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장] 천하제일투(天下第一鬪) (1) >
@ 천하제일투(天下第一鬪).
“내가 어지간해선 잘 놀라는 성격이 아닌데······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 질풍과 불멸. 어떻게 이 두 신분을 같이 유지한 거야? 진짜 신기하다.”
상혁은 전화로 얘길 하려고 했지만 이미래는 얘길 듣자마자 당장에 달려왔다. 그녀로선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그냥 간단하게 전화 통화만으로 얘기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이건 누나랑 CP님만 알고 계시는 비밀인 거예요.”
상혁은 질풍의 진짜 얼굴을 본 유일한 두 사람인 이미래 PD와 김운호 CP에게만 질풍과 불멸이 동일인물이라고 밝혔다. 어차피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밝히고 두 사람에게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CP님도 이런 걸 얘기하고 다니실 분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근데 이게 굳이 숨길 일인가? 오히려 밝히면 완전 대박일 거 같은데.”
“저도 뭐 큰 이유가 있어서 숨기는건 아닌데······ 그렇다고 굳이 밝힐 이유도 없잖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밝혀지기 전까진 비밀로 해줘요.”
“그래, 알았어. 근데 천하제일투에 나갈 생각이었으면 미리 말해주지. 그럼 내가 나서서 본선 시드까지 깔끔하게 확보해줬을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오프라인 예선 대회에서 우승하며 본선 시드권을 확보했잖아요.”
“하긴 생각해보면 그쪽이 더 멋지긴 하네.”
이미래는 진심으로 상혁을 응원해주었다. 그녀는 상혁의 전담 PD로 일하면서 솔직하게 상혁이 동생이 아닌 남자로 보였었다.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미래는 상혁에게 아주 성숙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나이도 어리고 업무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라 차마 들이대진 못했지만 분명 상혁은 매력이 넘치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더욱 응원해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우승은 불멸이란 말이 요즘 유행이라는데······ 자신 있는 거야?”
이미래는 자신이 사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인터넷을 살피고 있던 상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요. 사실 자신이 없어요.”
“뭐야? 천하의 불멸이 왜 이렇게 약한 말을 해.”
“아, 한국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게 아니라 질 자신이 없단 뜻이에요.”
상혁은 가볍게 농담까지 하며 웃었다.
“캬, 역시! 이래야 너답지.”
이미래는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워했다. 김종우 PD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해서 질풍을 통해 불멸의 숨겨진 비밀 같은 걸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때마다 알겠다고 얘기만 하고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비록 김종우 PD는 그녀에겐 직장 상사이긴 했지만, 직속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업무적으로 연관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부탁을 들어줄 필요성을 느끼진 못했다.
* * * *
본선 경기는 일주일 후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원래 상혁은 증명의 길은 물론이고 그림자 숲까지 출전할 예정이었지만 예선전부터 너무 크게 관심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림자 숲 출전은 포기했다.
솔직히 그림자 숲도 출전만 하면 모조리 씹어먹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부터 너무 확 튀어버리면 귀찮은 일이 많이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 차원에서 출전을 포기한 것이었다.
덕분에 상혁은 더욱 여유로워졌다. 본선은 32강전부터 시작되긴 했지만, 상혁은 오로지 네 명만 받을 수 있는 본선 시드까지 받아서 8강에 직행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처음부터 경기에 참여할 필요도 없었다.
일단 상혁은 남는 시간엔 히드라 공략을 준비했다.
그는 천하제일투가 끝나면 바로 히드라부터 사냥해버릴 생각이었다.
평온한 시간이 흘러갔다.
그 사이 상혁은 라이브 채널 원의 방송을 통해 원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불멸이 천하제일투에 나간다는 발표를 했다.
이건 김종우와 사전에 말을 맞춘 것이었다. 이렇게 해주는 대신 상혁은 대회 하이라이트 영상을 전부 받아서 라이브 채널 원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은 금방 흘러갔고 상혁은 히드라 공략 준비를 끝내는 것과 동시에 본선 출전 준비도 모두 끝냈다.
