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더 패스트볼 긱The Fastball Geek (1)
2003년,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 더블A팀 프리스코 러프라이더. 창단 1년 차를 맞이한 이 팀은 닥터 페퍼 볼파크를 홈구장으로 쓰고 있었다.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해준. 땀에 절어버린 끈쩍지근한 유니폼이 달라붙어 꿉꿉한 느낌이 가장 먼저 전해져왔다.
'뭐지?'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고 싶지만,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고정되어있었다.
[아웃라이어 링크 시스템 작동 중...]
눈앞에 떠올라 있는 반투명한 홀로그램. 그것을 읽어본 해준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범위에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야구장인 것 같은데...'
가장 먼저 배트를 들고 있는 손이 보인다. 그 주위는 흙으로 된 땅 위에 그려진 하얀 라인. 해준은 아무래도 자신이 배터박스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다. 해준이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뭔진 몰라도 누가 설명이라도 해달라고. 내 상태가 왜 이러는 거야?'
시야는 온통 회백색 천지에 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1920년대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정지해놓은 것 같았다.
그때 눈앞의 기존 창이 스르르 사라지며 새로운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아웃라이어(Outlier) 더 비스트The Beast]
-강해준
[소속]
-한국프로야구
-서울 세오레즈 2군
[특이사항]
-25세, 우투우타, 멀티 포지션
-트라우마, 백색선소실증(白色線消失症).
[아웃라이어 업적]
-통계상 처리 확률 0%, Impossible 난이도 타구 10회 처리.
[연결된 아웃라이어(Linked Outlier)]
-토니 디에고 블랑코 (Double A)*임시 링크*
'...이거 무슨 게임 같냐.'
흡사 1년 전 출시됐던 증강현실 AR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같은 친숙한 느낌. 영문 모를 상황에도 해준은 현실적인 심각성이 사그라들어짐을 느꼈다.
'아웃라이어.. 어디서 들어봤더라.'
분명 스치듯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해준의 시냅스가 순간 번뜩였다.
'아, 그거였다. 어제 감독실 가기 전에 전력분석실에서 광녹이가 말해줬구나.'
기록의 통계치에서 다른 선수들과 차별화된, 통계로 설명할 수 없는 선수를 뜻하는 단어.
'주로 세이버 매트리션들이 쓴다고 했던가?'
하지만 오광녹에 따르면 분석의 허점을 덮기 위한 변명 같은 워딩이라는 평가. 아웃라이어라는 단어를 신랄하게 비판하던 전력분석원 오광녹의 말과 함께 어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거 아세요? 단어 선택이 마음에 안들지만... 현재 세이버의 관점으로 보면 형도 아웃라이어에요.
-내가?
-네. 음... 어딨더라. 아, 여깄네. 여기, 이것 좀 보세요.
-뭐야 이게. Defense difficulty table... 수비 난이도 테이블??
모니터 속에는 타구의 속도, 회전수, 공과 수비수와의 거리 등을 수치상으로 뽑아낸 뒤 특정 공식을 통해 타구 처리 난이도를 나타낸 표가 열려있었다.
-총 6개로 나뉘죠? 확률별로 구간을 나눈 건데... 봐야 할 건 이거. 마지막.
-캐치 확률 0%. 처리 불가능 타구. 이런 것도 있구나.
-네, 물리적으로 야수가 처리 불가능한 타구를 말하는 거예요. 백 퍼센트 안타, 혹은 홈런.
-...하지만 그게 말이 돼? 하다못해 홈런도 걷어내는 경우 종종 있잖아?
-음.. 이건 공식을 풀어서 설명해드려야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나눠놨다고 보시면 돼요. 설명하기엔 많이 복잡하니까.
-그런데 이거랑 내가 아웃라이어라는 말이 무슨 상관이야?
해준의 의문에 오광녹이 익숙하게 키보드를 조작했다. 데이터 테이블에 필터링이 걸리며 야수들의 기록이 새롭게 나타났다.
