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보시면 아시겠죠? (1)
2군은 지옥이다.
낡은 시설, 1군에 비해 반 토막 나버린 식대 6000원. 야간 훈련을 위한 조명탑도 전기세 탓에 눈치 보며 켜야 하고, 그마저도 없는 구장이 있을 정도다. 에어컨? 많은 2군 선수들은 대낮 땡볕 아래서 경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이곳에서 마저 쫓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화려한 1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벗어난, 반란을 꿈꾸는 언더독들의 집결지. 당연하게도 수많은 관중이 환호하는 1군 경기와 달리 이곳은 같은 선수들의 내지르는 응원 소리가 가장 컸다.
'고추 달린 새끼들 고함만 가득하단 소리지.'
당연한 말이지만, 선수 중에서 2군에 머무르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프로야구선수란 팬들 앞에서 뛰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지, 아무도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공놀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해준은 2군을 질색했다.
"강해준, 이 문디 자슥."
"아.... 하하. 안녕하세요, 조 감독님이시죠? 새롭게 2군에 얼굴을 들이민....아, 아아아! 감독님, 내 귀! 귀!"
낡은 시설? 적응하면 된다. 무관중 경기? 해준은 딱히 그런 것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타석에서 땅 파고 들어갈 때마다 날아오는 게 욕이니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마음이 편했으니까.
"이제부터 나랑은 절연하고 다시는 2군 안 온다더니? 왜, 그래서 이 늙은이 보니까 안반갑드나? 그래도 그렇지 인사도 안 하고 숙소에 숨어 들어갈 생각을 해? 이 모지리 자식이!"
하지만 사람만큼은 아니다.
익숙해지기에는 볼때마다 지옥 훈련 기억 밖에 떠오르지 않는 남자, 고양 세오레즈 감독 조대욱. 해준이 2군을 지옥으로 여기는 이유이기도 한 이 남자는 까맣게 탄 얼굴에 괄괄한 성격,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은 다부진 체격으로 해준을 훈련으로 조져버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 영감님 아직도 팔팔하네!'
68세라는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 남들은 원로 야구인을 자처하며 야인으로 돌아갈 때도 조대욱 감독은 해준이 2군에 내려오길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려오는 날은 해준의 제삿날이다. 덕분에 조대욱 감독을 보기만 해도 해준은 신물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본능처럼 나도 모르게 피하는 걸 어떻게하라고!'
숙소로 가던 도중 멀리서 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개성 있는 팔자걸음을 발견한 해준. 당연하게도 몰래 숙소로 들어가려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구석에 짱박힌 말년 병장을 잡는 주임원사처럼 눈치를 채고 뒤쫓아온 조대욱 감독에게 그대로 붙잡혀버리고 말았다.
해준은 자신의 귀를 붙잡고 있는 조대욱 감독의 손을 감싸 쥐며 소리쳤다.
"이거이거 선수 학대입니다. 학대. 이런 신체적 접촉은 언론과 팬들이 알게되면 기겁하.."
"이게 그래도 정신을 못차리고!"
지금은 2026년. 공공연히 선후배 사이에서 행해지던 신체적 접촉은 물론 감독도 선수에게 손을 댈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무슨 80년대 야구판도 아니고!'
하지만 조대욱과 해준의 관계는 살짝 달랐다. 중학생 시절, 음주운전 사고로 부모를 잃은 해준을 데려다 키운 사람이 바로 조대욱 감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해준은 차마 조대욱 감독의 손을 떨쳐내지 못하며 소극적으로 반항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억지로 패대기쳤다가 패륜아 소리 들을 일 있냐?'
아마 그 날이 해준의 야구 인생 마지막 날일 것이다. 만년 백업 인생, 레저스포츠 계의 패륜아로 잠들다. 그런 조리돌림 댓글 따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아, 좀 놓고 말합시다. 영감님은 햇빛 받으면서 광합성 하세요? 날씨도 더운데 왜 이렇게 팔팔...아!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한참이나 귀를 당기고 뒤집고 꼬집고 나서야 조대욱 감독은 해준의 귀를 놔주었다. 아직 씩씩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통스러워하는 해준을 보며 어느 정도 분이 풀렸는지 억센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긴 해도 서울 말투로 말을 이었다.
"너!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겠냐. 어제 경기 봤다. 고개는 어깨에 붙이고, 어깨는 투수를 향해서 두고. 공이 오면 그냥 딱! 컴팩트한 스윙으로 치라고. 어제 경기만 봐도 그래. 어디 근본도 없는 스윙으로 공을 치겠다고. 내가 너 키운 거 세상천지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내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
곧바로 잔소리가 이어지자 해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만하라는 듯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그 어이없는 모습에 조대욱 감독이 인상을 찡그렸다. 차분해진 것 같았던 어조에서 다시 울컥함이 드러났다.
