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장] 리버스 원(Reverse One) (2) >
상혁은 이 탱킹 포지션을 놈의 생명력이 5%대로 떨어질 때까지 유지할 생각이었다.
‘말도 안 되는 탱킹 + 역시나 말도 안 되는 딜링.’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상혁은 상식을 벗어난 활약이 가능해진다. 상식을 한참 벗어난 상혁이 얻게 될 공적 포인트는 그를 제외한 모든 유저들이 얻을 포인트를 다 합쳐도 전혀 따라올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상혁의 전생에 크라콘을 상대하다 죽은 90만 명가량의 유저 중 대략 50만 명이 크라콘의 생명력이 5% 밑으로 떨어진 후에 죽었다.
크라콘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결국은 ‘프로그래밍’된 몬스터였기 때문에 패턴과 페이즈가 존재했다.
놈의 생명력이 5%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놈은 말 그대로 ‘발악’을 시작하고 그 발악은 수십만의 유저를 지워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상혁은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한 준비도 미리 끝내놓은 상태였다.
탱커, 힐러, 딜러.
이건 레이드의 삼요소라고 할 수 있었다.
세부적으로 나누면 더 다양하게 나눌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유저들은 이 세 가지 역할 군 중 하나에 속해 있었다.
레이드라 불리는 대규모 합동 콘텐츠를 성공적으로 끝내려면 이 세 가지 역할군이 모두 제 몫을 해줘야 했는데 그 세 가지 요소에도 분명한 순서가 존재했다.
기본적으로 레이드를 시작하려면 안정적으로 ‘탱킹’이 되어야 했다. 탱킹이 되질 않으면 아예 정상적으로 레이드를 시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탱커를 몇 명을 동원하든지 일단 탱킹이 가능한 탱커진을 구성한 후 탱킹 메커니즘을 완성해야 했다.
그렇게 탱커가 구성되면 그다음으로 완성해야 할 것은 ‘힐링’이었다.
힐러도 탱킹과 마찬가지로 몇 명을 동원하든지 탱커를 죽이지 않고 팀원들 전체를 살릴 수 있을 정도로 구성한 후 힐링 매커니즘을 완성해야 했다.
딜러는 탱커과 힐러가 모든 매커니즘을 완성한 후 남는 자리에 들어가는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어그로’라는 아주 중요한 공략 요소 때문에 딜을 하면서도 늘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점 때문에 언뜻 보면 가장 쓸모가 없어 보이긴 했지만, 실제 공략에선 딜러들의 센스도 매우 중요했다. 딜링은 순수하게 개인의 센스가 가장 많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딜러들은 보통 VRA가 높고 감이 뛰어난 이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딜러가 가장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 이벤트에 모여든 인원 중 80% 이상의 유저가 모두 딜러였다.
이 얘긴 적어도 딜이 모자랄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상혁이 크라콘의 공격을 견디며 탱킹에 성공하는 순간 레이드의 삼요소 중 제일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탱킹’이 채워졌다.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두 번째 요소인 ‘힐링’도 채워졌고 딜링은 상혁이 어그로를 너무나 꽉 잡고 있어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빠르게 채워질 수가 있었다.
이렇게 크라콘 공략을 위한 탱커, 힐러, 딜러가 완벽하게 갖춰졌다. 일단 공략의 틀이 갖춰진 이상 이후에 남은 건 이 틀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상혁이 벌써 30분이 넘게 탱킹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힐링과 딜링도 자연스럽게 유지가 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크라콘의 광역 공격을 맞고 죽어 나가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적어도 개념과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은 광역 공격 정도에 당하진 않았다.
그사이 크라콘의 체력도 4% 정도 깎였다. 여전히 많은 생명력을 더 깎아야 했지만, 안정적인 탱킹과 힐링 덕분에 계속해서 딜러들이 더 이벤트에 참여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생명력이 깎이는 속도는 계속 빨라질 것 같았다.
가장 놀라운 건 역시 30분 동안 버티고 서서 탱킹을 하고 있는 상혁이었다.
