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장] 섬광(閃光)의 흑안(黑眼) (1) >
@ 섬광(閃光)의 흑안(黑眼).
상혁은 금강석과 확실한 계약을 맺은 후 제작법을 넘겨주었다. 제작법은 단순히 유저가 익힌 요령 같은 게 아니라 하나의 스킬과 비슷했다.
즉, 아무리 필요한 재료를 알고 있다고 해도 정식으로 제작법을 자신의 레시피로 등록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물건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건 스스로 깨달음을 모아 만든 제작법이나 정보의 조각을 모아 만든 제작법이나 똑같았다.
진짜 현실처럼 느껴지는 EL도 결국은 게임이었기 때문이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점이 오히려 좋게 작용했다.
금강석이 그럴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만에 하나 작정하고 섬광의 흑안에 대한 정보를 오프라인에서 흘린다고 해도 기껏해야 알려줄 수 있는 건 아이템의 정보나 그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 정도뿐이었다.
상혁이 타격을 입는 건 지금도 몰래몰래 모으고 있는 섬광의 흑안 가격이 대폭 오른다는 점이었는데 그건 상혁에게 그다지 큰 타격이 아니었다.
어차피 정보가 퍼지지 않는 상태에서도 거의 모이지 않는 재료 아이템이었다. 지금까지 상혁이 모은 섬광의 흑안이 최초에 재수가 좋아 모은 두 개를 제외하곤 하나밖에 없다는 것만 봐도 타격이 크지 않을 것이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상혁이 보기에 금강석은 오프라인에서도 그리 가볍게 입을 놀릴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믿고 계약을 한 것이었다.
상혁이 제작법을 넘겨주자 금강석은 그 자리에서 바로 제작법을 자신의 고대의 지식인 ‘보석세공(초급 명인)’에 등록했다.
이렇게 생산 관련 고대의 지식은 제작법을 따로 등록할 수가 있었고 자신이 등록한 제작법을 통해 물건을 만들 수가 있었다.
물론 제작법을 등록했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었다.
제작법마다 필요한 숙련도가 존재했는데 섬광의 흑안 같은 경우는 ‘초급 명인’ 이상의 숙련도를 지니고 있어야지만 습득할 수가 있었다.
제작법을 익히면 바로 물건을 만들 수 있긴 했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물건의 질이 좀 떨어졌다. 그래서 상혁은 금강석과 얘길 잘해서 초급 명인 숙련도를 중급 명인 숙련도까지 최대한 빨리 끌어올리기로 했다.
섬광의 흑안은 그 이후에 제작할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초급 명인에서 중급 명인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금강석의 보석세공에 대한 열의(熱意)와 자신의 자금력이 합쳐지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상혁은 ‘섬광의 흑안’ 제작법을 찾기 위해 비선을 동원해 수많은 보석세공 제작과 관련된 정보의 조각을 모았었고 그 결과 섬광의 흑안 제작법뿐만 아니라 다른 보석세공 제작법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5개의 새로운 보석세공 제작법과 질 좋은 보석 재료들을 모두 금강석에게 넘겨주면 그의 보석세공 숙련도는 쭉쭉 오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상혁은 자신이 주기로 한 제작 의뢰 비용인 100만 골드에서 재료비와 제작 레시피 제공 비용을 모두 깠다.
그 결과 100만 골드는 10만 골드로 줄어들었는데 정작 금강석은 돈 같은 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상혁이 재료와 제작법을 가져다주는 것만으로 이미 상혁의 노예(?)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금강석의 사고는 매우 간단했다.
오로지 더 좋은 보석세공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열망만 가득한 남자.
이쯤 되자 상혁도 그가 현실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걸 물어볼 정도의 사이까지는 아니었다. 어차피 상혁으로선 실력 좋은 기술자와 친해지는 건 언제나 환영이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껏 재료를 제공하며 금강석이 보석세공 숙련도를 최대한 빨리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금강석이 보석세공 기술 숙련도를 올리는 동안 상혁은 영웅의 대지에 존재하는 비선의 꼬리를 잡기 위해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거의 거저 얻은 지옥불 사막의 비선과 달리 영웅의 대지 비선은 정말 이름 그대로 꼭꼭 숨겨져 있었다. 상혁이 거느린 비선 조직도 영웅의 대지에선 활약을 못 했기 때문에 숨어 있는 비선을 찾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상혁뿐이었다.