"이 자슥이 돌아뿟나?"
또 속사포 같이 쏟아지려는 조대욱 감독의 잔소리가 이어질까, 해준이 다급히 말했다.
"감독님."
"왜?!"
".....그래도 수비는 잘하잖아요."
"....."
조대욱 감독은 잠시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해준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마... 타자가 타격을 잘해야지 수비만 잘해서 어따쓰노?"
하지만 이번에는 해준이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언제는 수비가 기본이니까 수비부터 잘하라더니?"
"그거야 네가 이렇게까지 못 칠 줄 몰랐으니 그리 말했지."
그 말에 해준이 어이없다는 듯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와, 이 무책임한 태도. 멋지다. 꼭 본받아야지. 나중에 왜 이렇게 무책임하냐고 물어보면 이게 다 조대욱 감독이라는 사람한테서 배웠다고 해야겠죠?"
"...저, 저. 입만 살아서."
조대욱 감독은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리는 해준을 바라보다 기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절로 한숨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스물다섯이나 먹은 놈이 어린애 같아가지고..'
사실 이 이상 말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해준이나 조대욱 감독이나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조대욱 감독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방금 펼쳐 보였던 해준의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과 흉터들이 아른거렸다.
'게다가 또 무식하게 휘둘러댔구만...'
프로가 노력했다는 것은 자랑할만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 프로는 오로지 결과로 말하는 자리이고, 결과만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오히려 노력하고도 결과를 내지 못했다면 그것이 더 슬픈 일이다. 그것을 아는 조대욱 감독은 더 말을 잇기를 그만두고 화제를 돌렸다.
"가서 짐이나 풀어라. 이번엔 얼마나 있다 갈 건데?"
"그거야 프런트가 결정하겠죠. 내려보낸 것도 프런트니까."
하지만 화제를 돌린 조대욱 감독은 태연한 해준의 대답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살짝 묘한 감이 있었다. 타격이 안된다는 이유로, 투수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때로는 부상으로. 구실만 생긴다면 2군으로 내려오곤 했던 해준의 의기소침한 모습과는 살짝 달라 보였다.
'이 눔의 자식..?'
해준을 오랫동안 바라온 조대욱 감독의 눈빛에 의문이 맴돌았다.
그런 조대욱 감독을 바라본 해준이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말까지 꺼내 들었다.
"그런데 특타 안 시키세요? 항상 내려올 때마다 시키셨으면서."
"...자신 있나?"
믿지 못하겠다는 조대욱 감독의 어조에 해준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거야 보시면 아시겠죠."
+++
부우우웅-!
무더운 여름, 허공을 가르는 시원한 배트가 있었다. 그 배트의 주인, 강해준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런, 제기랄.'
방금 느낀 이 감정은 후회가 분명했다. 해준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자책했다. 날씨가 너무 더운 나머지 잠깐 돌아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후회를 할 틈도 없이 투수망 뒤에 서 있던 2군 불펜 투수, 오정현이 자세를 잡으며 소리쳤다.
"자, 다음 구 갑니다!"
꿀걱- 한 차례 크게 침을 삼킨 해준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속에서는 이미 절규를 부르짖고 있었지만, 샤워하던 도중 끌려 나온 오정현이 그런 것까지 눈치채고 신경 써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눈 좀 크게 치켜뜬다고 고쳐진다면 트라우마로 불렸을 리가 없다. 해준의 동공은 초점을 잃고 그대로 공을 놓쳐버렸다.
부우우웅-!
당연히 공을 보지 않으니 타격이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목표물을 잃은 해준의 배트가 다시 한번 시원스레 허공을 갈랐다. 손끝의 느낌이 허전함을 느낀 해준은 두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툭-
그리고 뒤늦게 홈플레이트를 통과한 공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름대로 눈치 있게 던진다고 아리랑 볼을 던진 오정현. 그마저도 해준이 헛스윙하는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
진짜로 이것까지 못 칠 줄은 몰랐으니까.
"..."
"...."
"..."
고양 경기장의 배팅 케이지의 세 남자, 불펜 투수 오정현, 해준 본인, 그리고 조대욱 2군 감독. 그들 사이에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이 상황에 해준은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이 특타를 제안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시부럴.'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이미 등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다. 이 이상 바닥으로 떨어질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끝나면 자신은 조대욱 감독에게 죽는다. 결심을 굳힌 해준은 이왕 벌인 김에, 끝까지 가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인생 술술 잘 풀린 적이 어딨다고. 못 먹어도 고, 노빠구다. 안되면 영감님한테 몇 대 맞고 말지 뭐.'
