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수에서 타자까지-5화 (5/137)

5.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3)

퍼어억-!

바깥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살짝 안쪽으로 틀어진다. 종으로 떨어진 공이 미트에 틀어박혔다.

"...볼."

심판이 어깨를 움찔했을 정도의 예리함. 하지만 해준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공을 시야에 담아냈다.

'방금 느낌이 체인지업.'

미묘하게 느낌이 달랐던 투구폼과 지금의 공에 대한 이미지를 연결시킨다.

"...후, 좋아."

해준은 자신감이 서린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카운트는 2-0. 아직 여유는 충분했다. 그때 마운드에서 shit-하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왔다.

'상당히 당황하는걸.'

홀트가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미간 사이를 잔뜩 좁히고 있었다. 볼 판정에 대한 불만보다는 다른 것을 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모든 반응에는 이유가 있다.'

해준은 홀트가 던져왔던 공들을 복기하며 추론에 들어갔다.

'첫 구가 터무니없이 몸쪽에 붙는 슬라이더. 2구째는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바깥쪽을 공략한 체인지업. 게다가 이 몸의 주인, 블랑코라는 양반의 별명은 더 패스트볼 긱. 후우, 패스트볼 괴짜라 이 말이지. 이쯤 되면 너무 뻔한가?'

투수와 포수, 이들은 블랑코가 패스트볼에 강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투구 패턴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해보면 아니라고 말하기도 힘든 상황.

'하긴, 아무리 스쳐 가는 선수가 많은 더블A라도 결국 고여버려서 죽치고 있는 놈들이 있지. 패스트볼 타격 타율이 5할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도 없고.'

해준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투수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게다가 저 유독 당황한 표정과 반응.'

록하운즈의 투수 브록 홀트는 당황한 심정을 그대로 표정 위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당연히 배트를 휘둘러야 할 놈이 왜 가만히 있느냐는 듯이.

블랑코가 단순히 패스트볼에 강점을 드러내는 타자였다면 변화구에 어떠한 반응을 드러내거나 헛스윙을 하지 않았다 해서 저렇게까지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해준은 거기서 블랑코에 대한 한가지 추측을 더 이끌어냈다.

'패스트볼 타율이 5할에 육박하지만 4년 차에도 만년 마이너리거인 타자. 그 말은 뻔하지.'

브레이킹 볼 계열, 혹은 오프 스피드 피칭에 심각한 취약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둘 다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것도 패스트볼에 대한 비정상적인 강함을 상쇄시킬 만큼 심각한 수준일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수긍이 된다.

'하지만 나는 블랑코가 아니고..'

저 투수는 메이저리거가 아니다.

'충분히 해볼 만해.'

상황이 이렇다면 공략할 요소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해준은 특히 투수의 상태에 주목했다. 반응을 보일만 한 변화구를 2구나 던졌음에도 타자가 미동도 없다는 사실에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좋은 공을 가지고 마이너리그에서 던지고 있는 걸 보면 멘탈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지.'

주로 2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타입의 선수다. 일명 유리멘탈. 쉽게 잡을 것이라고 확신한 타자가 예상된 반응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평정심이 무너지는 타입. 저런 선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무너지곤 했다.

그중 하나는 제멋대로 볼넷을 남발하다 자멸하는 것.

'하지만 그래선 게임이 안 되지. 내가 해야 할 일은 패스트볼을 후려갈기는 거니까.'

나머지 하나는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던져선 안 될 공을 던지다 얻어맞는 것.

'그렇다면 내가 공략할 포인트는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

상대가 패스트볼을 던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좋아. 이제 문제는 어떻게 패스트볼을 유도하냐... 이건데.'

회전이 풀린 채 한복판에 들어오는 공이더라도 그게 오프 스피드, 혹은 브레이킹 볼 계열이라면 백날 쳐봤자 퀘스트 실패.

'원하는 공이 올 때까지 커트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다. 그게 됐다면 끊임없이 커트하는 타자들을 상대하다 투수들은 조기 은퇴했을 것이다.

해준은 배트 헤드를 스파이크 끝을 툭툭- 튕겨대며 생각을 정리했다.

현재까지 파악한 투수의 변화구는 슬라이더, 체인지업.

일단 볼카운트에 여유가 있으니 패스트볼은 던지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한 번 더 지켜볼까. 일단 패부터 다 까보고 결정하자.'

