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장] 탑 랭커(Top Ranker) (1) >
@ 탑 랭커(Top Ranker).
검이 닿았다. 아니 스쳤다.
그런데 결과는······.
촤아아악, 콰드드드득!
또 한 명의 크루세이더 정예 유저가 몸이 두 동강 나며 쓰러졌다.
예외는 없었다. 블레이크의 검이 몸에 닿는 순간 모든 이들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실로 엄청난 파괴력! 무슨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블레이크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한 명의 크루세이더 유저가 쓰러졌다.
실제로 블레이크는 최초 자신을 막아섰던 10명의 정예 유저들을 불과 20초 정도 만에 정리한 후 곧장 길드 하우스의 정문을 박살 내며 길드 하우스 내부로 진입했다.
물론 크루세이더도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았다. 당장 20명의 정예 유저들이 황급히 블레이크를 포위한 후 곧장 공격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말도 안 되는 움직임으로 공격들을 피했다. 블레이크는 마치 모든 공격의 사각(死角)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교묘하게 스텝을 밟으며 몸을 이리저리 비트는 것만으로 거의 모든 공격을 피해버렸다.
간혹 블레이크의 몸에 공격이 적중하기도 했지만, 블레이크는 방어력도 남다른 건지 아니면 치명적인 공격은 모두 피하고 맞을만한 공격만 골라서 맞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어쨌든 아무렇지도 않게 버텨냈다.
강력한 공격은 피하거나 흘려버리고 적당한 공격은 그냥 몸으로 때운다. 그리고 그 와중에 휘두르는 검으로는 한 번에 한 명씩 적을 쓰러트린다.
말로만 들어도 뭔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방식의 전투였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그는 마치 양 떼 사이로 뛰어든 늑대, 아니 드래곤처럼 순식간에 양들을 집어삼켰다.
애초에 격이 다른 상대였다.
크루세이더의 정예들은 전부 40레벨 후반대의 레벨을 지닌 고레벨 유저들이었지만 결과는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오우거슬레이어가 움직이면 여지없이 한 명의 크루세이더 유저가 쓰러졌다. 그 순간에도 계속 긴급 지원 명령을 받은 크루세이더의 유저들이 길드 스킬인 ‘길드 하우스 귀환’을 사용해 계속 길드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치명적인 ‘최초의 한 방’ 공격이었다.
돌아오는 족족 그 자리에 쓰러지는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 블레이크는 광기가 어린 저승사자가 되어 끊임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몇 명이야?”
길드 하우스의 지하 2층에 있는 길드 창고 앞에 나타난 무토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히나오카에게 황급히 물었다.
그는 잠시 잠을 자려고 게임에서 나갔었는데 히나오카의 긴급 연락을 받고 재빨리 게임에 다시 접속한 상태였다.
“그, 그게······ 한 명입니다.”
“뭐? 한 명? 무슨 개소리야!”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 명이 맞습니다.”
“그럼 지금 한 명한테 우리가 개박살나고 있단 거야? 나보고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입니다.”
“무슨 그런 개소리가······.”
무토는 히나오카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크루세이더가 어떤 길드인가? EL이 오픈을 했을 때부터 자신이 정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 만든 길드였다.
일본 최고의 길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수의 실력 좋은 일본 유저가 길드에 모여들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길드가······ 유저 한 명에게 박살 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젠 믿기 싫어도 믿어야 했다. 왜냐하면, 믿기 힘든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콰아아앙!
지하 2층으로 내려오는 문을 박살 내며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 블레이크.
그가 등장하는 순간 무토는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무토는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었다.
“길드 마스터 마크······. 크루세이더의 무사시, 아니 무토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드디어 만났군.”
무토의 게임 아이디는 무사시였다.
어릴 때부터 마야모토 무사시의 팬이었던 무토는 자신의 아이디도 당연히 무사시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게임 속에서 꽤 실력이 좋은 검객이기도 했다.
