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장] 봉인 해제 (2) >
“이제부턴 흩어지지 않는다. 이대로 진형을 유지하고 적을 찾아라!”
오젠은 자신을 포함한 22명의 정예 악인이라면 상대가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는 평범한 유저가 아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강력한 괴물 한 마리를 사냥한다고 생각해!”
오젠은 길드원들에게 확실히 경고한 후 자신도 두 자루의 검을 뽑아들었다.
‘우리 애들을 한 방에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한 암습 능력을 지닌 괴물…… 상식적으로 이 정도 암습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암습 능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은 모두 밑바닥이란 뜻이겠지? 그럼 결국 놈이 암습할 수 없게만 할 수 있다
면 생각보다 더 쉽게 잡을 수 있다.’
오젠은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몽마의 탑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
정작 몽마의 탑에서 사냥하고 있던 라인 다크의 유저들은 이 긴장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다크블러드의 악인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보고 ‘또 침입자가 생겼나?’ 라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오젠 역시 지금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기보다는 일단 적을 제거하고 나중에 적당히 꾸며서 보고를 할 생각이었다. 사실 있는 그대로 보고하기엔 너무 창피한 것들이 많았다.
1명이 다수의 적을 상대로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략은 치고 빠지는 식의 게릴라 전이었다. 상대방을 빠르게 암살하고 도망치는 식으로 머릿수를 줄여나가면 다수의 입장에선 매우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수 쪽도 이런 게릴라 전에 얼마든지 대응을 할 수가 있었다. 가장 좋은 대응법은 지금 오젠처럼 그냥 한 점으로 뭉치는 것이었다.
뭉치면 끊길 위험이 없어졌다. 상대방이 무리해서 치고 빠지기를 시도하면 그때 다수의 힘으로 상대방을 포위해서 잡아버리면 그만이었다.
장거리 저격 능력 같은 걸 지닌 적이 아닌 이상 한 점 뭉치기는 매우 현명한 대처법이었다.
불멸은 매우 다양한 능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장거리 저격 능력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 한 점 뭉치기를 깰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능력을 지니지 못한 불멸.
하지만 그런데도 불멸은 어둠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오젠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건가?’
오젠의 이런 반응은 불멸도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래, 분명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러나…… 적어도 나에겐 의미가 없어.’
불멸은 상대방이 뭉쳤다고 해서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작해볼까?’
흩어져 있는 것과 뭉친 것의 차이……. 오히려 불멸에게 그것은 늦게 죽이느냐, 빨리 죽이느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스스로 빨리 죽겠다고 뭉쳐줬으니 그에 맞춰 결과를 내주면 그만이었다.
촤르르륵! 콰득, 퍼퍼펑!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만년금골편은 가장 외곽에 서 있던 한 악인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그 순간 오젠은 드디어 괴물이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타났다! 모두 집중해!”
솔직히 지금까진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었지만 이젠 달랐다. 오젠은 20명의 정예 악인들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괴물이라고 해도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새끼…… 진짜 암습 능력 하나만으로 우릴 잡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넌 오늘 뒈졌다!’
오젠은 상대가 매우 강력하긴 하지만 그 강력함은 결국 말도 안 되는 암습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만약 놈을 어둠 속에서 끌어낼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놈을 어둠 밖으로 끌어내!”
악인 유저들은 재빨리 만년금골편이 튀어나온 그림자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은신이 동반되지 않은 암습은 위력인 절반, 아니 그 이상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오젠은 적의 은신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콰과과과광!
온갖 기술이 불멸이 숨어 있던 그림자 위로 떨어지며 폭발했다. 하지만 그 기술들이 폭발하기 이전에 불멸이 먼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제야 오젠을 비롯한 다크블러드의 악인 유저들은 불멸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악인 유저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재빨리 넓게 포위망을 형성해 불멸을 둘러쌌다.
“이제야 쥐새끼가 쥐구멍에서 나왔군.”
오젠은 쥐구멍에서 나온 쥐새끼 정도는 단번에 때려잡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까보단 훨씬 자신감을 찾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쥐구멍에서 나온 쥐는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 당당했다. 그는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을 포위한 20명의 악인 유저들을 바라보았다.
