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2)
"No, 칠 겁니다."
단호하면서 남미 억양이 확연히 드러나는 말투. 해준이 의문을 지닐 틈도 없이 몸이 알아서 타석에 들어선다. 다시 한번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웃라이어 링크 시스템 가이드]
*목표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더블A 시즌 마지막 안타를 기록하기.
-아웃라이어로서의 조건 달성하기.
*보상
-아웃라이어 토니 디에고 블랑코와의 고정 링크 생성
눈앞의 홀로그램을 바라본 해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실패한 거지?'
시간이 되돌아간 것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놀랍지 않았다. 애초에 이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니까. 그저 게임에서 퀘스트를 실패하고 강제로 세이브 지점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
해준은 차분한 시선으로 메세지들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곧 퀘스트 실패의 원인을 발견 할 수 있었다.
'아웃라이어로서의 조건 달성하기.'
과연 자신이 무심코 넘겼던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자신이 놓친 것이 없나 몇 번이나 반복해 확인한 뒤에 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치만 그게 뭔지 어떻게 알아?'
자신은 수비로 아웃라이어가 됐다 치지만, 이 토니 디에고 블랑코라는 양반은 어떻게 됐는지 해준이 어떻게 알겠는가?
'...어, 음 잠깐만.'
그때 해준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잠시 멈칫거렸다.
'알 수도 있겠네.'
이게 게임과 비슷하다면, 당연히 다른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토니 디에고 블랑코 상태 창.'
망설일 필요도 없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당연하다는 듯이 홀로그램의 내용이 뒤바뀌었다.
[아웃라이어(Outlier)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토니 디에고 블랑코
[소속]
-텍사스 리그
-더블A
-프리스코 러프라이더.
[특이사항]
-23세, 좌투우타
-마이너리그 4년 차 시즌.
[아웃라이어 업적 *비활성화 상태*]
-통산 패스트볼 상대 타율 0.4997
-통산 패스트볼 상대 BABIP 0.587
*통계의 신뢰성을 위한 3시즌 표본까지 –1.
'...하.'
그 내용에 해준은 허무한 탄식을 내뱉었다. 이걸 몰랐으면 이번에도 삽질이나 할 뻔했다.
'...두 번째 시도 만에 알아낸 것도 잘한 거지. 읽기나 하자.. 음, 여기가 더블A라고? 변화구가 날카로웠는데... 미국은 이 정도 선수가 더블A에도 있구나.'
내용을 천천히 살피던 해준. 하지만 곧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건 뭐, 할 말이 나오질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이 양반... 괴물이잖아?'
지난 6년간, 프로에서 해준은 타자로서 고등학생보다 못한 존재였다. 타격에서 본전은커녕 오히려 타선의 힘을 깎아 먹어왔으니까. 그런 해준이 프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던 돌파구는 수비, 그리고 수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통계적 수치들이었다.
이 선수의 타구 속도는 어떤지, 회전은 얼마나 걸렸는지, 안타 확률이 높은 Hard 타구의 발생 확률은 몇 퍼센트인지. 그 모든 데이터를 머릿속에 때려 박다시피 하고 나와버린 상태에서 타고난 야수적 움직임까지 더해지자 탄생한 경이적 이레귤러 야수 강해준.
그렇기에 웬만한 타격 수치들은 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통산 패스트볼 타율이 4할 9푼 9리 하고도 7모. 그냥 5할이라는 소리잖아... 이런 미친 인간이 왜 메이저에 안 가고 마이너에 있어?'
최소 타석을 100타석으로 삼았을 때 역대 한국프로야구리그에 가장 높은 통산 패스트볼 타율이 3할 8푼이다.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을 더블A로 평가한다는 것을 가정하면 이 토니 디에고 블랑코라는 양반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패스트볼을 5할 타율로 때려낼 만한 규격 외의 존재라는 소리였다.
해준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음 줄에 주목했다.
'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타율의 원인은 이 말도 안 되는 BABIP. 5할 8푼 7리라고? 말이 되는 건가 이게?'
BABIP(Batting average on balls in play).
인플레이 된 타구의 타율을 말하는 스탯.
'이건 한 시즌 동안 기록했다고 해도 못 믿을 수준이야. 게다가 3시즌 가까이 표본이 쌓였으니.. 이 정도면 한 타자의 고유 BABIP으로 인정받는 수준일텐데..'
리그에서 뛰는 타자들의 BABIP를 합산해 평균을 내어보면 대체로 3할에 수렴한다는 것은 세이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블랑코라는 양반은 5할을 훌쩍 뛰어넘어 6할.
'타격폼이 모두 같을 순 없으니 개인차가 있다 해도 오차범위 이내. 4할은커녕 3할 5푼도 안 되는 사람들이 수두룩해. 5할 8푼? 이건 기가 차서 헛웃음도 도망갈 수준이잖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타구 처리 확률 0%를 처리하는 자신이나, 통산 패스트볼 상대 타율이 5할에 BABIP은 5할을 뚫어버리는 이 양반이나.
그래서 아웃라이어라 불리는 거겠지.
고개를 끄덕인 해준은 정답을 찾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으며 자세를 잡았다.
'아무튼... 패스트볼 아웃라이어라 이거지? 좋았어.'
전 타석에서는 슬라이더를 쳐낸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Hey, buddy."
그때 뒤에서 록하운즈의 포수 오스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생각이 끊긴 것이 불편했던 해준은 전 타석 광경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Shut up, buddy."
"...예민한 친굴세."
아무리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볼이었다지만, 그래도 대놓고 몸쪽으로 유도한 포수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다. 하지만 곧 해준은 6년 만에 느껴보는 타석에서의 개운함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날아올 공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편하구나.'
