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장] 불가능은 없다 (2) >
@ 불가능은 없다.
플레임 이글은 특수 조합 마법이라 클래스를 따지는 게 무의미했지만, 굳이 따지고 든다면 5클래스 수준의 마법이었다. 이그레이가 5클래스 마법을 거의 즉시 시전 하듯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그가 허리에 차고 있던 전설 등급의 ‘레인보우 메모리즈’ 덕분이었다.
그 허리띠에는 6클래스 이하의 마법을 최대 7개까지 저장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저장된 마법은 아무 조건 없이 즉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이그레이는 비록 10년 전에 은퇴했지만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허리띠에 7개의 마법을 메모리즈 하는 습관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20년을 넘게 해왔던 일이라 은퇴 후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계속 이어왔던 일이었다.
그 습관이 이그레이에게 반격의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그레이는 NPC였지만 NPC도 유저와 똑같은 방식으로 힘을 얻었다. 즉. 그도 고대의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그레이가 지닌 고대의 지식인 ‘붉게 타오르는 별의 마법’과 ‘끝없이 타오르는 겁화의 씨앗’은 둘 다 강화된 고대의 지식이었기 때문에 놈의 마법은 평범한 화염 마법과 달랐다.
플레임 이글은 상혁을 집어삼킨 순간 더욱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끝없이 타오르는 겁화의 씨앗이 지니고 있던 ‘꺼지지 않는 불길’ 특성이 발휘된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상혁을 재로 만들 때까지 계속 타오를 것 같았다.
‘진짜 위험했다. 도대체 누가 암살자를 보낸 거야?’
이그레이는 순간적으로 정말 위험했었다고 느꼈다. 오래전 험하디험한 전장을 돌아다니며 만약을 위해 제작해 놓았던 ‘붉은 용의 숨결’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단의 일은 아닌 것 같고 설마 비선······.’
방심 같은 건 아니었다.
상혁이 끝없이 타오르는 ‘염(炎)의 구속’에 당했기 때문에 이그레이가 잠시 이번 습격의 원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여유가 누군가에겐 기회가 되었다.
푸욱!
“커어억!”
이그레이는 한 자루의 대검이 자신의 몸을 꿰뚫고 들어온 순간 재빨리 레인보우 메모리즈에 저장된 마법 중 하나인 화염전이(火焰轉移)와 불태워 치료하기를 연달아 사용했다.
화르르륵!
화염전이가 사용된 순간 이그레이의 몸이 화염에 휩싸이며 사라진 후 대략 10m 앞에 다시 화염과 함께 나타났다.
이 순간 그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한 것만 봐도 이그레이가 얼마나 대단한 워 메이지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쳇, 역시 부족해.’
이그레이의 몸을 대검으로 뚫어버린 이는 당연히 상혁이었다. 물론 여전히 플레임 이글이 집어삼킨 상혁(?)은 계속 불타고 있었다.
그 상혁은 정확히는 진짜 상혁이 순간적으로 사막의 그림자 공작 타이틀의 접두 효과로 만들어낸 허상(虛像)이었지만 어쨌든 이그레이는 그 허상이 상혁이라고 착각을 했고 그 결과 상혁은 은신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까지 풀어버릴 수 있었다.
덕분에 상혁은 다시 한 번 최초의 한 방을 날릴 기회를 얻었다. 다만 앞선 최초의 한 방에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강화 효과를 넣을 수 있던 것에 비해 지금은 단 하나의 강화 효과도 넣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그레이는 다시 한 번 치명타까지 터진 제대로 된 최초의 한 방을 맞았음에도 아슬아슬하게 마법을 발동시키며 상혁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크으윽.”
하지만 아예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그레이는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멀리 가질 못했다.
조금 전 한 방으로 이그레이가 잃은 생명력은 대략 40%. 아슬아슬하게 상태 이상이 되는 건 막을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그레이가 정상적인 상태인 건 절대 아니었다.
치이이이익.
그나마 불태워 치료하기 마법을 사용해 급한 대로 상처를 불로 지져버렸기 때문에 추가 피해가 발생하진 않았다.
그렇게 응급처치를 마친 이그레이는 말없이 상혁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 상혁과 이그레이의 호감도는 미친 듯이 하락을 해 거의 원수 수준까지 내려갔지만, 상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친해지길 포기한 상대였다.