“네놈이 날뛰는 것도 여기까지다.”
오젠은 완벽하게 승기가 자신들에게로 넘어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칼날은 무서웠지만, 어둠 밖에 드러난 칼날은 별로 무섭지 않았다.
“포위망을 좁히…….”
오젠은 독 안에 든 쥐를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독 안에 들어 있던 쥐가 먼저 움직였다.
촤르르르륵, 피잉!
불멸은 오른팔을 앞쪽으로 뻗으며 빠르게 옆으로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만년금골편이 튀어 나가며 앞쪽에 하나의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
세상을 위와 아래로 구분 짓는 그 선.
그 선은 놀랍게도 세상만 위와 아래로 구분 지은 게 아니라 불멸을 포위하고 있던 악인 유저 4명의 몸도 위와 아래로 구분 지어주었다.
콰드득, 콰드드드득!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포위를 당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불멸이 팔을 뻗으며 휘두르자 그 순간 하얀빛이 번쩍이며 네 명의 다크블러드 길드원이 몸이 두 동강 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모든 건 대략 1~2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하는 순간 네 명이 당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젠은 불멸을 암습만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유저로 생각했기 때문에 불멸이 이런 식으로 반격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질 못했다.
그래서일까? 눈앞에서 네 명의 길드원이 반 토막 나며 쓰러졌는데도 뭐라 추가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가 크게 당황하며 잠시 어리바리 한순간 불멸은 다시 한 번 만년금골편을 ‘검결( 劍結 )’로 휘둘렀다.
번쩍! 촤르르르르륵!
검결은 한 마디로 만년금골편을 검처럼 날을 세워서 사용한단 뜻이었다. 자칫 잘못 다루면 검처럼 변한 만년금골편이 오히려 자신의 몸을 휘감으며 크게 다칠 수가 있는 매우 위험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불멸은 손톱만큼도 두려워하질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감각과 제어능력을 믿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또다시 세 명의 악인 유저들 목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그들은 어떻게 막거나 피해 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 공격해! 죽여!!”
5초도 안 되어서 7명의 길드원들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오젠은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일단 공격을 해서라도 불멸을 멈추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악인들의 공격 따윈 불멸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따다다다다당! 쩌저저정!
허공에서 만년금골편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멸에게 쏟아진 대부분의 공격을 쳐내버렸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불멸은 만년금골편이 막아내지 못한 공격들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너무나 간단하게 피해버렸다.
동시에 열 명이 넘는 이들이 공격을 쏟아냈지만 정작 유효타는 하나도 나오질 않았다.
극에 다다른 컨트롤로 펼치는 ‘적극 방어술’은 적극 방어술이 가지고 있는 한계마저 뛰어넘은 지 오래였고 전문 회피 탱커들을 비웃을 정도로 뛰어난 회피 능력은 작은 가능성마저 철저히 지워버렸다.
다크블러드의 정예 악인들은 어디 가서 꿀리는 유저들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불멸에겐 전부 하룻강아지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그런 이들이 불멸의 몸에 공격을 꽂아넣는다는 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오젠은 불멸을 독 안에 갇힌 쥐라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불멸은 쥐도 아니었고 또한 독 안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다수의 유리함?
소수의 불리함?
이딴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암습을 하지 않아도 여전히 불멸은 다크블러드의 악인 유저들을 너무나 쉽게 짓밟았다. 여전히 악인 유저들은 개미였고 불멸은 그 개미를 짓밟는 거대한 인간이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또다시 오젠의 눈앞에서 악인 유저 두 명이 머리가 사라지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오젠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몽( 惡夢)으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살기 위해 발악하는 다크블러드의 악인들.
그들은 평소엔 오히려 다른 유저들을 괴롭히고 죽이며 즐거움을 느끼던 쓰레기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엔 모든 게 반대가 되었다.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밟히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악인 유저들.
그들에게 불멸은 염라대왕( 閻羅大王 )이었다.
