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장] 시간 가속(加速) (2) >
정확히 말하면 상혁의 전생에도 카오스의 시간 가속이 사용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EL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의 얘기였다.
라온 소프트에선 오랜 연구와 노력 끝에 아주 기초적인 EL의 세상과 그 세상을 관리하는 절대적인 존재인 카오스가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뼈대가 완성되자 그들은 카오스에게 ‘세상을 유지하고 키우라’는 절대적인 명령을 내린 후 모든 걸 카오스에게 맡겨버렸다. 애초에 이렇게 하려고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하고 노력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명령을 내리자 카오스는 그때부터 자체적으로 수많은 결정과 실행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 가속도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권능이었다.
카오스는 시간 가속을 한계까지 사용하며 어마어마한 시간을 흐르게 하였다.
그렇게 EL의 세상이 하나씩 완성되어 갔다.
현재는 EL의 첫 번째 행성인 트리나크 행성만 존재했지만, 나중엔 또 다른 카오스가 만들어낸 행성들이 계속 추가되어 EL의 세상으로 편입될 예정이었다.
행성이 편입될 때 그 행성을 만든 카오스도 기존의 카오스와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전혀 없었다.
현재 카오스가 시간 가속을 사용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세상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뒤처졌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 가속을 사용한 것이었다.
판단과 실행은 온전히 카오스의 권한이었기 때문에 외부에서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카오스는 유저들이 좀 더 빨리 저승길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당연히 상혁 때문이었다.
상혁이 말도 안 되는 성장으로 다른 유저들과 격차를 내버린 게 카오스로 하여금 ‘불균형’을 인지하게 하였고 당연히 더 나은 ‘균형’을 추구하는 카오스는 불균형을 없앨 가장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물론 카오스의 이 판단은 완벽한 대책은 아니었다.
시간 가속으로 새로운 업데이트를 앞당긴다고 해도 상혁과 다른 유저와의 차이는 절대 좁혀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카오스가 선택한 이 방법이 어느 정도는 통할 수 있는 건 결국 상혁이 아무리 대단해도 한 명의 유저에 불과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확실히 개별적인 차이는 더 벌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크게 보면 무수히 많은 유저들이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가면서 상혁과 다른 유저들의 차이가 좀 더 희미해질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일종의 물타기였는데······.
이건 엄밀히 따지면 상혁에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카오스가 정말로 원했던 건 개별적인 차이도 줄이는 것이었다. 카오스는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카오스의 판단은 틀렸다.
카오스는 상혁이 회귀한 존재하는 걸 몰랐기 때문에 너무나도 보편적인 기준에서 판단했고 결국 그 보편적인 판단은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었다.
‘카오스가 무엇을 원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아. 하지만······ 오라 시스템이 업데이트는 나한테 나쁠 게 없어.’
어차피 지금은 거의 모든 유저가 오라 시스템이 뭔지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상혁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한 시간 전쯤에 업데이트된 건가? 이거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엄청나게 바쁘겠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은 눈먼 ‘큐브 조각’들을 쓸어 담을 때였다.
* * * *
상혁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산상단의 상인 NPC들에게 지금부터 경매장에 올라오는 모든 ‘큐브 조각’를 싹쓸이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큐브 조각은 오라 업데이트가 된 순간부터 거의 모든 몬스터에게서 적당한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작은 조각 같은 아이템이었다.
큐브 조각을 26개 이상을 모아서 하나의 큐브를 완성할 수 있었다. 큐브 조각은 등급과 종류가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설사 등급이 낮은 걸 노린다고 해도 하나의 큐브를 완성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큐브를 완성하면 그것은 곧 ‘무작위 큐브’가 되었고 그 무작위 큐브를 돌려 큐브의 봉인을 해제하면 ‘오라 크리스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오라 크리스털이 바로 오라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오라 크리스털은 오라를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에너지원이었는데 이건 놀랍게도 거의 모든 것에 주입할 수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사용법은 유저의 ‘심장’에 주입해 ‘전신 오라’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팔이나 다리 같은 특정 신체 부위에 주입해 ‘부분 오라’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종류의 아이템이나 스킬에 주입해 ‘오라 강화’를 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건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라 크리스털의 등급과 종류에 따라 유지 시간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조건 한 번에, 한 개의 오라만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복해서 사용할 수 없었다.
