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장] 불멸, 등장! (1) >
@ 불멸, 등장!
나무나 바위 같은 것도 없이 곧게 뻗은 길.
그나마 지형지물이라고 있는 건 허물어진 벽 몇 개가 전부였다.
흔히 유저들이 ‘고속도로’라 부르는 이 환경은 증명의 길에서 가장 화끈한 대결을 펼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 환경은 주로 근접전을 좋아하는 유저들이 선호하는 환경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며 치고 빠지는 전술이나 원거리 타격 전설을 선호하는 유저들에겐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최상열에게 이 환경이 등장한 건 매우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사실 최상열은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전생에 최상열이 최강이라 불렸던 이유는 단지 상혁이 천룡패법이란 최고의 능력을 전수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천룡패법은 천하에 둘도 없는 신검(神劍)이었고 최상열은 그 신검을 이용해 천하제일의 자리에 오를만한 능력을 지닌 최고의 무인(武人)이었다.
즉, 그는 천룡패법이 없어도 충분히 강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실제로 그는 천룡패법을 배우지 않았을 때도 프로게이머 랭킹 10위권 안에 들어가던 인물이었다.
최고 전성기 때는 3대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흥미로운 건 그가 특별한 고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진 않다는 점이었다.
일단 최상열은 더블 소울 유저였는대 보유한 고대의 지식은 ‘바람의 더블 소드(Double Sword)’와 ‘폭풍체술(暴風體術)’이었다.
바람의 더블 소드는 두 자루의 검(쌍검)을 주력 무기로 사용하는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기 있는 고대의 지식이었고 폭풍체술은 많은 이들이 선호하진 않았지만, 근접 전투에서 아주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고대의 지식이었다.
최상열은 상혁을 만나 다시 아예 새로운 유저로 다시 태어나기 전까진 계속 이 두 가지 고대의 지식 조합만으로 활약했었다.
이 두 고대의 지식이 조합되어 탄생한 직업 이름은 ‘블레이드 크러쉬(Blade Crush)'.
최상열은 자신의 직업 이름처럼 상대를 확실하게 으스러트려서 제압하는 강력한 전투능력이 지니고 있었다.
이런 최상열에게 장애물이 거의 없는 고속도로는 최고의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 * * *
최상열은 경기가 시작되자 앞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날씨도 좋고, 길도 뻥 뚫리고······ 이보다 좋을 수가 없겠네.”
최상열은 지금 환경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암살자 유저라······. 기록을 보니까 한 방이 있긴 한 거 같던데 결국 그 한 방밖에 없는 유저겠지?’
예선전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상대의 기록을 구할 순 없었다. 다만 평소에 친분이 좀 있었던 LGN의 직원이간단하게나마 쪽지를 전해줘서 대충이라도 상대가 어떤 유저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반칙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최상열은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 최대한 승률을 올려놓고 싸우는 걸 좋아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거리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최대한 조심해야겠다.’
최상열은 몸에 폭풍의 장막을 한계까지 중첩해서 두르며 암습에 대비했다. 폭풍의 장막은 최대 4 중첩까지 두를 수가 있었는데 1 중첩마다 자신의 공격력이 20% 감소하는 페널티를 지니고 있었다. 4 중첩을 모두 두르면 공격력이 무려 80%나 감소했다.
대신 4 중첩을 모두 했을 때 최대 생명력의 80%와 같은 쉴드량을 지닌 아주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치명타 확률을 88%나 낮추고 데미지를 40%나 감소시켰다.
한 마디로 자신의 공격력을 확 깎아서 방어력을 극대화 시키는 보호막이란 뜻이었다.
다만 비전투시에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라 전투 중에 다시 중첩을 보충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이 기술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굉장한 위력을 발휘하는 기술이었다.
만약 최상열이 상대에 대해 모르는 상태였다면 기껏해야 1 중첩만 유지했겠지만,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이상 4 중첩을 계속 유지하면서 상대의 기습을 유도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면······ 넌 죽는다.’
최상열은 자신의 몸을 미끼로 던지고 낚시를 시작했다.
그의 이런 낚시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알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 그 사실이 완벽해 보였던 그의 낚시를 처참하게 망가트렸다.
세상에 그 누구보다 최상열을 잘 알고 있는 남자.
