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인군단-92화 (92/127)

< [48장] 나쁘지 않은 기분 (1) >

@ 나쁘지 않은 기분.

적어도 여기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틀들을 얻었고 아이템도, 그리고 강화도 대박을 쳤다.

시작이 너무나 좋아서 두 번째부턴 더욱 쉽게 쭉쭉 진도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암흑달 사원의 난이도는 정령의 숲과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장비와 타이틀이 최소 한 단계에서 두 단계 정도는 업그레이드된 지금이라면 순식간에 클리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젠장······ 아무리 전설 등급 NPC라고 해도 이건 못 하는 건가? 일리아만 믿고 있었는데······.’

상혁이 믿고 있던 일리아는 첫 번째 기계장치에서 NPC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 암흑달 사원은 솔로 클리어가 불가능한 던전이었다.

솔로플레이가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암흑달 사원의 진행 방식이 매우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암흑달 사원엔 두 갈래 길이 존재하는데······ 암흑달 광장으로 향하는 주 통로로는 실제 보스 레이드를 치를 주 병력이 가야 하고 한쪽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암흑달 통제실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는 주 병력의 길을 뚫어주고 사냥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별동대가 투입되어야 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든 게 동시에 이뤄져야 했기 때문에 혼자서는 절대 이 두 길을 모두 클리어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솔로플레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상혁은 전설등급 NPC인 일리아라면 자신을 도와 비밀 통로에 존재하는 통제 장치들을 조작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혁의 예상과 달리 일리아는 처음부터 막혔다. 주 통로에서 사냥하는 상혁의 상황을 암흑달 수정을 통해 본 후 그것에 맞춰 기계장치들을 조작해 주 통로의 길을 뚫어줘야 했는데······ 일리아는 그걸 하지 못했다.

메커니즘의 차이인지 아니면 인공지능의 한계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일리아는 상혁의 상황을 보고 유기적으로 레버를 내린다거나 혹은 스위치를 누르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했다.

상혁이 아무리 상황별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줘도 그걸 외우기만 하고 응용을 전혀 하지 못했다. 상황마다 워낙 다양한 패턴이 나타났기 때문에 응용하지 못하면 사실상 기계 장치를 조작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상혁은 첫 번째 관문도 통과하지 못하고 포기를 했다. 일리아를 이용한 클리어 시도는 대실패였다.

‘그럼 결국 NPC는 안 되고······ 도와줄 유저를 구해야 한다는 건가?

도와줄 유저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김정우와 김정수였다.

이 쌍둥이는 전생에도 상혁을 가장 많이 도와줬던 녀석들이었다.

‘그 녀석들도 이제 슬슬 위로 올라오고 있을 텐데······ 일리아를 시켜서 한 번 더 찾아볼까?’

정우와 정수는 믿을만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걔들을 찾는 것과 그 녀석들의 마음을 얻는 건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회귀를 했는데 전생에 너희와 친했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아냐,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서 친해지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가 있어. 정우와 정수는 한 번 마음을 열면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스타일이지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굉장히 냉정한 스타일이라 자칫 전생과 전혀 다른 사이가 될 수도 있어.’

솔직히 상혁은 정우와 정수를 만나는 건 조금 더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흐음 결국 용병이 제일 나은 답인가?’

용병을 고용하면 계약 관계에서 깔끔하게 일을 처리 할 수가 있었다. 물론 유저를 용병으로 고용한다는 것 자체는 상혁에겐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용병을 고용하면 그 용병이 정확히 원 길드원의 명단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원 길드의 용병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날 수도 있었다.

‘용병이라······. 어차피 용병을 구하는 거라면 일리아로 지원을 해준다고 해도 최소 두 명은 구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활동하는 용병 유저들을 고용하는 건 좀 그렇고······. 아, 난감하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상혁은 좀 더 신중하게 고민을 해본 후 적어도 점심을 먹은 후까지는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 * * *

“흑기사와 계백.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이 최선이다.”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은 상혁은 뒷정리를 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몇 번을 생각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암흑달 신전을 클리어하려면 용병이 필요했고 그 용병으로 제일 적합한 인물은 흑기사와 계백이었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상혁은 좁디좁은 인간관계 덕분(?)이었다. 애초에 알고 있는 인물이 없다 보니 선택지가 별로 없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상혁의 이런 비정상적인 인간관계는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회귀 이후 전생에 겪었던 수많은 배신 때문에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 자체에 혐오감을 느꼈었다. 원래도 다른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여기에 전생의 좋지 않은 기억까지 합쳐지자 진짜 편협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상혁 본인도 최근 들어서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고칠 의지도 있었다.

‘오히려 잘 됐다. 한 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문제 해결을 위한 첫 번째 발걸음 정도는 될 수 있겠지?’

성격 자체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인간 그 자체를 불신하는 수준에선 벗어나 적어도 ‘친구’ 혹은 ‘동료’라고 말할 수 있을만한 몇 사람 정도는 만들어볼 생각이었다.

‘일단······ 흑기사한테 먼저 연락해보자.’

상혁은 결정을 내린 이후엔 모든 걸 빠르게 진행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바로 게임에 접속해 친구목록을 펼쳐보았다.

그 목록엔 단 한 명만 등록이 되어 있었다.

[아스피스 - 접속 중(영웅의 대지)]

아스피스가 바로 흑기사였다.

상혁은 곧바로 아스피스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 아스피스님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오래전에 비밀 던전을 하나 판매했던 사람입니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대화할 수 있을까요?

상혁은 빙빙 돌리거나 혹은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일 생각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걸 얘기하는 화끈한 돌직구가 상혁의 스타일이었다.