힐러들은 일단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은색 마갑을 입고 요리조리 크라콘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면서 탱킹을 하는 유저에게 마구 힐을 쏟아붓고 있었다.
힐러들은 가장 확실히 공적 포인트를 얻는 방법이 메인 탱커이자 유일한 탱커 역할을 수행하는 검은 마갑을 입은 유저를 치료하는 것이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딜러들은 두말할 것 없이 딜을 잘 뽑아내는 게 중요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까진 이 모든 게 다 잘 이뤄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워낙 모든 게 안정적이라서 이대로라면 정말 이벤트 몬스터이자 견적이 절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크라콘을 잡는 건 시간문제일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어차피 그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이벤트에 참여하고 포인트를 따내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이런 대형 이벤트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단 건 대부분의 유저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판을 뒤집어야 합니다.]
급하게 모임이 소집되었고 모임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일곱 명의 대표들이 그들이 미리 마련해 놓았던 DN의 비밀회의실에 모였다.
그들이 모이자 모임을 소집한 검은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은 남자가 본론부터 꺼냈다.
[크라콘을 탱킹하고 있는 유저가 불멸이 확실하다면 판을 뒤집는 게 맞겠죠.]
붉은 별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이 모임은 대략 반년 전에 만들어졌다.
모임의 이름은 ‘리버스 원(Reverse One)’.
간단히 말해서 원 길드의 독주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초거대 동맹이었다.
[분석 결과 불멸이 거의 확실합니다. 다른 건 마갑을 입었다는 것 정도뿐인데······. 사실 불멸이 마갑을 만들었을 것이란 사실은 여기에 있는 분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검은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는 이미 확신을 하고 있었다. 확실한 근거가 있는 확신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죠. 원 길드에서 ‘사자왕의 분노’라는 어마어마한 물건을 팔아먹었는데 그런 걸 판다는 건 그것보다 더 좋은 마갑이 있다는 뜻이었겠죠. 그런데 저번 회의에서 적어도 우리는 그 경매에 입찰해서 가격을 올리는 행동 같은 건 말자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모두 약속을 지키신 거 맞습니까?]
검은 손이 새겨진 의자에 앉은 남자는 뭔가 불만이 한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얘길 했다. 이 방은 최고급 다중번역기능 옵션이 적용된 곳이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도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었다.
다만 미세한 감정 표현 같은 건 번역 과정에서 누락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같은 경우는 워낙 완곡한 표현이라 다들 남자가 화가 나 있는 상태란 걸 인지할 수 있었다.
[흠흠, 다들 약속을 지켰을 겁니다. 지금은 그걸 얘기하려고 모인 게 아니기도 하고 시간도 별로 없이 그건 나중에 따로 하도록 하죠.]
붉은 별이 새겨진 의자에 앉은 남자가 애써 대답을 했지만 사실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속 한구석이 찔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빨리 결정을 내릴수록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파이도 커질 겁니다.]
검은 용이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의 말대로 지금은 다른 얘길 할 여유가 없었다.
[근데 뭐 볼 게 있나요? 그냥 판을 뒤집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럴 땐 가장 심플하게 가는 게 좋은 겁니다. 불멸의 뒤통수를 쳐서 놈을 끌어내립시다.]
붉은 별이 새겨진 의자에 앉은 남자는 늘 그렇듯 단순무식하게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은 이게 그렇게 단순하게만 처리해서는 될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이번 이벤트에선 이득을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나중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불멸의 뒤통수를 쳐야 하는 건 맞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들이박을 순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각각 보유하고 있는 어둠 속의 칼을 활용하는 건 어떨까요? 솔직히 다들 암중에 갈고 있는 칼 한 자루씩은 있잖아요?]
지금까진 조용히 얘기만 듣고 있던 푸른 망치가 새겨진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이곳에 모인 일곱 명의 대표들은 종류는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저마다 어둠 속의 칼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게 가장 깔끔하긴 하겠군요.]
솔직히 비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어둠 속의 칼까지 꺼내야 하는 건 조금 아깝긴 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 이벤트마저 또 ‘원’ 길드에게 넘어가는 건 막을 생각이었다.