이번에 날아오는 공이 저 투수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패일지도 모른다.

턱-

생각을 끝낸 해준이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배트 헤드가 오른쪽 어깨에 올려지며 무게 중심이 살짝 뒤로 향한다.

'어라.'

그때가 돼서야 해준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이거... 내 타격폼이 아니잖아?'

+++

[타격폼을 보정 중입니다.]

놀람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의문이 떠오르자마자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해준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차피 비현실적인 일 천지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이제 눈치챘다는 게 더 놀랍다.'

해준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타격폼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탠스부터 시작해서 무릎의 높이, 토템을 만드는지 아닌지, 몸을 오픈하는지 아닌지, 엉덩이와 견갑골의 위치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그 외에도 수백, 수천 개의 요소가 맞물리고 맞물려 마침내 타자로서의 타격자세가 완성된다.

1000명의 타자가 있다면 1000개의 타격폼이 있다고 할 정도로 각자의 개성과 특징을 드러내는 타자로서의 아이덴티티.

그렇기에 자그마한 변화에도 밸런스가 흐트러지고 성적이 들쑥날쑥하게 날뛰어댄다. 당연히 타자들은 이상적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매우 예민하고 섬세하게 신경을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예 대놓고 바뀐 타격폼을 이제야 눈치챘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럽게 몸에 자세가 녹아들어 있었다는 의미였다.

'이거, 현실에 돌아가서도 써먹어 봐야겠다.'

그렇다면 다른 공은 몰라도 패스트볼은 미친놈처럼 박살을 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자세는 같아도 사람이 다르니 확신은 없지만.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풀었던 타격폼을 다시 한번 잡아보며 그 느낌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곳에서도 이질감이나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은 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타격폼.

'...대박이라고 해야 하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해준은 그제야 이 게임 같은 상황과 주어진 퀘스트의 보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보상

-아웃라이어 토니 디에고 블랑코와의 고정 링크 생성

'아마 이게 그 뜻이겠지? 타격폼 보정.'

그리고 전 타석부터 날카롭게 서 있던 패스트볼에 대한 대응 감각. 아직 쳐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패스트볼이 날아온 순간, 게임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이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이 블랑코라는 양반의 재능이겠지. 이러니 패스트볼을 못칠래야 못 칠 수가 있나.'

그때 록하운즈의 투수 브록 홀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한참이나 서로 사인을 주고받던 록하운즈의 배터리의 의견이 마침내 일치했다. 투수 브록 홀트는 천천히 와인드업에 들어갔다.

'이번엔 어떤 공이냐.'

해준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놀랍도록 강력한 집중력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전 투구폼의 이미지와 지금의 모습에 겹쳐 보이도록 만든다.

그와 함께 해준은 확신했다.

'제3의 공이다.'

슬라이더도, 체인지업도 아니다. 브록 홀트의 투구폼은 이번에도 달랐다. 3번. 겨우 3번의 관찰이었지만, 홀트의 투구폼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해준은 그 차이점을 알아챌 수 있었다.

'슬라이더를 던질 때는 어깨에 잔뜩 힘을 줬는지 높이가 살짝 들려있었고, 체인지업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딱 그 중간. 어깨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다.

'어떤 구종이지?'

이를 악문 홀트가 높은 타점에서 있는 힘껏 공을 때려냈다.

슈우우우욱-! 공기를 불태우듯 가르며 높은 높이에서 돌진해오는 하얀 궤적.

순간 비정상적으로 집중력이 증폭되며, 피부 위 솜털 하나하나까지 곤두선다.

'공이... 너무 선명해.'

살면서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해왔다. 해준은 블랑코의 짐승 같은 감각이 사냥감의 냄새를 캐치해냈음을 알아챘다.

'패스트볼이다! 하지만 너무 높아 휘두를 필요는...'

한 눈에 보아도 타자의 머리 높이로 오는 공. 누가 생각해도 헛스윙 유도를 위한 공이다. 그렇기에 무리해서 휘두를 필요도 없다.

'..어라?'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폭발적으로 휘둘러지는 배트. 먹잇감을 앞둔 야수는 기회를 잡은 순간 물러서지 않는다. 패스트볼만을 사냥해온 맹수, 블랑코의 타격폼과 감각이란 그런 것이었다.