큐브의 등급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오라 크리스털의 등급도 덩달아 높아졌기 때문에 당연히 등급이 높은 큐브 조각을 얻는 게 가장 좋았다.
하지만 적어도 현시점에 이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는 유저는 오로지 상혁뿐이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정보망을 총 동원해 NPC들에게 오라 시스템에 관한 걸 알아내는 중이었지만 업데이트된 이후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고 특히 상혁이 자신의 개인 조직인 비선을 총동원해 황혼의 땅과 지옥불 사막에서 열심히 정보 조작을 하는 중이라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가 힘들었다.
상혁은 거짓과 진실을 섞어서 교묘하게 정보를 비틀었다.
일단 유저들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큐브 조각이 이번 업데이트와 뭔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NPC에게 정보를 캔 이들은 큐브 조각을 잘 조합해서 맞추면 큐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란 정보까지 알아낸 상태였다.
적어도 여기까진 상혁이 조작한 정보와 일치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마지막 결과가 달랐다.
‘이번에 새롭게 떨어진 큐브 조각들을 모으면 큐브를 만들 수 있고 바로 그 큐브를 이용해 친선전을 치를 수가 있다.’
상혁은 큐브를 오라 시스템이 아닌 친선전 쪽으로 연결해버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조작된 정보를 추가로 흘렸다.
‘오라를 얻으려면 네임드 몬스터를 공략하고 낮은 확률로 떨어지는 오라 크리스털을 얻어야 한다.’
가장 결정적인 게 큐브의 조각이 풀리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상혁은 큐브의 특성상 아무리 대형 길드에서 작심하고 나선다고 해도 현 상황에선 하나를 완성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런 식으로 정보를 비튼 것이었다.
NPC들 사이에서 이런 정보가 돌기 시작하자 당연히 대형 길드들은 큐브를 만들 생각을 하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네임드 몬스터들 잡기 위해 움직였다.
물론 그 사이 호기심이 동한 개인 유저들이 큐브를 완성해보려고 했지만, 어차피 개인 단위론 오늘 하루를 꼬박 사냥해도 큐브를 완성할 수가 없었다.
특히 상혁이 이미 경매장에 올라오는 모든 큐브 조각을 싹쓸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매장을 통해 큐브를 완성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친선전과 오라 시스템······ 당연히 후자가 많은 유저들의 압도적인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친선전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몇몇 PvP 유저들뿐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상당히 소수인 그들이 큐브의 진실을 알아내려면 며칠은 걸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친선전은 큐브가 아닌 4개의 연계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자격’ 자체를 획득해야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지만 현재는 상혁이 워낙 정보를 이리저리 비틀어놔서 이 사실 자체가 거의 알려지질 않았다.
상혁은 이렇게 유저들의 눈과 귀를 막은 후 적어도 며칠 정도는 눈먼 큐브 조각들을 싹쓸이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며칠 후엔 진실이 모두 밝혀지겠지만 이미 그때가 되면 상혁이 엄청난 양의 큐브 조각을 챙긴 후일 것이기 때문에 큰 상관이 없었다.
핵심은 최대한 많은 유저가 ‘큐브 조각’의 가치가 매우 낮다고 생각하게 하여 그것을 경매장이나 위탁판매소에 던져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혹자는 그래 봤자 얼마나 많은 큐브를 구할 수 있겠냐고 반문하겠지만, 상혁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미 금산상단의 NPC들을 통해 경매장에서 특정 물건을 독점하는 요령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EL의 전체 유저 숫자를 고려했을 때 대략 절반 정도만 상혁의 의도대로 큐브 조각을 던져준다고 치더라도 상혁이 얻을 수 있는 큐브 조각의 양은 어마어마할 수가 있었다.
어차피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큐브 조각은 경매장에 계속 올라오게 되어 있었다. 가격이 좀 비싸질 순 있겠지만 어쨌든 생각보다 많은 유저가 아무 생각 없이 게임을 즐기는 편이었고 그런 이들은 별생각 없이 큐브 조각을 던지곤 했다.
‘초기 물량만 확 끌어당겨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이득을 챙길 수 있다.’
상혁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활용해 최대한 큐브 조각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원하는 대로 판을 짠 상혁은 더는 손쓸 게 없게 되자 한 발자국 물러서 잠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모든 게 상혁이 의도했던 대로 움직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금산상단의 NPC들은 미친 듯이 큐브 조각을 쓸어 담고 있었다. 등급이나 종류 같은 건 따지지 않았다. 심지어 가격도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높지만 않으면 모조리 구매했다.