-여기 보세요. 지난 6년 간 처리 확률 0%로 분류된 타구들이 야수들에게 몇 번이나 발생했고 처리됐는지 정리된 표에요.
*데니스 멘케 [0/8]
*서재필 [0/38]
*전용진 [0/53]
*최우형 [0/11]
......
..
-죄다 0이네?
-왼쪽 숫자 0이 성공 횟수, 오른쪽이 기회 횟수에요. 그러니까 처리 확률 0% 타구로 불리는 거죠.. 그런데... 짠, 어때요.
-...어, 음.
이름순으로 나열돼있던 테이블이 이번에는 타구 처리 순으로 나열됐다. 모두가 0으로 도배된 테이블 최상단에는 떠오른 익숙한 이름.
*강해준 [10/50]
-지난 6년간 총 50회. 처리 확률 0%로 분류되는 타구가 형 쪽으로 향했고. 결과는 보시는 대로. 사실상 처리 불가능한 타구가 형 앞에서는 20% 확률로 처리되는 조금 어려운 난이도의 타구가 된 거죠.
-10번.
해준은 조금 놀라며 숫자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분명 오늘 경기에서 잡았던 타구도 스스로 탑 10에 꼽힐 만한 수비라 생각했다.
우연일까- 라고 생각하던 해준 앞에서 오광녹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네, 10번. 아마 메이저리그 쪽 세이버 매트리션들한테 보여주면 난리 나서 뒤집힐 거에요. 그럴 생각은 별로 없지만. 멍청하게 콧대만 높아서 자기들 틀린 것도 박박 우기는 놈들한테 이런 좋은 자료를 공짜로 내주고 싶지도 않고요.
'그때 광녹이가 말한 게 이거구나.'
인생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호수비.
그리고 눈앞에 떠올라 있는 횟수.
[아웃라이어 업적]
-통계상 처리 확률 0퍼센트, Impossible 타구 10회 처리.
해준은 자신의 행동이 무언가를 불러일으켰음을 깨달았다.
'뭐야, 판타지 소설이야?'
그렇다면 나쁘지 않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자신을 판타지 스타로 만들어준다면 해준은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어?'
그와 함께 고막을 가득 채우는 소란스러운 웅성거림. 그 사이를 뚫고 날카롭게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랑코! 전 타석에서 넘겨버린 게 공만은 아니었나 보지? 정신 차려! 타석에 들어서기 싫으면 말을 하라고."
"No. 칠 겁니다."
'방금 내가 말한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소름 끼칠 정도로 능숙한 영어였다. 조금 더듬은 감이 있긴 하지만 본래 한국적 느낌이 물씬 나는 영어 발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해준의 입에서 나왔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억양.
해준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몸은 다시 한번 제멋대로 움직여 배터박스에 들어섰다. 그와 함께 주변 광경이 다시 한번 회백색으로 물들며 눈앞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아웃라이어 링크 시스템 가이드]
*목표
-토니 디에고 블랑코의 더블A 시즌 마지막 안타를 기록하기.
-아웃라이어로서의 조건 달성하기.
*보상
-아웃라이어 토니 디에고 블랑코와의 고정 링크 생성
마치 게임 퀘스트 같은 광경. 그 덕분에 해준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곧바로 인지할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이 블랑코라는 양반 몸에 들어가 있는 거구나!'
안타라도 치면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세상은 다시 채색 빛을 되찾았고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Hey, buddy."
그때 포수 마스크를 쓴 남자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블랑코, 아니 해준을 불렀다.
"What's up, man."
자연스럽게 내뱉어지는 영어. 해준이 이제 메이저리그에 가도 영어는 문제없겠다는 망상을 하고 있을 때 록하운즈의 포수, 오스카가 말했다.
"우리 투수가 화가 좀 많이 났어. 네가 전 타석에서 후려갈겨 넘겨버린 패스트볼 있지? 그게 본인의 메이저리그행 티켓이라고 생각하거든. 망상이긴 하지만, 일단 본인 그렇다니 그렇다고 치자고."
'....와.'