상혁은 최상열이 어떤 식으로 플레이할지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아직 폭풍의 벽까진 배우지 않았을 테니 폭풍의 장막을 4 중첩까지 두르고 내가 암습을 하길 기다리고 있겠지?’
상혁은 최상열이 어떤 스킬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생의 상혁은 최상열이란 인간을 완벽하게 개조해주면서 그의 모든 걸 철저히 분석했었다. 그렇기에 최상열의 반응을 예측하는 건 너무나 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일반적인 파훼법은 견제 공격으로 폭풍의 장막을 모두 벗겨내고 본격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겠지?’
폭풍의 장막이 4 중첩이 되어 있단 얘긴 견제 공격 4번만 적중키면 장막을 모두 벗겨낼 수 있단 뜻이었다.
어차피 장막은 공격 횟수 1회만 막아주었기 때문에 이게 제일 좋았다.
하지만 상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끼를 물면 역으로 잡아먹겠다고? 그래, 그 미끼······ 내가 물어줄게.’
상대가 강력한 방패를 앞에 세우고 잔뜩 웅크리고 있었지만, 상혁은 별로 신경 쓰질 않았다.
‘그 방패를 통째로 쪼개주마!’
상혁은 보통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방법을 선택했다.
방패를 포함해 통째로 상대를 쪼개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파괴적이면서 시원한 복수 방법이었다.
최상열은 미끼 역할을 자처했기 때문에 너무나 훤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 상혁을 찾고 있긴 했지만 적극적이진 않았다.
이건 말 그대로 자신을 공격해 달라는 행동이었다.
상혁은 멀찍이 떨어져서 최상열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어차피 최상열은 공격당하길 원했기 때문에 이렇게 기다려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상혁은 그림자 왕의 대검을 들고 조용히 힘을 집중하고 있었다. 강력한 방패를 들고 자신만만하게 함정을 판 최상열과 그 함정을 통째로 박살 내려는 상혁.
전혀 상반된 둘의 의도는 이제 곧 격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튀어나올 때가 되었는데?’
최상열은 다시 한 번 주변을 살피며 계속 폭풍의 장막 중첩 유지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유지 시간은 10분. 이 정도라면 충분했다.
그는 폭풍의 장막만 4 중첩이 유지되고 있으면 그 어떤 암습이라고 해도 무조건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다리기 지겨우니 어서 물어라.’
최상열은 너무 티가 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살짝 방어 태세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 정도라면 상대가 무조건 치고 들어오리라 판단했다.
‘이래도 안 치고 들어오면 진짜 병신이거나 혹은 조심병 환자인데······.’
최상열은 충분히 기회를 줬는데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병신이라면 상관이 별로 없었는데 조심병 환자라면 약간은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조금 더 틈을 만들어주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한쪽 구석의 어둠이 갈라졌다.
‘온다!’
바로 그 순간 최상열도 두 자루의 검을 열십자(十)로 교차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폭풍의 장막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멍하니 서서 공격을 맞을 순 없었기 때문에 ‘바람의 더블 소드’를 통해 얻은 영혼 스킬인 ‘교차 막기’를 이용해 최대한 방어력을 끌어올렸다.
어둠이 갈라지며 튀어나온 검은 섬광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갈랐지만 이미 암습에 대비하고 있던 최상열의 방어 태세가 아주 아슬아슬하게 먼저 발동이 되었다.
쩌어어어어어엉!
검은 섬광은 곧장 최상열의 몸에 적중되었다. 정확히는 폭풍의 장막을 두르고 방어 태세를 갖춘 최상열의 몸에 적중되었다.
네 겹으로 두른 폭풍의 장막은 공격의 위력을 현저히 낮춰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교차 막기까지 사용한 상태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현재 최상열은 거의 반쯤 무적인 상태였다.
사실상 이 정도로 데미지를 감소시키며 암습에 대비를 했는데 공격을 못 막는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암습이라고 해도 보호막을 전부 날려버리는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야 하는 게 맞았다.
적어도 최상열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치명타는 터지지 않았다. 그리고 데미지 감소도 제대로 이뤄졌다. 심지어 방어 태세도 완벽했다.
그런데······.
막상 맞아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이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콰과과과과! 드드드득!
보호막이 한순간에 날았다. 이건 뭐 반응을 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서 그냥 검은 섬광에 적중당하는 순간 마치 순식간에 옷이 전부 벗겨지는 것처럼 날아가 버렸다.
“헉!”
