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장] 라그나 블레이드 (2) >
이번엔 돈도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타미아를 전쟁 요새 밖으로 불러낼 방법은 떠오르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가 혼자가 되는 타이밍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상혁은 계속 방법을 찾고 또 찾았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꼬박 하루를 고민한 끝에 상혁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해답을 찾았다.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접근.
하지만 결국 그가 가진 강력한 최초의 한 방을 사용해야 하는 건 똑같았다. 거기다 이번엔 은신을 활용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물론 은신을 하지 않아도 최초의 한 방 뻥튀기는 그대로였다. 다만 기습의 이점이 사라져 치명타 확률이 조금 내려가겠지만 그건 별로 상관이 없었다.
사실 상혁이 마음만 먹는다면 은신을 통해 기습할 때보다 그냥 정면 대결을 할 때 더 강력한 최초의 한 방을 먹일 수도 있었다.
사실 앞서 세 사람을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있을 때 기습을 해 제압을 한 건 귀찮은 일과 변수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였다.
모름지기 이런 중요한 퀘스트는 소문이 나지 않게 은밀히 처리하는 게 최고였다. 아직 전쟁 요새까지 진출한 유저들은 없었지만 그래도 보는 눈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다.
심지어 NPC들은 자신이 본 것들을 소문까지 냈었다.
그렇기에 무조건 은밀하고 조용히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은밀하고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상혁은 은밀하고 조용한 건 포기했다. 타미아를 상대하면서 그걸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작정이었다.
‘나무는 역시 숲에 숨기는 게 제일인 법!’
발상의 전환. 상혁은 아예 모든 걸 뒤집었다.
그는 오히려 말도 안 될 만큼 화끈해서 유저의 짓이 아닌 NPC들끼리의 이벤트로 믿게 할 생각이었다.
나무를 숲에 숨기듯, 상혁은 자신이 유저라는 사실을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의 전투에 숨길 작정이었다.
그걸 위해 상혁은 우선 전쟁 요새에서 유저들이 활동을 하는지부터 확실히 파악해보았다.
이번 계획에 유저가 휘말리면 골치가 아플 수가 있었다.
다행히 전쟁 요새에서 활동하려면 아무리 팀을 구성한다고 해도 최소 57~59레벨 수준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아무도 여기까지 진출하진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법.
간혹 레벨과 관계없이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유저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유저가 있는지 조사를 해야 했다.
조사 결과 유저는 없었다. 심지어 근처를 돌아다니는 유저조차 없었다. 아무래도 위치 자체가 영웅의 대지 최북단이었고 이곳으로 오는 길목에 수많은 고레벨 몬스터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여행자들도 아직 여기까진 오지 못한 것 같았다.
그리고 상혁이 파는 지도에도 이 전쟁 요새는 빠져 있었다. 상혁이 이쪽 콘텐츠를 먼저 독식하려고 일부러 빼놓은 것인데 그게 뜻밖에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리고 덤으로 NPC들이라고 해서 무작정 마졸들을 24시간 내내 마졸들과 싸우는 게 아니란 것도 알아냈다.
여기까지 정보를 알아낸 순간 상혁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대충 뼈대만 세웠던 계획을 확실하게 완성할 수가 있었다.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줄게.’
계획을 완성한 상혁은 전쟁 요새 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전쟁 요새 너머에 존재하는 마계의 틈을 바라보았다.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계획은 생각보다 훨씬 더 크고 화려했다.
* * * *
모든 준비를 끝나는데 정확히 하루가 걸렸다.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것들이라 크게 준비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다만 NPC들이 완전히 전장에서 철수하는 정확한 타이밍을 찾기 위해 하루를 꼬박 보낸 것뿐이었다.
마지막 점검까지 확실하게 끝낸 상혁은 곧바로 전쟁 요새로 향했다. 당연히 전쟁 요새는 유저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초의 차원여행자가 전쟁 요새에 들어서자 단번에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그래 봤자 특별 대우 같은 걸 해주진 않았다.
이곳은 하루에도 수백 명이 죽어 나가는 전장이었기 때문에 기껏 차원여행자 한 명 때문에 호들갑을 떠는 이들은 없었다.
그냥 관심 있게 지켜볼 뿐이었다.
상혁은 전쟁 요새의 기본 퀘스트인 ‘마계 침공 저지하기(무한 반복)’를 받았다. 이 퀘스트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 퀘스트를 받고 마계에서 넘어오는 잔당들을 해치우면 카운트가 올라갔는데 카운트를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푸른 늑대 전쟁 요새’의 평판을 올릴 수 있었다.
이 평판은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었는데 일단 평판을 올려서 전쟁 요새 병참 장교에게 평판 아이템을 구매할 수가 있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아이템들이 많았고 그걸 아주 싸게 팔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많은 유저가여기서 흔히 말하는 평판작업을 했었다. 그리고 평판이 오르면 푸른 늑대 전쟁 요새에 상주하는 NPC들과의 호감도도 상승했다.