그와 함께 근엄한 척 소리쳤다.
"....정현아!"
"네?"
"인마, 진짜로 던져야지. 장난치냐? 너 훈련이 장난으로 보여? 선배가 우습게 보이지?"
앞뒤 없는 해준의 완장질에 오정현은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아리랑 볼도 못 치면서 무슨 진짜 공을 던져달라는거야!'
하지만 말로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오정현은 더욱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손끝에 걸리는 공의 실밥이 갑작스럽게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이거, 갑자기 공을 잘 때릴 수 있을 것 같다.
"진짜죠?"
"그럼 인마! 형 못 믿냐!"
솔직히 믿지는 못했다. 오정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해준은 잠시나마 울컥했지만, 자신의 잘못인 만큼 애써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외면했다.
게다가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뒤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게 분명한 저 영감님이 폭발하기 전까지 갑작스레 사라진 더 패스트볼 긱, 블랑코의 타격폼과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해준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이 빌어먹을 시스템을 사용해야 한다.'
어떻게 되먹은 게 튜토리얼이나 시스템 메뉴얼 같은 것도 없다. 분명 자신이 읽은 소설들에서는 주인공과 대화까지 나누는 시스템도 있었는데, 이놈은 대화는 고사하고 코빼기도 내보이질 않고 있었다.
'설마 꿈은 아니었겠지?'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몸으로 생생하게 겪은 경험인데도 확신이 사라지자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의심이 들었다. 일단 해준은 시도라도 해보았다.
'야, 너 나랑 이러기냐?'
일단은 어떤 메시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케이, 대화 의사는 없다고 치자. 미련 없이 대화를 포기한 해준은 닥치는 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중얼거려도 보았다.
'시스템. 소환. 시스템 온. 타격폼. 도와줘. help. help me. fuck you!'
하지만 무언가 달라질 기미는 조금도 보이질 않는다. 설마 불량품인가? 사실 짜잔- 꿈이었다기보다는 2군행에 충격받아서 미쳐버린 나머지 환각 봤다는 설에 무게가 조금씩 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미친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져 멍하니 고개를 돌리는 해준. 그러자 반갑지 않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어. 잠깐. 정현아?'
까득-
이를 악문 것이 분명한 오정현이 있는 힘껏 투구판을 박차고 있었다.
'이런 시부럴. 헛스윙 한게 좀 무안해서 조금 뭐라 했다고 삐졌냐!'
해준은 블랑코의 자세를 떠올리며 자세를 잡았다. 스탠스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깨에서는 힘을 빼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스윽-
그 사이 오정현의 왼발이 폭발적으로 투구판을 밀어내며 하체가 전진했다. 그 어디에도 망설임을 보이질 않았다.
'이런 제기랄.'
그 모습을 본 해준은 몇 초 뒤 자신의 꼴불견 사나운 헛스윙 장면을 떠올리며 소리질렀다.
'블랑코 씨,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납니까!'
그리고 마침내, 하늘이 해준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더 패스트볼 긱, 토니 디에고 블랑코와의 링크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헉, 이게 왠 떡이...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어, 그래. 당장, 지금 당장. right now!'
[링크가 활성화됩니다.]
그리고 해준에게 그분이 찾아오셨다.
어색하기 그지 없던 오픈 스탠스의 준비 자세가 순식간에 군더더기 없이 다듬어진다. 본래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는 긴장으로 잔뜩 힘이 들어가있던 근육들이 이완과 수축을 한차례 반복하고는 무게 중심이 무엇보다 폭발적일 이동 준비를 끝마쳤다.
'오정현, 넌 오늘 죽었다 복창해라!'
때마침 투수의 손을 떠나며 꿈틀거리듯 궤적을 그려대기 시작한 하얀 점. 누가 왼손 투수 아니랄까봐 쓸데없이 멋있는 크로스 파이어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흡!"
투우사의 붉은 깃발로 돌진하듯 거침없이 직진하는 무게중심. 하체를 그대로 밀어내는 오른발. 그 뒤의 세세한 자세 포인트는 알지 못했다. 스스로 휘두른 해준이 느껴도 너무 자연스럽고 본능처럼 이루어진 스윙이었으니까.
해준이 기억하는 것이라곤 건들거리듯 어깨에 편하게 얹혀져 있던 배트가 순식간에 뿜어져나와, 궤적과 충돌했다는 것 뿐이다.
따아아아아악-!
그 뒤, 배트에서 전해지는 손끝 감각에는 걸렸다는 느낌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어?"
"...어라?"
그리고 멍청한 소리를 내뱉는 두 명의 남자도 있었다. 공이 조명탑의 빛이 비추는 영역을 넘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해준은 보란듯이 크게 소리쳤다.
"ye-----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