상혁은 네 명의 사도와 인연이든 악연이든 일단 어떻게든 관계를 맺은 후 한쪽으로 확실히 밀어버릴 생각이었고 그 방향을 악연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평온했던 일상을 깨서 미안하긴 한데······. 나도 할 일이 워낙 많아서 이 방법밖에 없었다.”
상혁은 대검 집어넣고 만년금골편을 꺼내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이그레이를 향해 핑계 아닌 핑계를 대었다.
“미친놈.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아아, 한가롭게 대화를 하고 있을 땐 아니라서 전후 사정은 다 빼버렸어. 나라고 당신 같은 괴물에게 덤비고 싶었겠어? 사람은 다 나름대로 사정이란 게 있는 거야.”
상혁은 그 말을 끝내며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장의 강화용 조합카드를 자신의 몸에 박아넣었다.
푸욱,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상혁의 몸속에서 깨어나는 흑염룡(黑炎龍)!
전설 등급 NPC인 이그레이는 높은 레벨만큼이나 대단한 회복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가망이 없었다.
‘흑염룡이 힘을 빌려주는 동안 끝을 봐야 한다!’
상혁은 이그레이의 생명력이 대략 30~40% 정도 남아 있다고 예상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생명력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85레벨의 전설급 NPC라는 골 고려하면 전혀 낮은 생명력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상처를 입고 조금이라도 힘겨워할 때 전력을 다해 밀어붙여야 했다.
“건방진 놈! 기껏해야 이제야 겨우 이 땅에 들어온 차원여행자밖에 되지 않는 놈이 너무나도 까부는구나!”
이그레이는 당연히 상혁이 차원여행자라는 걸 알아보았다.
심지어 상혁의 레벨이 60도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아보았다. 그가 볼 때 상혁은 하룻강아지였다. 겁도 없이 산중대왕(山中大王)인 호랑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까불고 있는 하룻강아지······.
호랑이는 상처를 입어도 호랑이였고 하룻강아지는 설사 날개를 달고 있어도 결국은 강아지일 뿐이었다.
이그레이가 분노하자 그의 몸에서 붉은색 오라가 치솟았다. 나중에 유저들도 레벨이 70을 넘기고 강화 고대의 지식을 얻으면 저런 유형의 오라를 내뿜을 수 있었다.
상혁은 분노한 이그레이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사실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상혁에게 좋은 게 별로 없었다.
아무리 생명력을 60% 이상 깎아놨다고 해도 이그레이는 여전히 85레벨의 전설 등급 NPC의 강력한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혁이 지닌 가장 큰 무기인 최초의 한 방도 이젠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었다.
모든 지표가 ‘퀘스트 실패’를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런데 상혁은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 이래야 재미있지. 언제부터 내가 편하게 싸우는 걸 즐겼다고?”
상혁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양손을 들어 올렸다.
“어디 한 번 즐겨보자고.”
상혁은 또 웃었다. 그리곤 자신이 만약을 위해 준비해놓은 것을 발동시켰다.
고급 카드마법 비기(秘氣) ‘운명의 수레바퀴 – 폭우(暴雨)’ 발동!
번쩍! 번쩍! 여기저기에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이건 상혁도 정말 어지간해선 발동시키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걸 한 방 발동시키려면 돈이 최소 100만 골드 단위로 깨졌다.
말이 100만 골드지 현금으로 따지면 거의 5~6천만 원 정도의 돈이었다. 더 충격적인 건 그나마 결계의 범위를 최소화하고 유지 시간을 20분으로 고정했기 때문에 그 정도만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스킬 한 번에 그 정도의 돈이 들어간다는 건 정말 대단한 과소비였다. 거기다 그냥 발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미리 여러 가지를 준비해놔야 발동을 할 수 있었다.
돈도 많이 들고 발동 조건도 까다로운 ‘운명의 수레바퀴’.
하지만 일단 발동이 되기만 하면 그 위력은 확실했다.
돈값을 해야 한다고 할까? 어쨌든 운명의 수레바퀴는 수많은 종류가 존재했는데 상혁이 이번에 준비한 건 폭우였다.
쿠르르르릉. 콰과광! 쏴아아아아아아아!