염라대왕이 된 불멸은 악인 유저들을 심판해 즉결 처분을 내렸는데 당연히 그의 처분은 모조리 ‘죽음( 死 )’이었다.
* * * *
오젠을 비롯한 모든 다크블러드의 악인 유저들은 ‘죽음’을 선고받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최후변론조차 들어주질 않았다.
가장 마지막에 몸이 8갈래로 조각나며 죽은 오젠은 마지막 순간 뭔가 억울한 표정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던 것 같았지만, 불멸은 그의 말을 한마디도 들어주지 않았다.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불멸에게 악인 유저들은 그냥 철저히 짓밟아서 죽여버려야 하는 사냥감일 뿐이었다.
세상에 어떤 사냥꾼이 사냥감의 말을 들어주는가?
낚시꾼이 물고기와 얘기하지 않고 엽사( 獵師)가 맹수( 猛獸 )와 대화하지 않는 것처럼 불멸도 악인 유저들을 기계처럼 죽이기만 했다.
다크블러드를 괴멸시킨 불멸은 여전히 몽마의 탑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3층으로 올라가 여유롭게 사냥까지 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개들의 주인인 DD. 바로 그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다크블러드가 단 한 명한테 박살이 났다고?”
보고를 받은 DD는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오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냥 자신들이 당했다는 정도인데 오젠 말고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다른 다크블러드의 악인 유저 말을 들어보면 정말 철저하게 박살이 난 거 같아. 아무래도 엄청난 놈이 등장한 거 같아.”
DD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거의 DD의 충실한 수하라고 할 수 있는 필드닥터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해온 내용을 정확하게 보고 하는 중이었다.
“그게 가능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크블러드를 혼자 박살 내는 건 힘들 거 같은데……. 뭔가 함정 같은 거에 당한 거 아냐?”
“나도 믿기지 않아서 추가로 더 조사를 해봤는데 진짜 있는 그대로 한 명한테 처참하게 박살이 난 게 맞더라. 조사하면서 나도 정말 많이 놀랐어.”
“흐음…….”
한껏 인상을 찡그렸던 DD는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원 길드 아냐?”
“원 길드?”
“응, 무지막지하게 강력한 한 명의 유저라면 떠오르는 게 원 길드밖에 없잖아.”
“그렇긴 한데 원 길드가 갑자기 왜 우리한테 시비를 걸어? 명분이 없잖아?”
필드닥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맥락이 좀 이상하긴 해도 EL 세상에서 솔로플레이로 다크블러드 정도 되는 길드를 씹어먹을 수 있는 놈들은 오로지 원 길드의 길드원밖에 없어. 누가 온 거지? 질풍? 블레이크? 아니면 이번에 새로 등장한 독고불패?”
본능적으로 원 길드가 개입했다고 느낀 순간 여지없이 DD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는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가슴이 뛰는 스타일이었다.
강자( 强 者 )는 그 어떤 각성제보다 DD를 흥분시켜주었다.
“내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질풍도, 블레이크도 그리고 독고불패도 아니야.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유저야. 만약 이 녀석이 진짜 원 길드의 길드원이라면 또 한 명의 새로운 길드원이 나타난 거 같아.”
“진짜? 그럼 더 대박이지!”
“근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절대 혼자서는 이길 수가 없는 상대야.”
“형, 내가 아무리 강자와의 싸움을 즐긴다고 해도 이길 수도 없는 싸움을 무모하게 하는 거 봤어?”
DD는 히죽 웃으며 필드닥터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DD는 강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무모한 도전만 일삼는 이는 절대 아니었다.
“이기는 싸움을 해야지. 라인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그 녀석을, 아니 오만한 원 길드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줘야지.”
이미 DD는 상대가 원 길드의 유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불멸이 의도한 대로 사냥개를 죽이니 정말 주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혼자인 불멸과 거대 라인을 등에 업고 있는 DD.
이들의 충돌은 생각보다 큰 충격파를 사방으로 내뿜을 것만 같았다.
< [45장] 봉인 해제 (2) > 끝
ⓒ 성진( 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