무토의 옆엔 히나오카를 비롯한 크루세이더의 정예 유저 14명이 서 있었다.
단순히 머릿수로만 따지면 1명과 15명이 대치하고 있었지만, 실제 기세는 1명 쪽이 15명 쪽을 압도하고 있었다.
“너 이 새끼······.”
무토는 뭐라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그는 무려 200명 정도의 크루세이더 길드원들이 길드 하우스에서 제대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수의 힘을 절대적으로 믿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단, 한 명에게 자신의 길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뭐, 서로 살갑게 대화할 사이도 아니니 용건만 간단히 얘기할게.”
블레이크는 잔뜩 흥분한 표정인 무토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이 첫 번째야. 그리고 이후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두 번, 세 번······ 계속 연속해서 너희를 찾아올 거야. 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결과는 늘 오늘과 똑같을 것이란 사실이야.”
이것은 협박 같은 게 아니었다.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을 알리는 블레이크. 그는 사실 고지가 끝나기 무섭게 앞쪽으로 걸어나왔다.
드드드드득.
블레이크는 아무렇게나 쥐고 있는 오우거슬레이어로 바닥을 긁으며 15명을 향해 다가왔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이건 마치 블레이크 쪽이 15명이고 무토 쪽이 1명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심지어 무토마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크게 당황하며 곧장 입을 열었다.
“주, 죽여!”
무토가 소리를 치는 순간 오히려 블레이크가 한 박자 빠르게 15명을 향해 치고 들어왔다.
당연히 크루세이더 측도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던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블레이크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모든 게 그들보다 조금씩 빨랐다.
치이익, 서걱!
블레이크가 먼 거리에서 한껏 손을 뻗어 오우거슬레이거를 휘두르자 무토의 몸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무토는 워낙 먼 거리라 설마 이런 식으로 공격이 들어올 줄 몰랐었다. 그래서 아주 살짝 공격을 허용했다.
‘괜찮아. 살짝 스친 정도일 뿐이······.’
무토는 기습은 당했지만, 상대의 공격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얕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자기 생각을 다 끝내지도 못했다.
츠릿, 콰드드드득!
“허억!”
분명히 공격은 얕았다. 무토는 검이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간 감각을 확실하게 느꼈는데 그는 검이 정말 자신의 몸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고 기억했다.
그런데······ 검이 스치고 지나간 순간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그 상처에서 엄청난 위화감이 느껴지며 몸이 뒤틀려버렸다.
그와 함께 무토의 생명력도 100%에 0%로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이게 무슨?’
무토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기준에 따르면 조금 전 자신이 맞은 공격은 제대로 된 정타가 아니었다.
기껏해야 원래 위력의 10%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 ‘빗맞은’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 빗맞은 공격에 생명력이 전주 날아가 버렸다.
물론 무토는 방어 관련 능력은 하나도 가지고 있는 순수 딜러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도류(二刀流) 검객’이라 불리는 그의 클래스는 확실히 방어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너무나 확실하게 빗맞은 공격에 자신의 생명력이 모두 날아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쿠쿵!
몸이 완전히 뒤틀린 무토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치명타 세팅과 그것을 더 말이 안 되게 해주는 패시브 능력인 ‘선빵필승’.
사실 이런 조합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긴 했다. 이렇게 일본 최고의 근접 딜러 이자 크루세이더의 길드 마스터로서 온갖 고급 장비로 무장하고 있던 무사시가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특히 길드 마스터는 길드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그가 죽으면 두 가지 치명적인 페널티가 발동되었다.
첫 번째는 굳게 닫혀 있어야 하는 길드 창고가 그의 죽음과 함께 개방되어버린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길드 마스터는 일반 길드원들과 달리 길드전 도중에 죽으면 24시간 동안 접속을 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 순간 무토는 현실에서 애꿎은 게임 캡슐만 때려 부수고 있겠지만 어쨌든 그는 앞으로 24시간 동안 게임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 얘긴······ 사실상 크루세이더가 머리를 잃은 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무토가 쓰러지며 남은 크루세이더의 정예 요원은 14명이 되었다. 여전히 수적으로는 그들이 블레이크를 압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눈빛만 봐도 14명 쪽이 1명한테 잔뜩 겁을 먹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무토가 어이없게 쓰러진 후 그들은 더더욱 위축되어 있었다.
