판도 급히 마스크를 벗기 위해 얼굴을 향해 손을 올렸다. 하지만 그들이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해준은 별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허리를 펴며 타격 자세를 잡았다.

"타자, 괜찮습니까?"

"아, 네. 멀쩡합니다."

그리고는 심판의 염려 어린 물음에 오히려 씨익- 웃음까지 지으며 대답한다.

'이젠 하다 하다 별 생쇼를...'

우요한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냥 그러려니 하자.'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자식이 살짝 정신이 나간 놈이라는 것은 프로판에서 아주 유명했으니까.

'빨리 헛치고 들어가기나 해라. 더워 죽겠으니까.'

자세를 잡고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마저 사인을 주고받은 우요한은 미트를 들어 올렸다.

'몸쪽 깊숙이 포심 패스트볼. 평소랑 다르게 홈플레이트에서 조금 떨어져 있으니 사구 가능성도 떨어져.'

타격폼을 바꿈과 동시에 사구를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는 어프로치를 수정했는지, 해준은 홈플레이트에서 살짝 거리를 둔 상태였다.

'구속에 변화까지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저 녀석한테 거기까진 무리겠지.'

어설프게 시도하다 가는 제구까지 흔들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착각하곤 하지만 공을 느리게 던진다 해서 제구력이 향상되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극소수의 투수들에게나 가능한 퍼포먼스.

'그냥 있는 힘껏 때려 박기나 해라.'

마운드에 서 있는 이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포심 패스트볼에 자신감을 보이는 그였다.

+++

'왜이리 느려?'

해준의 시선에 특유의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왼발을 들어 올리고 있는 이정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의 투구 페이스.

'다리를 들어올리면서 힘을 모으는 스타일인가. 일본 선수들과 비슷한 경향이네.'

일본에서 건너온 투수코치들이 많았던 한국프로야구 시절에는 자주 보이던 시절이었지만, 이제는 온라인에서도 야구를 배울 수 있는 시대다.

많은 선수들이 메이저리그 식 투구폼을 지향했고, 이제와서 저런 식의 폼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보통 저런 폼들은...'

타이밍을 잡아먹는다.

그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엇박자를 타듯, 이정한이 오른발이 빠르게 투구판을 밀어냈다.

'제법인데?'

덕분에 해준은 자신의 리듬이 어긋났음을 느꼈다. 저런 투구폼은 겪어보기 전까지는 알면서도 당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별거 아니다.

'와라.'

해준은 자신을 믿고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 사이, 이정한의 하체가 무게중심을 부드럽게 옮겼고, 그에 순응하듯 허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어 채찍처럼 휘둘러진 손 끝에서 하얀 궤적이 쏘아져나갔다.

쉬이이이익-!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뱀과 같이 s자 궤적을 그리며 포수 미트를 파고들려는 이정한의 패스트볼.

끼이이익-!

그것을 주시하고 있던 해준의 손아귀에 배트 손잡이가 비명을 지르듯 쥐어졌다.

'타이밍이 좀 늦었지만..'

미묘하게 타자의 타이밍을 잡아먹은 채 들어오는 투구폼. 거기에 사이드암이 던지는 것 같은 무브먼트까지. 본래대로라면 까다로워야하지만, 타자로서의 직감이 말해왔다.

'생각보다 괜찮을 것 같다.'

그 직감을 믿은 해준은 망설임 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하지만 다소 늦게 휘둘지기 시작한 배트. 우요한은 곁눈질로 그런 해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생각했다.

'좋아, 치더라도 먹히는 볼이다.'

경험이 말해온다. 몸쪽 공에 이렇게 반응이 느리다면 쳐내더라도 타구 끝이 죽어 높은 확률로 내야 땅볼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찌르르- 등골을 타고 올라온다.

'...?'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진 배트가 어느새 우요한의 시선에서 공을 가리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언가를 직감한 그가 경악할 틈도 없이, 해준의 배트가 그대로 이정한의 초구를 잡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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