적어도 전쟁 요새에서 활동할 것이라면 이 퀘스트는 늘 유지하면서 틈틈이 중간 보상을 계속 챙기는 게 이득이었다.
물론 상혁도 똑같은 이유 때문이 이 퀘스트를 받았다.
그는 이 퀘스트를 이용해 푸른 늑대 전쟁 요새의 평판을 올릴 생각이었다.
다만······ 다른 유저들과 확실히 다른 점이 있긴 했다.
‘이 퀘스트의 좋은 점은 카운팅이 한계가 없이 누적된다는 점이지. 덕분에 한껏 쌓아서 한 방에 보상을 몰아받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었어.’
상혁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슬쩍 웃었다.
그는 전생에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사냥을 했었다. 물론 이곳에서 열심히 사냥한 이유는 퀘스트의 중간 보상으로 계속 받을 수 있는 ‘푸른 늑대 훈장’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작업장에선 일꾼들이 열심히 모은 푸른 늑대 훈장을 비싼 값에 일반 유저들에게 팔았다. 결국, 돈이 되니까 사냥을 하게 한 것이었다.
마계 침공 저지하기 퀘스트를 받은 상혁은 곧장 전쟁 요새를 너머에 존재하는 전장으로 이동했다.
물론 NPC들은 그런 상혁을 보고만 있진 않았다.
“워워, 이봐. 혼자 어딜 가는 거야?”
전장으로 향하는 출입문을 지키고 있던 한 NPC 병사가 재빨리 상혁을 막았다.
“당연히 마졸들을 잡으러 가는 거죠.”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상혁. 병사는 그런 상혁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차원여행자인가 본데······ 아무리 불멸의 힘을 지녔다고 해도 굳이 개죽음을 당하러 나갈 필요는 없잖아. 특히 지금은 모든 기사단이 로밍하지 않는 ‘브레이크 타임’이야. 지금 혼자 나가면 무조건 죽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평범한 NPC 병사였지만 레벨은 무려 65였다. 즉, 그의 눈에 상혁은 자신보다 못한 하찮은 차원여행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개죽음이라고 해도 결국은 내가 죽는 거잖아요. 푸른 늑대 인장도 받았는데 막을 이유가 없잖아요?”
위에서 언급한 퀘스트를 받으면 같이 받을 수 있는 푸른 늑대 인장은 한마디로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상혁의 말대로 그 인장을 가지고 있는 이상 병사가 계속 상혁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쯧쯧, 꼭 직접 경험해야 깨닫는 녀석들이 있다니까.”
그는 상혁이 푸른 늑대 인장까지 언급하자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길을 열어주었다.
밖으로 나간 상혁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마계의 틈이 존재하는 이 전장은 상혁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서 타미아를 습격하고 싶었지만, 그녀 옆에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NPC 기사들이 존재하는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타미아를 상대하다가 그 기사들이 엮이고 결국 그 기사들이 죽거나 다치면 악행 수치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면 악인이 될 수도 있었고 지금 상황에서 악인이 되는 건 정말 최악이었다.
이런 이유로 상혁은 타미아 습격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지.’
완벽하게 어둠 속에 동화된 상혁은 계속 어둠 속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전쟁 요새 쪽은 브레이크 타임이었지만 마계의 틈에선 여전히 마졸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렇게 기어 올라온 마졸들은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고 다시 요새에서 나온 기사단이나 혹은 용병들에게 다음 브레이크 타임이 올 때까지 사냥당한다.
물론 마졸 쪽에서도 반항은 한다. 하지만 전쟁 요새 측은 마계의 틈에는 최대한 접근하지 않으면서 주변을 빙 둘러서 깔끔하게 마졸들을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마계의 틈 근처에 존재하는 다수의 정예 몬스터들은 전쟁 요새 쪽에서도 큰마음을 먹기 전엔 치워버리기가 쉽지 않은 녀석들이었다.
벌써 몇 년째 이런 소모전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이 판도가 바뀌려면 무조건 유저들이 전쟁 요새로 진출해야 했다.
그때부터 푸른 늑대 전쟁 요새를 지키는 4대 기사단도 적극적으로 마계의 틈 공략에 나서게 된다.
‘이게 원래 내가 알고 있는 시나리오고······ 아마 오늘 그 시나리오는 확 바뀌게 될 거야.’
상혁은 머릿속으로 전생의 생각을 하며 점점 더 마계의 틈 가까이 접근했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강하고 많은 마계의 권속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계의 틈 근처엔 거의 무슨 개미떼가 바글거리는 것처럼 많은 마졸이 존재했다.
‘이 정도라면 충분하겠군.’
마계의 틈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몰래 확인을 끝낸 상혁은 바로 뒤로 물러났다.