처음엔 쉽게 생각했었던 상혁도 생각보다 오랫동안 작은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자 본격적으로 집중해서 비선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
“그들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퀘스트 ‘암시장 찾기’가 중요한 분기점을 맞이해 ‘암중(暗中)의 비밀세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상혁은 본격적으로 영웅의 대지 비선 찾기에 나선 지 정확히 열흘 만에 드디어 작은 꼬리를 잡을 수가 있었다.
‘암중의 비밀세력······ 이건 비선이 거의 확실하겠네.’
더 정확한 건 퀘스트를 계속 이어서 클리어해봐야겠지만 느낌상으론 거의 확실한 것 같았다.
‘어디 보자 퀘스트 내용이······ 암중의 감시자를 찾아라? 이건 너무 쉽네.’
‘암중의 비밀세력’ 퀘스트의 상세 내용을 확인한 상혁은 슬쩍 웃었다. 그리곤 가볍게 자신의 오른쪽 대각선 골목에 드리운 그림자를 향해 오른팔을 뻗었다.
촤르르르륵! 휘리릭!
감시자는 아까부터 계속 존재했었다. 다만 상혁이 그걸 알면서도 모른척했을 뿐이었다.
애초에 ‘어둠’과 ‘은신’은 상혁이 가지고 있는 특화 능력들이었다. 원래 잘 숨는 사람이 잘 찾을 수 있는 법이었다.
상혁 앞에서 어둠이나 그림자 속에 숨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커억!”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만년금골편은 한 NPC의 목을 휘감았고 그 NPC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끌려 나왔다.
퀘스트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멀쩡한 NPC를 ‘공격’했음에도 악업이 상승하지도 그리고 범죄자가 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퀘스트만 클리어 되었다.
퀘스트 ‘암중(暗中)의 비밀세력’을 클리어했습니다. 연계 퀘스트인 ‘감시자 심문하기’로 이어집니다.
연계 퀘스트까지 생성되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비선에 접근했다고 할 수 있었다.
상혁은 일단 감시자를 끌고 좀 더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래 봤자 근처이긴 했지만, 이곳 자체가 워낙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기 때문에 살짝 뒷골목으로 들어가도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감시자를 심문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채찍이란 무기 자체가 심문에 특화된 무기였다.
상혁은 감시자를 아주 찰지게 마구 때려주었다. 그는 힘 조절을 교묘하게 해서 미치도록 따갑지만, 막상 데미지는 별로 크지 않은 공격을 계속했다.
그렇게 대략 20분을 열심히 두들기자 드디어 감시자가 항복했다.
“전 영웅의 비선(秘線)에 속한 하급 정보원입니다. 전 단순히 정보를 모으고 있었을 뿐입니다. 전 제담당 구역에 들어온 특별한 인물들을 모두 감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당신을 지목해서 감시한 게 아니란 뜻입니다.”
감시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전부 얘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극히 한정적입니다. 저희 조직은 철저히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가 알고 있는 건 정보를 보고하는 채널 정도뿐입니다. 심지어 전 제 구역에 또 다른 조직원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하급 정보원이라서 그런지 알고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비선의 꼬리를 잡은 건 100% 확실해졌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할 수가 있었다.
퀘스트 ‘감시자 심문하기’가 다음 퀘스트인 ‘비선의 지역장’으로 이어집니다.
퀘스트는 계속 이어졌다. 여전히 정보는 많이 부족했지만, 이 퀘스트를 이어나가며 계속 캐면 언젠간 비선의 몸통과 접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 아무래도 최소 20연퀘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은 각인데?’
어쩌면 20이 아니라 30이나 혹은 40개의 퀘스트를 연속으로 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혁은 일단 꼬리를 잡은 이상 절대 이 꼬리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칫 실수라도 해서 퀘스트에 실패하면 연속 퀘스트가 통째로 날아가며 다시 새로운 꼬리를 잡아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퀘스트에 집중해야 했다.