랩퍼처럼 속사포 같이 쏘아진 말이었지만, 그것이 모두 이해가 된다. 그 느낌이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마냥 신기했지만 정작 말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했다. 해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해준의 되물음에 오스카가 슬쩍 자리를 옮기며 이번에는 짧게 입을 열었다.
"네 빌어먹을 asshole 조심하라고."
그 말에 해준은 자신도 모르게 평소대로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대놓고 데드볼 예고?'
타자에게 데드볼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것이지만, 해준에게는 타자로서의 인생을 잡아먹은 괴물 같은 것.
'하지만 안타를 쳐야하..... 온다!'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투수가 마운드를 박찬다. 여기까지는 항상 좋았다.
엉덩이 근육과 견갑골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멀어지다, 활처럼 휘어진 상체가 퉁겨진다. 그와 함께 투수의 손끝에서 출발하는 하얀 출발점. 그것은 곧 백색 궤적이 되어 그들 사이를 꿰뚫기 시작했다.
타자로서 해준의 문제점은 항상 이 부분에서 나타났다.
백색선소실증(白色線消失症).
프로 1년 차, 배트 플립으로 악의를 품은 정신 나간 용병에게 의도가 매우 분명한 헤드샷을 맞았다. 이후로 해준은 공이 그리는 궤적을 높은 확률로 잃어버렸다. 정신의학과 의사인 친척 형은 그것을 트라우마의 일종이라 설명했다.
'...무의식이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상황들은 모조리 눈앞에서 배제해버리는 거지. 일종의 현실 도피야.'
몸쪽 공일수록 그 빈도가 더했고, 냉정한 프로의 세계답게 약점을 간파당한 해준은 정신을 차려보니 프로야구판에서 전무후무한 호구가 되어버렸다.
해준에게 공을 던진 용병은 그 뒤로도 빈볼을 반복하다 퇴출당해버렸지만, 이미 현실은 돌이킬 수 없었다.
쉬이이이익-!
어마어마한 스핀과 함께 몸쪽을 향해 달려오는 공.
'...이런 제기랄, 진짜잖...어?'
그 순간 해준은 깨달았다.
'여전히 공이 보인다....고?'
오랜 세월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광경.
그 속에서 몸을 향해 달려들 것 같던 공이 살짝 꺾이며 몸 안쪽으로 휘감아져 들어갔다.
'이런 건 보통 이렇게...'
당황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해준은 놀랍도록 차분한 정신으로 대처했다.
탁-!
본능적으로 몸통에 팔이 달라붙은 채로 그대로 회전하는 허리. 해준은 배트 끝에서 느껴지는 타격감과 함께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공이 보인다!'
배트 끝에 정확히 걸린 공은 순식간에 내야를 벗어났고 급격히 하강을 시작했다.
'그리고... 안타다!'
해준은 순간 진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던 껍질이 바스슥- 깨져나가는 환청을 들은 것 같았다.
'6년 만이야...'
투쟁심에 가득한 투수의 얼굴, 마운드를 박차는 축발, 대포알처럼 쏘아지는, 궤적을 그리는 하얀 공.
'...그리고 그 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
지난 6년간, 누군가 금지라도 한 것처럼 허락되지 않던 장면이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행운에 자신의 감각과 기분이 날뛰는 것을 느끼며 해준은 천천히 1루 베이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턱-
발이 하얀 베이스를 밟았을 때.
"세이프-!"
[목표 달성 실패]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져 지며 생각과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뭐? 이건 안타라고. 분명 심판 콜도...'
급히 항변을 해보았지만, 다시 눈앞이 암전된다.
온몸을 휘감았던 해방적 감각이 사라지며, 해준은 모든 것이 되돌아가는 기분에 휩싸였다.
'...뭐야?'
그리고 다시 관중들이 만들어내는 웅성거림, 그 사이를 뚫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블랑코! 전 타석에서 넘겨버린 게 공만은 아니었나 보지? 정신 차려! 타석에 들어서기 싫으면 말을 하라고."
모든 것이 처음으로.... 시간이 되돌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