마계의 틈과 정확히 200m 정도 거리를 벌린 상혁은 적당한 거리라고 생각되자 바로 도핑을 시작했다.
그의 계획 자체는 너무나도 간단했지만, 그 간단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조합카드들을 이용해 강력한 강화 효과를 4개나 걸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흑염룡까지 깨웠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상혁은 고유 오라 크리스털 중 하나인 ‘황금 사자의 오라 크리스털’을 사용해 그림자 왕의 대검을 강화한 후 그냥 대놓고 ‘커져라!(S)’까지 사용했다.
츠츠츠츳!
상혁의 몸이 커지며 힘이 두 배가 되었다. 이 정도라면 거의 상혁이 할 수 있는 모든 도핑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혁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유일 등급 타이틀인 ‘한 방에 끝낸다’의 지속 효과 ‘끝판왕(S)’. 그는 총 네 마리의 평범한 마졸을 연달아서 한 방에 죽여버렸다. 다행히 한 방에 적을 죽이며 80% 확률로 은신이 유지되는 어둠의 축복이 계속 터져주며 은신은 풀리지 않았다. 당연히 풀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재수가 생각보다 좋았다. 덕분에 섀도우 블레이드의 데미지 10% 상승 버프도 또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은신 같은 건 풀려도 상관없었다.
이미 네 마리의 적을 한 방에 죽이며 공격력은 다시 또 40%가 증가한 상태였다.
이 강화 효과의 유지 시간은 겨우 10초. 그렇기에 이제부턴 모든 게 물이 흐르듯 단번에 이어져야 했다.
자신의 몸에 배수로 증가하는 모든 능력을 죄다 억지로 구겨 넣은 상혁은 전방을 바라보며 자신의 ‘적’을 인지했다.
그가 적으로 설정한 존재는 200m 전방에 존재하는 한 마리의 강력한 정예 몬스터.
추정 레벨은 대략 79.
비록 광휘의 사도들과 비교하면 수준이 떨어지는 녀석이었지만, 어차피 부족한 부분은 이미다른 것들로 충분히 채워 넣은 상태였다.
놈을 적으로 인지하고 목표로 삼는 순간 ‘무한도전(SS)’가 발동되며 상혁의 레벨을 67로 끌어올려 주었다.
‘무조건 터진다. 아니 터트린다!’
상혁이 원하는 건 당연히 라그나 블레이드였다.
그걸 위해 온갖 비싼 것들을 전부 사용해 몸에 배수의 뻥튀기를 구겨 넣은 것이었다.
공격력이 40% 상승하는 끝판왕(S) 버프는 이제 겨우 4초만 남은 상황! 상혁은 망설이지 않고 어둠을 박차고 나가며 다시 한 번 그림자 왕의 대검을 뽑았다.
그르르릉! 찌지지지지지직!
그 순간 상혁의 몸에서 수많은 배수로 뻥튀기된 어마어마한 힘이 그림자 왕의 대검에서 쏟아져 나왔다.
치명타는 당연히 터졌고 그 결과 모든 데미지가 배수에 배수로 계속 곱해져 나온 결괏값이 라그나 블레이드의 발동 조건을 훌쩍 뛰어넘었다.
모든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이벤트 스킬로 등록된 ‘라그나 블레이드’가 발동됩니다.
결국, 상혁은 자신이 원했던 대로 라그나 블레이드를 발동시켰다. 물론 라그나 블레이드는 상혁이 마구 남발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포킨을 쓰러트릴 땐 워낙 놀라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었는데 나중에 흥분이 가라앉은 후 확인을 해보니 라그나 블레이드를 발동시키며 활력은 최대 활력인 100%에서 70%가 소모되어 30%로 내려가 있었고 생명력도 100%에서 30%가 날아가 70%로 내려가 있었었다.
활력 70%와 생명력 30%를 소모해 발동시키는 라그나 블레이드. 사실 초월 스킬을 발동시키는 데 이 정도의 소모 값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었지만 어쨌든 상혁은 라그나 블레이드를 연속해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즉, 이 한 방으로 모든 걸 결정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상혁은 자신이 있었다.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라그나 블레이드라면······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마졸은 물론이고 치유할 수 없는 거대한 상처처럼 보이는 마계의 틈까지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아쉬운 건 그것들을 이렇게 한 방에 지워버려도 카르마는 물론이고 아이템까지 티끌만큼도 얻지 못한다는 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상혁이 원하는 건 자신이 받은 ‘마계 침공 저지하기’ 퀘스트의 ‘카운팅’이었다. 이미 포킨을 상대하며 다른 건 몰라도 퀘스트와 관련된 것은 정상적으로 업데이트 되는 것까지 확인했었다.
그렇기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라그나 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었다.
광휘의 기사 타미아.
그녀를 공략하기 위해 상혁이 선택한 방식은 정면이 아닌 측면이었다.
< [54장] 라그나 블레이드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