이런 건 보통 하루 이틀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소 열흘에서 최대 한 달 정도를 두고 차분히 퀘스트를 해결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상혁이 비선 찾기에 열중한 사이 금강석은 하루에 두 시간씩만 자며 생산계열 유저의 폐인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증명해주었다.
덕분에 그는 정확히 20일 만에 초급 명인에서 중급 명인으로 숙련도를 올릴 수가 있었다.
이걸 봐서는 확실히 금강석은 재능이 있는 유저였다. 재능이 없는 유저였다면 아무리 밀어줘도 20일이 아니라 두 달이 흘렀어도 초급에서 중급으로 숙련도를 올릴 수가 없었다.
금강석이 자신의 재능을 확실히 뽐내준 덕분에 상혁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섬광 세트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금강석에게 연락을 받은 상혁은 곧장 창고에서 두 개의 섬광의 흑안을 챙겨서 그의 작업실로 갔다.
“후우, 이건 저도 좀 긴장이 되는군요.”
섬광의 흑안을 작업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금강석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금강석과 상혁은 대화를 자주 했었기 때문에 전보단 좀 더 편하게 얘길 하고 있었다.
“긴장하실 거 없습니다. 그냥 하시던 대로 편하게 제작하시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상혁은 금강석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그를 편하게 만드는 말을 해주었지만, 그 역시 마음속으론 제발 플러스가 최대한 많이 붙기를 빌고 있었다.
‘최소한 한 개······ 아니, 두 개만 붙어주면······.’
이건 무려 4세트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플러스가 붙고 안 붙고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날 수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금강석은 눈앞에 보석세공 제작창을 띄운 후 그 중 ‘섬광의 흑안(장신구 세트)’을 클릭했다.
그러자 반지와 목걸이 그리고 귀걸이 모양의 반투명한 이미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우선 반지부터 만들겠습니다.”
스윽, 금강석이 반지 이미지를 클릭하자 그 이미지가 금강석의 오른쪽 눈으로 스며들었다. 이제부턴 금강석이 직접 섬광의 흑안을 가공하면 되었다.
원하면 ‘자동 제작’을 통해 바로 결과물을 만들 수도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생산 유저들은 자동 제작을 통해 물건을 만들었다. 하지만 금강석은 절대 자동 제작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레시피를 직접 눈에 덧씌운 후 손수 보석을 깎았다. 이렇게 하면 자동 제작을 했을 때보다 조금 더 품질이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가 아주 크진 않았다.
그래서 수동 제작은 겉멋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다. 심지어 시스템으로 보정을 해준다고 해도 수동 제작은 쉽지가 않았다.
오히려 손재주가 없는 이들은 수동 제작을 하면 품질이 더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래서 더더욱 수동 제작 무용론이 힘을 받고 있긴 했다.
그러나 상혁은 금강석의 이런 스타일 때문에 그를 더욱 믿을 수 있었다. 상혁은 자동 제작의 한계는 딱 명장까지만이란 걸 알고 있었다.
명장을 넘어 하늘의 장인이라는 천장(天匠)과 그 이후 신이 내린 장인이라는 신장(神匠)까지 가려면 무조건 수동 제작을 해야 했다.
자동 제작으론 최상급 명장 이후 숙련도가 오르질 않았다. 심지어 명장이 되었을 때도 숙련도가 오르는 폭 자체가 달랐다.
‘금강석의 길을 틀리지 않았다. 그는 분명 천장, 아니 어쩌면 신장까지도 성장할 수 있을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 이런 유저라면······ 믿고 맡겨야지!’
상혁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초집중 상태에서 양손에 세공 도구를 들고 섬광의 흑안을 만지고 있는 금강석을 바라보았다.
시스템상 오른눈에 레시피를 덧씌우진 않고는 절대 세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금강석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동 제작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었다.
상혁은 숨을 죽이고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대략 10분 정도가 흐른 후······ 드디어 첫 번째 결과물이 나왔다.
< [51장] 섬광(閃光)의 흑안(黑眼)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