바닥에서 치솟은 빛기둥들은 허공에서 서로 엮기며 아주 강력한 결계를 만들었다. 상혁이 미리 지정한 반경 100m 정도의 공간이 결계 안에 갇혔는데 놀랍게도 그 공간 안에는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결계가 호수의 기운을 흡수해 마력이 담긴 폭우를 결계 내부에 뿌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호수가 있는 곳이라 ‘인공 마정(魔情)’까진 사용하지 않아 100만 골드 수준으로 막을 수 있었다.
호수마저 없었다면 상혁은 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발동하기 위해 최소 150만 골드 이상을 날려버려야 했을지도 몰랐다.
치이이이이익.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가장 놀라운 건 발동 비용 같은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폭우는 언제까지고 계속 불탈 것 같았던 ‘염의 구속’을 순식간에 꺼버렸다.
“눈치는 챘겠지만, 이 비는 그냥 비가 아니야.”
상혁은 여전히 이그레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이그레이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모든 화염 속성의 위력을 70%나 감소시키는 이 결계 안에선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 마법이 강력해도 화염 마법으로 이 결계를 깨려면 최소 상급 8클래스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그레이는 한눈에 이 결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아보았다. 이그레이가 사용할 수 있는 화염 마법의 한계는 8클래스 초입. 당연히 이 결계를 깨는 건 불가능했다.
‘젠장 된통 걸렸군.’
이렇게 된 이상 화염 마법은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 물론 이그레이가 화염 마법만 사용할 줄 아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마법도 사용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 4클래스 정도가 한계였다.
이 결계 한 방으로 이그레이는 자신이 지닌 힘의 절반 이상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우길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전장의 도깨비불’이라고까지 불렸던 최고의 워 메이지였었다. 그런 그가 싸우는 걸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시간 가속 헤이스트! 힘의 전언 스트렝스!”
그는 기본적인 강화 마법을 몸에 걸며 자신의 품 안에서 두 자루의 단봉(短棒)을 꺼내 들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면 되었다. 비록 화염 마법은 강제로 봉인 당했지만, 그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전설 등급 NPC였다.
이그레이는 강했다. 하지만 사실상 양손(화염 마법)을 묶인 상태로 싸워야 했던 그는 흑염룡까지 깨운 상혁을 이기지 못했다.
초반엔 레벨 차이에서 오는 기본 능력치의 차이로 상혁을 찍어눌렀었지만, 상혁은 교묘하게 이그레이의 공격을 대부분 흘려버렸다.
상혁은 그냥 단순히 공격만 흘려버린 게 아니라 틈이 날 때마다 만년금골편의 ‘의외성’을 활용해 이그레이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만년금골편은 공격하는 상혁도 예상하기 힘들 정도로 불규칙한 패턴과 경로로 날아갔기 때문에 아무리 전투 경험이 풍부한 이그레이라고 해도 그걸 전부 막거나 피할 순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이그레이의 몸엔 큰 상처들이 늘어갔다.
상혁은 그렇게 10분 정도를 열심히 데미지를 누적시킨 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바로 자이언트 블러드의 혈통 스킬인 ‘커져라!(S)’를 사용했다.
커져라를 사용하자 가뜩이나 점점 힘이 빠지고 있던 이그레이는 순식간에 상혁에게 밀려버렸다.
물론 이그레이도 무작정 당하고 있진 않았었다. 그는 분명 상혁의 몸에 꽤 위력적인 공격을 꽂아넣기도 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상혁이 그것들을 견뎌냈다는 점이었다.
상혁의 회피 능력이 워낙 높다 보니 상대적으로 상혁의 맷집에 대해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사실 엄밀히 따지면 상혁은 회피 능력보다 공격을 맞고 버티는 맷집 능력이 더 뛰어났다.
다만 평소에 워낙 공격을 잘 피해서 그게 티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촤르르륵! 으드득!
상혁은 이그레이의 양팔을 만년금골편으로 휘감으며 있는 힘껏 당겼다. 그러자 이그레이의 양팔이 괴상한 방향으로 꺾이며 부러져버렸다.
‘됐다!’
이걸 마지막으로 2분 동안 유지되던 커져라의 효과가 끝나버렸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이그레이는 거의 탈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젠 그냥 가볍게 대검으로 놈의 머리를 날려버리면 되었다.
하지만 상혁은 진짜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은 없었다.
‘이제 슬슬 뜰 때가 된 거 같은데?’
상혁이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드디어 그가 원했던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 [51장] 불가능은 없다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