그들이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음에도 이렇게 하나의 모임을 만든 이유는 원 길드의 말도 안 되는 독주를 막기 위해서였다.
원 길드를 막는 동시에 원 길드가 차지하려던 몫을 일곱이 나눠서 가져간다. 이게 ‘리버스 원’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시간이 없으니 그럼 그렇게 진행하는 거로 하고 나머진 게임 속에서 얘길 계속 이어가도록 하죠. 예외는 없습니다. 이곳에 모인 분들은 모두 최소한 한 자루 이상의 칼을 내놓으셔야 합니다. 그 칼로 불멸을 쳐서 놈을 무너트린 후 그 뒤는 우리가 이벤트를 이어받아서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신만만한 리버스 원의 행보.
그들은 불멸을 무너트리는 건 물론이고 불멸이 무너지면 크라콘 사냥을 자신들이 이어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엄청난 자금을 현실과 게임 속에서 가리지 않고 투자한 끝에 원 길드의 실체를 누구보다 제대로 파악한 리버스 원이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여전히 놓치고 있었다.
대체할 수 없는 불멸의 능력······. ‘유저’의 한계 따윈 훌훌 벗어버린 불멸의 능력을 그들은 여전히 ‘유저’의 개념에서 재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죽어도 불멸의 실체를 정확하기 파악할 수가 없었다.
* * * *
‘크라콘을 탱킹하고 있는 유저를 죽여라!’
이것은 수많은 악인 유저들에게 전달된 지령이었다.
모두 제각각 줄을 대고 있는 높은 곳에서 전달된 지령이었기 때문에 악인 유저들은 지령을 듣는 즉시 이벤트가 열린 튠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은 이벤트에 참여할 수도 없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불멸을 공격하면 악인 유저들이 단체로 깽판을 치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악인 유저들 뒤에 누가 있다곤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악인 유저들 입장에선 이 지령은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었다.
상대는 지금 감당하기 힘든 존재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선 슬쩍 균형만 흐트러트려도 급속도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골수 악인 유저들에게 이런 건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들이 늘 하던 일들이 이런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7개 세력에서 보낸 악인들은 총 58명이었다.
언뜻 보면 숫자가 별로 안 많아 보이지만 58명 모두 50레벨을 넘은 악인 유저들 중에선 거의 최상위권 유저들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심지어 어느 선까진 협력하기로 모두 합의를 끝냈다.
58명의 악인 유저들은 정체를 숨기고 은밀하게 튠으로 이동했다. 지금 튠은 도시 전체가 박살이 나고 수많은 유저들이 마구 죽어 나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튠에 있는 모든 유저가 이벤트에 정신이 완전히 팔린 상태였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악인 유저들의 움직임을 눈치채질 못했다.
덕분에 악인 유저들은 너무나 쉽게 목표를 향해 접근할 수가 있었다.
악인 유저들은 전부 기본적으로 몸을 숨기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악인 유저들은 자신이 악인이란 게 발각되면 귀찮은 일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걸 숨기는 능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악인 유저들은 혼란을 틈타 최대한 목표인 불멸이 있는 곳까지 접근했다.
그 와중에 크라콘의 말도 안 되는 광역 공격에 7명의 악인 유저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예상한 피해였다.
남은 51명의 악인 유저들은 동시에 불멸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시에 불멸의 뒤를 치면 제아무리 불멸이라고 해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설사 자신들의 공격을 막거나 피한다고 해도 그 때문에 안정적으로 이어오던 크라콘의 탱킹을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거면 되었다.
탱킹이 깨진다는 건 곧 불멸이 크라콘한테 죽을 것이란 뜻이었다.
어떤 식으로라도 탱킹이 깨지면 지금의 안정적인 레이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리버스 원이 원했던 대로 판이 뒤집히는 것이었다.
악인 유저들은 미리 약속했던 수신호로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신호를 이용해 습격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다.
···5, 4, 3, 2, 1, 지금!
악인 유저들의 수신호가 하나로 일치되는 순간 51명의 악인 유저가 불멸을 향해 뛰쳐나갔다.
< [65장] 리버스 원(Reverse One)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