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장] 늘어나는 특이점들 >
@ 늘어나는 특이점들.
“입금했습니다.”
하자드는 비서의 보고를 듣곤 바로 앞쪽에 있던 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페이퍼 컴퍼니를 통한 거래였기 때문에 처리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복잡한 건 직원들이 전부 알아서 처리해주었다.
“확인하시고 거래를 끝내죠.”
“하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남자, 아니 골드 러쉬의 길드마스터인 황금충 골저스는 게임과 연동된 시스템을 이용해 입금 여부를 간단히 확인할 수가 있었다.
“30만 달러 입금 확인이 되었습니다.”
입금확인을 끝낸 골저스는 곧장 하자드에게 일대일 거래를 신청한 후 400만 골드를 건네주었다.
한화로 무려 3억 원이 넘는 거래였기 때문에 골저스가 직접 나온 것이었다.
천금전쟁의 여파로 골드 러쉬도 상당히 많이 휘청거렸던 건 사실이었지만 완전히 무너진 건 아니었다. 골저스는 특유의 영업력을 한껏 발휘해 다시 골드 러쉬를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특히 이번 하자드와의 대형 거래 성사로 골드 러쉬가 더욱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해주세요.”
골저스에게 하자드는 아주 중요한 고객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할인을 해준다거나 혹은 보너스로 골드를 더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량 거래였기 때문에 시세보다 약간 비싸게 골드를 팔았다.
하지만 골저스는 적어도 하자드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걸 최우선적으로 가져다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하자드에게 30만 달러는 부담이 되는 금액이 아니었다. 그는 흔히 말하는 중동의 부자였다. 아무리 여기저기에서 셰일가스가 개발되어서 저유가 시대가 오랫동안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중동의 부자가 그깟 30만 달러 때문에 벌벌 떨 일은 절대 없었다.
벌써 하자드는 EL에 현금으로 100만 달러 가까이 쏟아 부은 상태였다. 그는 오히려 돈은 있는데 대규모로 골드를 파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답답한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입장에서도 골저스는 중요한 사람이었다.
“다음에 또 연락하겠습니다.”
하자드는 골저스와 거래를 끝낸 후 곧장 튠으로 이동했다. 그가 현금까지 펑펑 쓰며 골드를 사 모은 이유는 한 가지 퀘스트 때문이었다.
대규모 연계 퀘스트 ‘대상단( 大商團 )’의 마흔네 번째 의뢰인 ‘상단 생성’.
하자드는 이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능력을 활용해 골드를 끌어모았고 불과 나흘 만에 800만 골드를 채울 수가 있었다.
하자드는 망설이지 않고 800만 골드를 지급하며퀘스트를 완료했다.
상단을 생성하셨습니다. 상단 이름은 관리자 모드에서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기타 상단의 모든 기능도 관리자 모드에서 설정하실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상단을 개설하며 대행수가 되었습니다.
희귀 등급 타이틀 ‘대행수’를 획득하셨습니다.
“크하하하, 드디어!”
하자드는 소리 내어 큰 소리로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가 이 상단을 만들기 위해 그동안 투자한 시간과 돈은 상당했다. 아무리 그의 유일한 취미가 게임이라고 해도 100만 달러 가까이 쓴 게임은 이번 게임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푹 빠져 있다는 뜻이긴 했는데 이제 슬슬 하자드도 이런 식으론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마즈. 다들 모여 있지?”
하자드는 자신의 비서이자 게임 속에서도 오른팔 역할을 해주고 있는 일마즈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 지금 회의 룸에 모여 있습니다.”
“좋아, 가자.”
일마즈의 보고를 들은 하자드는 EL에서 로그아웃한 후 곧장 자신의 D-룸으로 이동했다.하자드는 온갖 유료서비스를 다 사용 중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엔 하자드가 개인적으로 연락해 모은 돈 많은 ‘부자’ EL 유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오펙(OPEC: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이라 불리는 석유수출기구와 관련이 있는 부자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하자드가 오펙의 영역 안에서 두터운 인맥을 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자드는 자신 말고도 오펙과 연관이 있는 많은 부자가 EL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한 가지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부자 유저’들의 연합이었다.