정보 조작이 100% 다 먹히진 않았지만 적어도 정보에 어둡거나 눈치가 빠르지 않은 수많은 유저들에게 큐브 조각이 별 게 아니란 인식을 심어주는 단계까진 성공했다.
그 결과 여기저기에서 많은 유저가 아무 생각 없이 큐브 조각을 경매장이나 위탁판매소에 던졌고 상혁은 그런 물량을 전부 집어삼켰다.
상혁의 소화력은 ‘EL의 블랙홀’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막대한 자금력과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사재기 시스템까지 합쳐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몇몇 눈치 빠른 유저들이 상혁과 함께 큐브 조각을 사재기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상혁이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구축해놓은 수많은 NPC를 이용한 교차 사재기 시스템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기껏 운이 좋아 봤자 한 시간에 한, 두 개 정도 구하는 게 전부였다. 결국, 효율이 너무 안 좋았기 때문에 사재기를 마음먹었던 이들도 전부 나가떨어졌다.
‘좋아, 이 분위기라면······ 대략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신 나게 쓸어 담을 수 있겠네.’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재기는 이 정도면 됐고······ 그럼 난 최고급 큐브 조각을 구하러 가볼까?’
큐브 조각의 등급은 당연히 어디서 어떤 몬스터를 잡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돌거인 계곡. 그곳이라면 등급 높은 큐브 조각을 얻을 수 있겠지?’
돌거인 계곡은 영웅의 대지에 존재하는 한 사냥터였다.
그 계곡에선 돌거인들이 드문드문 등장했는데 이 돌거인들은 네임드몬스터는 아니었지만 네임드몬스터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몬스터들이었다.
평균 레벨 자체가 77로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당연히 어지간한 네임드몬스터보다 더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리씩 단독으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거인의 인내’ 스킬도 가지고 있고 방어력과 생명력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 잡기가 수월한 놈들이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은 영웅의 대지에서도 그다지 인기가 높았던 사냥터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고려했을 때 이보다 더 좋은 사냥터는 없다고 판단했다.
* * * *
파지지지직!
‘제우스의 번개’가 주입된 만년금골편이 새롭게 몸을 일으킨 돌거인의 목을 휘감았다.
돌거인은 키가 무려 7m에 이르는 대형 몬스터였지만 만년금골편은 손쉽게 놈의 목을 휘감았다.
기본적으로 돌거인은 움직임이 매우 느린 편이었다.
대신 한 방, 한 방 공격의 위력이 매우 강력하고 방어력과 생명력이 일반 몬스터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거기에 등급이 한 단계 낮은 A급이긴 했지만 ‘거인의 인내’ 능력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버티는 능력이 엄청났다.
맞을 거 다 맞으면서 공격하는 게 돌거인의 특기였다.
한 마디로 때릴 테면 때려보라는 식의 전투 방식이었는데······ 덕분에 상혁은 아주 손쉽게 아주 강력한 ‘첫 한 방’을 꽂아 넣을 수가 있었다.
드드드드드!
돌거인의 목을 분쇄해버릴 듯이 갈아버리는 만년금골편! 그 공격은 치명타 판정을 받으며 말도 안 되는 수준까지 위력이 증폭되었다.
끄어어어어어어어.
아무리 돌거인의 버티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상혁은 최초의 거인 사냥꾼이란 타이틀을 통해 ‘위에 공기는 다르냐?(A)’라는 상시지속 효과도 얻고 있었다.
이 효과는 거인류 몬스터를 상대할 때 거인의 인내 효과를 절반으로 감소시켜주었기 때문에 당연히 돌거인은 더 아프게 첫 한 방을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쿠쿠쿠쿵!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돌거인.
이 첫 한 방으로 놈의생명력 중 70%가 날아가 버렸다. 보통 유저들은 돌거인을 마치 네임드몬스터를 잡듯 한 마리당 30분에서 1시간씩 투자를 해 잡았지만, 상혁은 단 몇 초 만에 돌거인이 한쪽 무릎을 꿇게 하였다.
상혁이 돌거인 계곡을 사냥터로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에겐 자잘한 놈들을 몰이 사냥하는 것보다 이렇게 크고 거대한 놈을 하나씩 잡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 [37장] 시간 가속(加速)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