순간 최상열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치명타가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이게 끝이 아니란 점이었다.
콰드득, 콰과과광!
열십자로 교차하여 방어 태세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던 두 자루의 단검이 뒤로 튕겨 날아갔다. 그리곤······ 무지막지한 데미지가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도, 도대체······.’
그 순간 최상열의 머릿속엔 ‘왜?’란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의문을 떠올렸을 땐 이미 늦은 상태였다.
검은 섬광은 모든 걸 집어삼키며 최상열의 생명력의 절반을 한순간에 날려버렸다.
당연히 생명력의 절반이 한순간에 날아가자 순간적으로 쇼크 상태가 되면 상태 이상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 상혁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림자 왕의 대검을 빠르게 세 번 휘둘렀다.
이건 아주 오래전 상혁이 배웠던 고대의 지식 기사(나이트)의 영혼 스킬인 ‘하급 삼단 베기’와 비슷한 동작이었다. 물론 지금은 고대의 지식이 섀도우 나이트로 바뀌며 삭제된 영혼 스킬이었지만 상혁은 그냥 몸이 기억하는 대로 그 스킬을 비슷하게 재현해 냈다.
스킬도 아니었고 빠르고 간결한 동작으로 뿌린 세 번의 공격이라 위력 자체는 별로 없었지만, 그 세 번의 칼질로 세 겹의 장막을 가볍게 벗겨냈다.
이 세 번의 칼질에 상혁이 소모한 시간은 불과 1.5초 정도밖에 되질 않았다.
하지만 최상열의 기절 지속 시간은 1.7초였기 때문에 세 번의 칼질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최상열이 기절 상태에서 회복했다.
‘위험하다!’
최상열은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절 상태가 끝나는 순간 곧장 폭풍질주를 거꾸로 사용해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타탁, 파파파파팟!
기절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상열이 뒤쪽으로 10m 정도를 확 물러났다. 재사용대기시간도 10초밖에 되지 않고 이동 거리도 꽤 멀면서 심지어 이동속도로 빠른 폭풍질주는 최상열이 폭풍체술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일까? 최상열은 이 폭풍질주 덕분에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빠르게 상혁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최상열.
그는 일단 이렇게 숨을 돌린 후 다음 행동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딱 여기까지만 가능했다.
푸욱!
“컥!”
그의 복부를 파고든 그림자 왕의 대검.
놀랍게도 상혁은 최상열보다 더 먼저 최상열이 이동하려고 했던 지점에 나타나 있었고 최상열은 마치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상혁을 향해 돌진했다.
폭풍질주는 발동되면 중간에 멈출 수가 없는 이동기술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최상열은 상혁이 블링크라는 어마어마한 이동기술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상혁이 자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예측할 것이라곤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었다.
덕분에 그는 회피는 고사하고 방어도 제대로 못 한 상태로 다시 한 번 강력한 공격을 허용했다.
이번엔 최대 생명력의 30% 정도가 또 날아갔다.
물론 아직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딱 쓰러질 정도만 아니었을 뿐이었다. 50%의 생명력이 한 방에 날아가고 추가로 다시 30% 정도의 생명력이 날아갔다.
연달아 터진 강력한 두 번의 충격은 최상열의 육체에 다시 한 번 경직시켰다.
애초에 PvP에서 이런 강력한 공격을 허용하면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상열은 어떻게 해서라도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부여잡고 버텨보려고 했지만 단, 0.5초 경직 상태도 그에겐 너무나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휘이잉, 서걱! 콰드드득!
상혁은 최상열의 복부에 꽂아놓은 그림자 왕의 대검은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허리춤에 꽂혀 있던 보조무기인 트윈문 블레이드를 뽑으며 몸을 빠르게 돌렸다. 그 순간 최상열의 목이 날아가며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동작은 마치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첫 번째 죽음은 이걸로 끝이었다. 최상열은 곧장 안전지대에서 부활하긴 하겠지만······ 첫 번째 죽음 자체가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이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혁은 최상열과 충돌한 지 불과 5초 정도 만에 싸움을 끝냈다. 그것도 너무나 깔끔하게.
그리고 그와 함께 상혁의 모습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원 길드의 길드마스터 ‘불멸’.
그가 이번 대회의 우승 후보 0순위인 크래쉬 최상열을 박살 내며 화려하게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몇몇 사람들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
< [58장] 불멸, 등장!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