따아아악-!

손끝에 전해지는 불쾌한 감각과 함께 높이 떠오르는 공.

'플라이볼!'

왼손 하단, 노브와 닿은 부분이 찌르르 울려온다. 어렸을 적부터 갈고 닦아온 감각이 말했다. 이건 분명 아웃이라고. 하지만 해준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공중을 유영하는 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 어? 간다?'

기껏해야 내야 부근에 머물렀어야 하는 공이 날개라도 달린 듯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록하운즈의 배터리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공의 궤적에 이끌리듯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

툭--

제아무리 패스트볼 아웃라이어 블랑코라 하더라도,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황급히 자리를 조정한 중견수의 글러브에 안착하는 공. 펜스 앞에서 고작 4m 정도를 남겨둔 채였다.

"컴 온----!"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대에 핏발을 세우며 중견수를 향해 소리치는 홀트. 공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1루를 지나 2루를 향해 달리려던 해준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미친 몸뚱아리 보게... 제멋대로 휘두른 건 둘째치고 그걸 저기까지 보내?'

하지만 확신이 섰다. 이 정도라면..

'다음엔 내가 이긴다.'

그와 함께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목표 달성 실패]

그 뒤 예상된 암전이 찾아온다.

+++

탁-타다닥! 탁!

"아! 아쉽다."

내가 아직 어렸을 적. 당시에는 문방구 앞에 모여있는 아이들 무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모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그때 동네 아이들에게 불어닥치는 유행이 있기 마련인데, 그 대상이 문방구 앞 자그마한 오락기였을 뿐이다. 정확히는 그 속의 좀비와 외계인을 무찌르는 2D 횡 스크롤 게임이 대세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너무 오래돼서 그것까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더 하고싶다.."

"너 돈 있어? 나 100원만 빌려줘."

"나도 없는데..."

"에이, 아무도 없구나. 그럼 집에 가자."

다만 조금 어려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기습과 눈을 어지럽히는 총알 세례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졸라 얻어낸 100원짜리 동전을 거침없이 투입구에 밀어 넣기 바빴지만, 클리어는커녕 마지막 보스의 모습조차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

그러던 어느 날, 아마 주말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지. 당시의 나는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노란빛 깔깔이를 입은 아저씨가 오락기 앞 거꾸로 뒤집어 놓은 플라스틱 박스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는 모습을 보았고, 자연스럽게 그 뒤에서 아저씨의 실력을 감평해보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 오락기의 최고득점 기록은 내가 가지고 있었으니, 터줏대감이라고도 볼 수 있었겠지.

'어른이라고 뭐 다를까?'

살짝 부푼 자만심과 함께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그때는 게임을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란 피시방에서나 볼 수 있었지, 동네 오락기를 붙잡고 있던 어른은 처음 봤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던 것 같다.

"...와."

그때부터 나와 몇몇 아이들은 17인치쯤 되는 작은 오락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깜짝깜짝 놀라게 만들던 적들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저격당했고, 도저히 피할 길이 없어 보이던 레이저빔의 세례는 신묘한 손놀림이 조이스틱을 탁탁- 쳐대자 너무나 쉽게 빗나갔다.

"...진짜 깨버렸어."

잠시 뒤, 화면에 떠오른 최고득점 기록자의 이름 짓기를 고민하던 아저씨는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는 듣고는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음... 이거 이름 너희들이 써볼래?"

"그래도 돼요?"

"그럼."

아저씨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이들은 순식간에 오락기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내 이름으로 할래!"

"안돼, 아저씨가 내가 하라고 했어!"

"나한테 말했는데?"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대로 사라지려는 아저씨를 붙잡고 물었다.

"아저씨. 이거 어떻게 하면 100원으로 깰 수 있어요?"

"...음?"

그 말에 몸을 돌리려던 아저씨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손가락으로 집어 빼내며 대답했다.

"패턴만 파악하면 돼. 어떤 게임이든 패턴만 알면 그때부터는 식은 죽 먹기거든."

그리고 3개월쯤 지났을까?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게임의 유행이 시들해질 무렵 나는 100원으로 엔딩 크레딧이 내려가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래. 모든 게임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지.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그리고 그것은 다 커버린 지금도 마찬가지다.