이제 남은 건 LGN 본사에서 일주일 내내 매일 같이 열리는 본선 경기를 계속 치르는 것뿐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에겐 LGN이 숙소를 제공해줬지만, 상혁은 자신의 집에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숙소가 필요 없었다.
기념촬영이나 공식 인터뷰 때문에 개막전에 찾아오긴 했지만, 오늘 간단히 기념촬영이나 조 추첨식 그리고 공식 인터뷰를 끝내면 8강전이 열리게 될 나흘 뒤에나 다시 오면 되었다.
그때까진 그냥 집에서 생방송을 통해 지켜보는 게 더 편했다. 물론 LGN에선 가능하면 자신들이 준비한 VIP 방청석에서 다른 참가자들의 경기를 지켜봐 주길 원했지만, 상혁은 그들의 부탁을 정중히 거절했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해줄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관심이 많아져서인지 몰라도 조 추첨식은 생각보다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상혁, 아니 불멸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 그는 이보다 더 화려한 조 추첨식도 참가해본 경험이 있었다. 비록 그땐 선수가 아니라 감독이긴 했지만 어쨌든 전생의 기억 덕분에 긴장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멸은 조 추첨식보단 다른 쪽에 관심이 있었다. 불멸은 본선 참가자를 한 명씩 차분히 둘러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나중에 프로게이머가 되어 활동하게 될 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진 정식으로 리그 같은 게 생긴 건 아니라서 EL 프로게이머의 개념도 확립되지 않긴 했다.
하지만 대회에는 일단 미래의 프로게이머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다수 대회에 참여한 상태였다.
‘이번 대회에 참여한 유저 중 절반 이상이 1세대 EL 프로게이머가 되는 건가? 이 대회가 성공한 확실한 이유가 있었구나.’
불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전생에 1회 천하제일투가 대성공했었던 이유를 확실히 깨달았다.
‘그나저나 저 녀석 왜 이렇게 계속 쳐다보나 했더니······ 계백이었잖아.’
상혁은 사회자가 검투의 전당 최상위 랭커이자 강력한 우승 후보인 플레이어 ‘계백’이라고 그를 소개해준 덕분에 그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불멸은 지금도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계백을 향해 가볍게 눈인사를 해주었다. 조 추첨장에 왔을 때부터 유독 자신을 자주 쳐다봐서 왜 그런가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계백은 불멸이 자신을 알아봐 주자 그때야 뭔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밝게 웃었다.
‘조 추첨식이 끝나면 커피라도 한 잔 해야겠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계백이라면 만나는 게 별로 부담이 되질 않았다.
어쨌든 사회자의 소개를 계속되었고 당연히 불멸도 소개되었다. 온갖 미사여구가 붙으며 최강의 플레이어라고 소개된 불멸.
그가 소개되는 순간 방청석에선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말 그대로 우승 후보 0순위이자 현재 가장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함성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이제 겨우 조 추첨식인데······ 정말 높은 관심이라 할 수 있었다.
조 추첨식이 끝난 후 개별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그전에 불멸은 LGN의 온갖 관계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조금 귀찮긴 했지만, 어차피 악수만 한 번 하고 얼굴도장 정도만 살짝 찍는 정도였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더욱이 아예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관계자 중엔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캐스터 전용민이나 아직은 초보 해설자지만 훗날 EL 최고의 전문 해설가라 불릴 장민호는 전생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과는 가끔 같이 술도 마시며 이런저런 개인적인 얘기까지 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더욱 반가웠다.
물론 현생에선 오늘 처음 본 사이였지만 적어도 불멸에겐 친근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다른 방문자들과 다르게 두 사람은 상당히 친절하게 대했다.
여러 사람의 방문과 인터뷰까지 몇 시간을 시달린 끝에 공식 일정이 모두 끝났다.