물론 워낙 가진 게 많은 이들이라 쉽게 연합을 하긴 힘들겠지만 잘 조율만 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EL 안에서 우리만의 카르텔을 완성하면······ 그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힘을 완성할 수 있다.’
하자드는 돈을 아무리 써도 자꾸 남들이 자신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은 돈이다.’
하자드는 돈의 힘을 모아 EL의 패권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의 이런 시도는 상혁의 전생에서도 있었던 일이었다. 다만······ 시기가 달랐다.
원래 하자드의 이런 시도는 전생의 기준으로 따지면 지금이 아니라 3년은 더 지나서 일어나야 할 일이었다.
시기가 너무 늦어서였을까? 상혁의 전생에선 하자드의 이런 시도가 아주 잘 먹히진 않았었다. 당시엔 하자드와 친분이 있던 부자 유저들이 모두 각각의 세력을 확실하게 구축한 후라서 연합 자체가 완벽하게 되질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만든 ‘블랙마켓’은 굉장한 힘을 지닌 세력으로 성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초반부터 하자드가 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미래가 바뀐 것이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생보다 지금이 더 위협적인 연합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블랙마켓! 그것으로 EL 세상의 모든 부를 독점하고야 말겠다!’
하자드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D-룸에 모여 있는 17명의 유저들만 잘 설득해 연합을 구축할 수만 있다면 그 뒤는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 * * *
“이제부터 우린 한배를 타게 된 겁니다.”
레드라인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레드선은 쿤을 향해 손을 내밀며웃었다.
쿤 역시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악수를 받아주었다. 순혈주의를 포기한 쿤은 이젠 아예 ‘라인 연합’이라는 초강수까지 두며 완벽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냥 라인 연합도 아닌 무려 EL의 5대 라인에 속해 있는 ‘레드’와 ‘일루젼’의 연합이었다.
아무리 라인 ‘레드’가 최근에 내부적인 문제로 라인 최고의 정예 길드라 할 수 있는 장미기사단과 결별을 하며 약간 휘청거렸고 라인 ‘일루젼’은 순혈주의를 버린 쿤에게 실망한 몇몇 유저들이 개별적으로 길드를 탈퇴하면서 전력이 약해지긴 했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5대 라인이었다.
많은 악재 속에서도 라인 ‘레드’와 ‘일루젼’의 핵심 전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 두 라인이 연합하며 라인 ‘트와일라잇(twilight)'이 되었고 당연히 트와일라잇은 당장에 EL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이 되었다
이 연합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상혁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혁의 전생엔 이런 연합 같은 게 존재하질 않았었다.
이것 역시 바뀐 미래였다.
블랙마켓이 3년이나 앞당겨져서 태동하기 시작하고 존재하지 않던 대형 연합이 생기고······ 이 모든 건 상혁이 예상할 수 없는 특이점들이었다.
물론 상혁도 정확하게 예상은 못 했지만, 자신의 회귀 때문에 많은 것들이 변할 것이란 사실 자체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여러 준비도 하고 있었다.
카오스의 시간 가속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마구 생겨나기 시작한 특이점들······. 하지만 모든 특이점이 상혁에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레아, 정말 블랙의 제안을 거절할 거야?”
레아 콜린의 에이전트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크리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레아를 바라보았다.
“······.”
레아는 말수가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그녀의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받지 않을 생각이구나. 근데 아무리 너라고 해도 블랙이 참을 수 있는 수준을 넘었어. 아마 벨트를 반납하라고 할 거야. 아직까진 네 인지도 때문에 대놓고 발표까진 못하겠지만 결국 그 녀석이 제일 잘하는 언론플레이로 흠집을 열심히 낸 후 벨트를 가져갈 거야······ 그래도 정말 괜찮아?”