툭툭-

돌아온 시간, 타석에 들어선 나는 배트 끝으로 스파이크 헤드를 건드리며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냥 안타를 치라는 것도 아니고, 극도로 패스트볼 던지기를 경계하는 투수를 상대로 패스트볼을 쳐내라니.

'보통이라면 개소리도 그런 개소리가 없지.'

야구에서 타자란 10번 중 3번만 쳐내도 더할 나위 없는 존재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제약 조건을 건다면? 내 배트는 공 대신 그런 개소리를 하는 놈의 엉덩이 향해 휘둘러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좀 해볼 만하니... 봐줄까?

'게임으로 치면 계속해서 코인을 넣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상대의 모든 패턴을 알게 된 이상 깨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

퍼어억-!

"볼."

퍼억-!

"볼"

되감기를 한 비디오가 재생되는 것처럼 똑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나는 다시 한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홀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되돌아가서 같은 장면을 본다지만, 계속 보니까 살짝 맹구가 같기도 하고. 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타격에 집중하자, 타격에.

'1구는 슬라이더, 2구는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살짝 휘며 떨어지는 체인지업.'

여기까지는 순조롭게 관찰했다. 그리고 문제의 3구.

'하이 패스트볼.'

아무리 패스트볼 성애자라도 이 정도 높이라면 헛스윙 하겠지? 라는 생각이 물씬 묻어나는 공이었다. 그것을 이미 한 번 경험한 나는 두 가지 결론을 내렸다.

'첫째. 제3의 변화구는 없다.'

아마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이 저 투수가 가진 변화구 전부였을 것이다.

'하긴 팔색조 투수가 아닌 이상 그게 정상이지.'

그리고 둘째.

'이거 그냥 쳐도 안타 되겠는데?'

쉬이이익-!

투수의 높은 타점에서 출발하기 시작한 하얀 공이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다. 다른 타자라면 뻔히 보고 있었거나, 헛스윙이 나올만한 하이패스트볼.

'정석대로라면 그냥 둘텐데...'

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괴물 같은 블랑코의 피지컬과 감각, 패스트볼에 특화된 타격폼이 있다.

'다만 전보다는 더 힘을 빼고, 배트 중앙에 맞도록!'

공을 인지함과 동시에, 한껏 예열된 몸이 타격 자세에 들어간다.

오픈 스탠스, 탑 포지션에 머무르는 손은 굳이 테이크백에 들어가지 않는다. 투수 쪽으로 전진한 몸은 굳이 허리 회전에 집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트를 뿜어낸다.

그 결과, 비정상적으로 앞에서 형성된 히팅포인트에 공이 걸려들었다.

따아아악-!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타격음.

궁지에 몰아넣은 먹잇감을 물어뜯는 것처럼, 흉포할 정도로 거친 배트의 궤적이 공을 강타했다.

내 기존 폼과는 전혀 상반된, 자유롭다 못해 야만스러움까지 느껴지는 타격자세.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f—uck!"

투수가 바로 안타임을 직감할 정도로 쭉 뻗어 나간 라인드라이브 타구. 배트에서 전해지는 시원한 손맛은 소름과 환희를 동반한 채 등골을 타고 온몸을 찌르르 울려온다.

툭-

그리고 마침내 공은 좌익수와 중견수, 그 누구의 글러브도 닿지 않는 잔디밭 위로 떨어졌다.

"세이프!"

[목표 달성]

[토니 디에고 블랑코와의 고정 링크가 생성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성공 메시지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ye--ah!"

여긴 미국이니까 미국식으로. 음, 좀 멋지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 다음 스테이지는?'

인정한다. 지금의 나는 살짝 들떠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차분한 게 더 비정상 아닌가?

6년간 발목에 묶여있던 족쇄에서 풀려나는 해방감. 이건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어쩌라고? 모르면 말을 마시라고!

'이런 게임이라면 얼마든지 즐겨야지!'

어느 정도라 말한다면 암울했던 현실로 돌아갈 생각은 떠올리지도 않았을 정도? 시야가 익숙한 어둠으로 물들었을 때도 현실로 돌아갈 생각보다는 다음 스테이지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어?"

해가 지기 직전, 붉은빛에 물든 고양 2군 구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주차장을 벗어나는 택시가 눈에 들어오고, 내 어깨에는 스포츠백이 매달려있었다.

"...하아."

나는 아직은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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