기세부터 완전히 찍혀 눌러진 14명······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블레이크를 쓰러트릴 가능성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 * * *
쿠쿵.
블레이크가 무토를 쓰러트린 이후 마지막 크루세이더 유저를 쓰러트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은 블레이크의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일단 블레이크를, 아니 상혁과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려면 무조건 최초의 한 방을 견딜 수가 있어야 했다.
치명타가 터지는 순간 말도 안 되게 뻥튀기되어버리는 이 최초의 한방을 버티려면 치명타를 당할 확률을 줄여주는 능력이나 아이템을 지니고 있어서 치명타를 최대한 억제하거나 혹은 아예 버티는 능력이 무지막지해서 치명타가 터져도 그걸 온전히 견뎌낼 수가 있어야 했다.
두 경우 모두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시점에서 상혁의 일격을 버틸만한 최소한의 조건을 가지고 있을만한 인물들은 흔히 사람들이 ‘랭커’라 부르는 이들 정도뿐이었다.
그들 정도는 되어야 어떻게 상혁의 첫 번째 일격을 버텨내고 정상적은 전투를 치를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크루세이더엔 랭커가 없었다.
랭커와 프로게이머는 조금 다른 기준이었다.
EL에는 아직 공식적인 프로게이머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거의 모든 경쟁 콘텐츠가 영웅의 대지에 존재했기 때문에 EL의 e스포츠화는 많은 유저가 영웅의 대지로 넘어온 후에야 시작되었었다.
그렇기에 현재 존재하는 프로게이머에 준하는 실력자들은 랭커라고 불렸다. 물론 이 호칭은 프로게이머들이 등장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최상위권 유저들을 지칭하는 호칭이 랭커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랭커 유저를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뜻밖에도 레벨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벨에는 거품이 껴있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유저들은 레벨은 기본으로 깔아놓고 거기에 여러 가지 판단 기준을 더해서 랭커를 선정했다. 이 랭커라는 기준 자체가 라온소프트에서 공식적으로 뽑아주는 게 아니라 몇 개의 대형 커뮤니티에서 자체적으로 선별해 매주 업데이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확도를 100% 신뢰할 순 없었다.
‘오, 이놈들 생각보다 많이 쌓아놓고 있었네.’
자신을 가로막은 크루세이더의 유저들을 모조리 일검에 갈아버린 블레이크는 활짝 열려 있는 크루세이더의 길드 창고로 진입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크루세이더의 길드 창고엔 꽤 비싸 보이는 물건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일단 블레이크는 망설일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자신의 공간 확장 가방을 열고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담기 시작했다.
어차피 오늘은 이러려고 온 것이었기에 특대형 공간 확장 가방을 완벽하게 비워온 상태였다. 블레이크의 공간 확장 가방은 마치 블랙홀처럼 길드 창고를 먹어치웠다.
물론 그냥 마구잡이로 담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블레이크는 차분히 물건들을 살펴보면서 쓸어 담고 있었다.
“엇!”
그러던 와중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박’이 하나 튀어나왔다.
‘칠용(七龍) 신전의 열쇠!’
블레이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투박하게 생긴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누구나 이걸 보면 단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이템 정보에도 ‘건곤단검(乾坤短劍)’이라고만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너무나도 이 아이템의 진정한 정체를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것은 앞으로 5년 정도만 지나면 탑랭커들이 몇억 골드를 주고서라도 구하려고 하게 될 아이템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4년은 더 있어야 이게 그곳의 열쇠라는 사실이 밝혀질 테니 당연히 지금은 그냥 무난한 유일 등급의 단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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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