“······상관없어.”
레아는 섀도복싱을 멈추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타곤에 올라가지 않은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건 옥타곤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며 한계를 극복하는 것. 이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전에 얘기했던 말이 진심이었던 거야?”
“이제 옥타곤에선 더 이상 내 심장이 뛰질 않아.”
“하아, 너도 참······ 병이다. 병.”
크리스는 고개를 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레아와 알고 지낸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지만, 레아는 1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레아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에 엄청나게 집착했다.
그녀가 불과 20살의 나이에 SFC(Super Fighting Championship) 여성부 스토로급 챔피언이 된 것부터 그로부터 1년 뒤 밴텀급 챔피언이 된 것까지 모두 심장이 뛰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뿐인가? 22살의 나이에 사실상 여성부 통합 챔피언이 된 것은 물론이고 SFC 데뷔 이래 무려 7년간 21전 21승 무패 21KO의 성적을 거둔 것도 모두 심장이 뛰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6년 연속으로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여자배우들을 제치고 세계 최고의 미인으로 손꼽히게 된 건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남성부의 내로라하는 스타들도 그녀 앞에선 한없이 작아질 정도였다.
범위를 확 넓혀서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인물을 뽑으면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 바로 레아 콜린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가 작년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 경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블랙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한 번 마음이 식은 그녀를 움직이는 건 그녀를 가장 잘 아는 크리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재작년부터 이미 한계이긴 했었어.’
크리스는 레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아가 사실상 재작년부터 옥타곤에서 마음에 떠났다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통합 타이틀 방어전을 두 번이나 치렀고 두 경기 모두 1라운드 20초, 31초 만에 상대방을 압살해버렸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레아의 마음은 옥타곤을 떠나버렸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레아의 상대가 없다는 점······. 이게 레아의 심장을 식게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래서 어쩔 건데? 진짜 이대로 끝낼 거야?”
“미안한데 블랙한텐 네가 잘 좀 얘기해줘. 벨트는 반납하는 걸로 하고 이유는······ 부상 정도면 될까?”
“휴, 과연 그 정도로 팬들이 이해할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가 최대한 부드럽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볼게.”
크리스는 레아가 이미 확실히 결심했다는 걸 느꼈다.
“고마워.”
사실 레아는 좀 극단적인 인물이었다. 뭔가에 꽂히면 그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걸 챙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레아에게 크리스는 매우 소중한 존재였다.
사실 크리스가 있었기에 그나마 레아가 인간다워졌다고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몇 개월 전부터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준비하고 있던 시나리오가 하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내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거 해. 괜히 나 때문에 하고 싶은 거 참으면서 운동을 계속 열심히 할 필요 없어.”
크리스는 이미 레아가 다른 것에 빠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굳이 언급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난 네 눈빛만 봐도 다 알 수 있다는 걸 잊은 거야?”
“하긴······ 근데 꼭 네 눈치를 본다고 운동을 계속한 건 아니야. 워낙 오래전부터 해오던 것이라 습관처럼 한 거야.”
“어쨌든 나 왔다고 후다닥 DN 접속을 끊고 그러지 말라는 거야. 그 안에서 심장이 뛰는 걸 찾았으면 네 스타일대로 신 나게 달려! 그래야 레아 콜린이지.”
크리스는 레아를 바라보며 아주 밝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순간 레아는 마음에 얹혀 있던 짐이 하나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
레아는 다시 한 번 자신에게 크리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크리스와 함께 밝게 웃는 레아.
그녀의 미소야말로 진정한 천사의 미소였다.
레아 콜린의 변화. 이것도 역시 특이점이었다. 하지만 이 특이점은 상혁에겐 조금 다른 의미의 특이점이 될 예정이었다.
< [39장] 늘어나는 특이점들 > 끝
ⓒ 성진( 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