공식 일정이 끝나자 불멸은 먼저 계백을 찾아갔다.
계백도 마침 불멸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금방 만날 수가 있었다.
“와, 여기서 불멸님을 만날 줄 몰랐네요. 전 솔직히 불멸님이 아니라 독고불패님이 참여했을 것 같아서 열심히 찾았었는데······. 독고불패님은 참여하지 않으신 건가요?”
계백은 진심으로 반가워하며 물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오프라인 대회는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도 자세한 건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군요. 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시간이 되시면 커피라도 한 잔 하시죠.”
불멸은 계백과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갔다.
계백의 본명은 유대훈이었다. 대훈이 본명을 말해주자 불멸도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마침 나이도 동갑이었기 때문에 더 편하게 얘길 주고받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서로 존댓말을 쓰며 조심하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게임 속에서 쌓은 유대감 덕분에 생각보단 더 친밀하게 얘길 할 수 있었다.
주로 유대훈이 얘기하고 상혁은 들어주는 쪽이었지만 유대훈이 워낙 얘길 재미있게 해서 대화는 지루하지 않게 계속 이어졌다.
원래 상혁은 가볍게 커피나 한 잔 마시고 헤어질 생각이었었는데 대훈과 즐겁게 얘길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버려서 저녁까지 같이 먹게 되었다.
유대훈의 페이스에 휩쓸려 이렇게 된 것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혁이 불쾌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상혁은 기분이 좋았다.
결국, 상혁은 유대훈과 저녁을 먹은 후 새벽까지 같이 술을 마셨다. 그리곤 거의 아침이 다 되어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서로 말은 굉장히 편하게 하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으음······.”
아침에 대리기사를 불러서 집에 돌아온 상혁은 거의 10시간을 내리 잔 후 간신히 일어났다.
오랜만에 너무 술을 많이 먹어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긴 했지만,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친구라······.’
침대에 걸터앉은 상혁은 어젯밤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전생에서 현생으로 회귀한 후 상혁의 인생은 주로 게임 속에만 묶여 있었다.
물론 그게 안 좋았었거나 혹은 불만이 있던 건 아니었다. 게임 속에서도 매우 즐거웠다. 하지만 어제 현실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신창이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며 놀며 느낀 건 즐거움은 게임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젠 친구가 된 유대훈은 어제 상혁에게 ‘세상은 넓고 즐길 것은 많다.’라는 말을 해주었었다.
그 말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상혁의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차분히 하나씩······ 즐거움을 찾아보자.’
상혁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지금도 해야 할 일과 즐겨야 할 것들은 넘쳐났다. 특히 아직 상혁은 게임 속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다.
전생엔 그렇게도 부족하게만 느껴지던 시간도 현생에선 풍족하게 느껴졌다.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상혁.
그에겐 여유가 넘쳐날 수밖에 없었다.
* * * *
1회 천하제일투는 생각보다 더 큰 인기를 얻으며 시청자들을 계속 끌어모았다.
전 세계의 팬들은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천하제일투를 시청했고 실시간으로 열광까지 해주었다.
32강전과 16강전을 거치며 8명의 유저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8명의 유저들은 다시 진짜 8강전을 치르기 위해 네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고 결국 본선 시드를 받은 4명과 싸울 4명의 유저가 결정되었다.
여기까지 딱 나흘이 걸렸다.
이젠 8강전과 4강전이 이틀 동안 연달아 펼쳐진 후 그로부터 이틀 후 결승전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상당히 빡빡한 일정이긴 했지만, 대회가 이렇게까지 인기를 끌 것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미리 잡아놓은 일정이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대신 LGN은 화끈한 온라인 이벤트를 열어서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달궈주었다.
그리고 이런 뜨거운 분위기를 단번에 폭발시켜줄 대결이 8강전 첫 경기로 결정되었다.
최강의 유저 불멸과 중국의 일인자 샤오팽의 대결.
당연히 이 경기는 8강 경기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맞대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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