흔히들 타자란 공포심과 투쟁하는 자라고 말한다. 자그마한 공에 실린 수 톤의 위력은 마초적인 메이저리그 선수들조차 티를 안 낼 뿐, 지긋지긋해 할 정도니까.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공의 궤적을 눈에 잡아둘 수 없는 해준이 지난 6년간 맞서 싸워온 공포심을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퍼어억-!
과연 구종과 코스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은 그저 몸을 살짝 빗겨 들어왔을 뿐이었다.
"볼-"
흔들림 없는 해준의 기색에 포수 오스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동도 안 한다고? 데드볼이 아닌 걸 알고 있었나? ...아니, 그 정도 선구안을 가진 놈은 아닌데.'
오스카는 미간을 좁힌 채 블랑코의 뒷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트리플A와 더블A를 전전하는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별명이었다. 보통 선수들은 패스트볼만 비정상적으로 쳐대는 그를 이렇게 부르곤 했다.
'아, 그 패스트볼 괴짜 자식?'
패스트볼에 이 정도로 강하다면 메이저리그에서 콜업을 하기도 하련만, 블랑코가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는 것은 별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오프 스피드 볼이랑 패스트볼을 구별 못 하거든. 아니, 안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모든 스윙이 패스트볼 타이밍에 맞춘 일변도. 몸에 맞는 공이라도 패스트볼이라면 일단 휘두르고 보는 정신 이상자. 그래도 나름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는지 맞추면 일단 안타, 혹은 높은 확률로 홈런이다.
덕분에 패기 좋게 더블A로 올라와 패스트볼을 꽂아대는 유망주들에게는 저승사자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메이저 타입은 아니지만..'
선수의 사소한 버릇 하나까지도 의미를 두고 분석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이런 유형의 선수가 버텨낼 수 없다.
한두 타석이라면 모를까, 그 이상은 곧바로 분석 당하고 변화구에 헛스윙만 하다 아웃당하는 스타일이니까.
더블A는 워낙 거쳐 가는 선수가 많아 블랑코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사람도 많고, 패스트볼에 자부심을 가진 고집 쎈 유망주들이 오프 스피드 피칭마저 미숙한 경우가 많아서 맞을 것을 알면서도 던져대기 때문에 통할지도 모르지만, 메이저에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모르겠네. 모르겠어.'
그동안 이런 볼에는 무조건 배트를 휘둘러 온 놈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렇게 차분해졌을까?
'한번 보자고. 이봐, 이번에는 제발 체인지업으로 가자. 오케이?'
두 다리 사이로 오른손을 내린 오스카가 빠르게 사인을 보내기 시작했다.
+++
록하운즈의 투수 브록 홀트.
그는 불과 일주일 전 콜로라도 산하 더블A 팀에서 텍사스 리그의 록하운즈 미들랜드로 트레이드되어 건너왔다. 덕분에 이 리그의 베테랑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상태.
홀트는 여전히 손끝에서 맴도는 찝찝함을 털어내기 위해 손을 흔들고는 유니폼에 비비기를 반복했다. 파인타르를 바르는 행위로 오해를 살 수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 타석 블랑코에게 허용한 홈런이 계속 생각날 것 같았다. 일종의 징크스 중 하나. 그는 괜스레 마운드 흙을 긁어가며 시간을 끌었다.
'퍽킹 패스트볼 성애자라더니... 진짜였어.'
마이너리그에 널리고 널린 게 기괴하고 특이한 놈들이지만 저런 놈이 있다는 것은 듣고도 믿지 못했다. 패스트볼 타이밍에만 맞추고 휘두르는 놈이라니?
다른 놈들이라면 메이저는커녕 마이너에서도 사라질 운명이었을 텐데...
'패스트볼에 한해서는 메이저리거도 저리 가라군.'
저 빌어먹을 멕시칸 놈은 그 수준이 살짝 달랐다.
한 번쯤 확인한답시고 던져본 첫구. 하지만 완벽하게 들어갔다고 생각한 바깥쪽 낮은 패스트볼이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을 때 브록은 깔끔하게 패스트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오프 스피드 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충 던지는 시늉만 해도 휘둘러주는 놈이라니 이용할 것은 이용해야 한다.
'2, 3년차 애송이들이면 몰라도 나 같이 뒤 없는 놈들한테는 고마운 놈이지. 홈런 한 방 정도는 그냥 팁으로 치자고. 그 대가는 빌어먹을 IRS(미국세청)처럼 악랄하게 징수해버릴 테니.'
간혹 자존심 세운다고 한번 얻어맞은 뒤에도 정신을 못차리는 놈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아니지. 그런 건 2, 3년 차 유망주 때나 가능한 꿈 같은 이야기라고.'
정신을 차려보니 마이너 10년 차. 메이저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을지언정 현실적 목표는 다르다. 현재 브록의 목표는 트리플A라도 올라간 뒤 자리를 잡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오는 오퍼를 따내는 것뿐.
그렇기에 포수 오스틴이 체인지업을 요구했을 때 홀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윽-
그런 홀트가 투구자세에 들어갔을 때,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해준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뭐야.. 방금이랑 다르다?'
뭐라 딱히 집어낼 순 없었다. 다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맞아, 분명하게 달라.'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날아오는 공의 궤적을 볼 수 없었던 해준. 그렇기에 비정상적으로 투수들의 준비 자세와 투구폼, 쿠세 등에 집착 하는 성향이 있었다. 6년을 그렇게 버텨왔다. 덕분에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눈썰미는 해준으로 하여금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문제라면 정작 공을 보지 못하니 알고도 때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
'하지만 이젠 나도 다르지.'
공이 보인다. 그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지난 6년 간 뼈저리게 느껴왔다.
'온다!'
그리고, 마침내 홀트의 손에서 출발한 하얀점이 다시 한번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