너무나 뜬금없는 귓속말이었기 때문일까? 답변이 오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략 20분이 지난 후 기다리던 답변이 날라왔다.

(귓속말) - 기억납니다. 생각지도 못한 귓속말이라 조금 당황스러워서 대답이 늦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조심스러움이 느껴지는 대답. 하지만 확실한 건 아스피스, 아니 흑기사가 상혁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흑기사가 상혁을 기억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상혁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친구목록도 매우 썰렁했다. 그래서 친구로 등록된 이들이 누군지 매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귓속말) - 조금 긴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시간이 되신다면 잠깐 만나서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가 아스피스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거의 1년 만에 처음으로 연락을 한 상대가 다짜고짜 찾아온다고 하면 거부감부터 느끼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행이 여긴 현실이 아닌 게임 속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거부감이 덜했다.

특히 흑기사는 ‘불멸’이란 유저를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자신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지금 하신 말씀······ 모두 사실인가요?]

흑기사는 여전히 특유의 필담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글로 쓴 그의 말에서도 그가 굉장히 많이 놀랐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네, 사실입니다. 당장 계약서만 작성해도 들통이 날 수 있는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그럼 정말 당신이 제가 알고 있는 그 원 길드의 길드마스터란 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흑기사도 당연히 원 길드가 어떤 길드인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EL을 플레이하는 유저 중 원 길드를 모르는 유저는 거의 없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네요.]

가끔 친구목록을 확인할 때마다 보이는 불멸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었다. 하지만 설마 그가 원 길드의 길드마스터일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당황스러워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마침 특별히 소속된 길드도 없다고 하셔서 더욱 부담 없이 말씀드린 겁니다. 그냥 간단하게 이번 계약을 통해 아스피스님이 얻을 수 있는 것들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근데 정말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인가요?]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연락 드린 건 아닙니다. 벌써 나름대로 아스피스님에 대해 조사를 해봤습니다. 아스피스님이 유저들 사이에서 흑기사라 불리며 대단히 실력 좋은 ‘탱커’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길드에 소속되지 않았는데도 비교적 빨리 영웅의 대지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게 최상위급 길드 연합에서 저승길을 통과할 때 거액을 내고 스페셜 용병으로 고용했기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아본 바로는 실력 면에선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 혹시 뒷조사를 한 게 기분이 나쁘시다면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확실히 해야 하니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상혁은 비선을 이용해 지금의 흑기사를 조사했었고 그 결과 흑기사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유저가 되어 있다는 걸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흑기사도 상혁의 전생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길드 가입도 아니고 용병 계약입니다. 페널티나 같은 건 전혀 없고 오로지 클리어 보너스만 존재합니다. 진짜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용병 계약은 없을 겁니다.”

상혁이 제시한 용병 조건은 흑기사가 보기에도 대단히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선뜻 대답을 못하는 이유는 흑기사 역시 상혁과 비슷한 사람 사귀는 게 서툰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흑기사를 길드에 영입하려고 공을 들였던 인물들은 많았다. 하지만 정작 영입에 성공한 길드는 없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결국 궁극적으론 흑기사가 길드에 소속되는 걸 별로 원하지 않았다.

‘용병이라면······.’

만약 상혁의 제안이 길드 가입이었다면 아무리 상대가 그 대단한 원 길드라고 해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용병 계약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알겠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실감이 나지 않긴 하지만 용병 계약이라면 하겠습니다.]

흑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상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준비해간 맹약의 서를 꺼냈다.

“자, 잘 읽어보세요. 이해하기 쉽게 작성했기 때문에 복잡한 부분은 없을 겁니다.”

흑기사는 맹약의 서에 적혀 있는 ‘용병 계약’을 읽어보았고 상혁의 말대로 워낙 간단한 내용이라 금방 확인을 할 수가 있었다.

맹약의 서에 흑기사의 인장이 새겨지자 상혁과 흑기사 사이의 맹약이 완성되었다.

“준비하실 건 아까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공략 설명은 다른 용병분과의 계약이 끝나는 대로 모두 모여서 한 번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상혁의 말에 흑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기사와의 용병 계약을 생각보다 쉽게 끝낸 상혁은 곧바로 다음 계약 목표인 계백과 얘길 하기 위해 독고불패로 변한 후 ‘증명의 길’에 전투 신청을 했다.

“콜.”

흑기사의 용병 계약이 생각보다 쉬웠다면 계백과의 용병 계약은 계약을 제시한 상혁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증명의 길에서 계백을 만난 독고불패가 길드마스터인 ‘불멸’을 소개해주고 불멸과 계백이 친구 등록을 한 후 따로 만나기까진 모든 게 무난하게 진행이 되었다.

그런데 불멸을 만나 간단히 설명을 듣던 계백은 용병 계약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설명을 다 듣지도 않고 일단 콜을 외쳤다.

“설명을 더 듣지 않으셔도 되나요?”

“뭐 더 들을 필요 있나요? 솔직히 독고불패님도 한 수 접어 준다는 원 길드의 길드마스터님과 함께 일하는 건데······ 이건 제가 돈을 내고서라도 하고 싶은 일입니다.”

“쉽진 않은 일입니다.”

“원래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게 제 전문입니다.”

인내심만큼은 상혁도 계백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계백은 아무런 의심 없이 상혁이 건네준 맹약의 서에 인장을 찍었다.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끝난 흑기사 그리고 계백과의 용병 계약. 덕분에 상혁은 더욱 빠르게 일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 [48장] 나쁘지 않은 기분 (1) > 끝

ⓒ 성진(成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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