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장] 인페르노 피라미드 (1) >
@ 인페르노 피라미드.
“이 부분······ 어때? 이건 우리도 생각하지 못한, 아니 생각은 했는데 도저히 시도를 해보지 못했던 거야.”
잠시 동영상을 멈춘 남자는 화면을 확대하며 동료들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DN 안에 생성된 커다란 회의실에 대략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이 이곳에 앉아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들을 이끄는 보스가 긴급 호출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모두 ‘핀란드’ 인이라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EL의 대형 길드 중 하나인 ‘테리쿨룸’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와, 검은 미라의 살아 있는 붕대가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어? 하자드, 네가 안 된다고 했잖아?”
하자드는 근접 암살 계열 고대의 지식을 지닌 유저였는데 그는 테리쿨룸에서 근접 딜러인 동시에 회피 탱커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안돼요. 아니,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아무리 회피율을 올려도 저 공격은 워낙 변수가 많아서 회피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세상은 넓네요.”
하자드는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계속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테리쿨룸은 살아 있는 붕대를 견뎌내기 위해 그것을 몸으로 맞고 버틸 수 있는 오로지 방어만을 위한 세팅을 한 전문 탱커를 한 명 데리고 갔었다.
아무래도 그렇게 방어만을 위한 유저가 한 자리를 차지해버리자 다른 곳에서 구멍이 날 수밖에 없었고 그건 결국 레이드의 난이도 상승으로 이어졌다.
“이게 끝이 아니다. 계속 보자.”
쿤은 계속해서 동영상을 재생했다. 화면 안에선 한 명의 유저가 두 자루의 단검만 들고 검은 미라를 상대하고 있었다.
이 동영상은 어제 실시간 방송으로 공개된 BJ질풍의 검은 미라 1인 레이드 영상이었다.
“허어······.”
“말도 안 돼······.”
“저걸······.”
테리쿨룸의 유저들은 검은 미라에 수없이 도전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동영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보통의 유저들은 대부분 ‘와, 잘 싸운다.’라고 생각하며 영상을 보겠지만 테리쿨룸의 유저들은 지금 BJ질풍이 보여주고 있는 이 모습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모습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영상의 길이는 28분이었다.
검은 미라는 나타난 지 30분이 지나면 모든 붕대를 풀어버리고 어둠의 령(靈)으로 변하는데 이렇게 되면 사실상 클리어가 불가능해진다.
검은 미라를 잡지 못하면 인페르노 피라미드의 입구를 열지 못하는 것이었기에 검은 미라는 무조건 30분 안에 잡아야 했다.
영상 속에서 BJ질풍은 정확히 27분 16초 만에 검은 미라를 쓰러트렸다.
테리쿨룸이 24분 만에 공략했던 걸 생각하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질 않았다.
영상이 끝났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이 받은 충격은 보통 사람들이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우린 지금까지 뭘 한 거지?”
“저 사람이 대단한 건지 아니면 우리가 병신 같은 건지······.”
“솔직히 저 사람이 대단한 거 같은데?”
“살아있는 붕대를 피한 건 둘째 치고 기껏해야 근접 계열 딜러 같던데······ 딜이 왜 그렇게 센 거야? 우리 셋이 죽을 고생을 하면서 딜을 넣은 것보다 더 강력한 딜이라니······ 진짜 말이 안 나온다.”
“근데 중간마다 계속 생명력을 회복하는 거 같던데······ 뭘로 한 거지? 표션을 마신 건가?”
“포션도 마시긴 했는데 포션말고 다른 수단으로도 회복하는 거 같던데?”
“정확한 건 모르지만, 회복은 물론이고 버프도 스스로 하는 느낌이었어. 도대체 몇 개의 고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냥 전천후 능력을 지닌 특별한 고대의 지식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탱, 딜, 힐에 버프까지? 도대체 저 유저가 못하는 게 뭐야? 저런 플레이가 가능한 거였어?”
“혹시 핵 아닐까?”
“처음엔 나도 핵일 수도 있단 생각을 했는데······ 한국의 BJ질풍이잖아. 쟨 핵일 수가 없어.”
“맞아. 그 문제는 이 유저가 거인의 동굴 솔플 하는 영상을 공개했을 때 이미 불거졌던 문제잖아. 그때 라온에서 핵이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확인까지 해줬었어.”
“거인의 동굴 때부터 보통 유저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보통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엄청난 괴물이잖아?”
테리쿨룸의 유저들은 모두 영상 속에 등장하는 BJ질풍을 질렸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건 아직 영상이 다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두 번째 영상.
그 영상 속에서 BJ질풍은 테리쿨룸이 벌써 보름째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던 거대화염전갈을 상대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지?”
“아닐 거야. 아니라고 해줘.”
“조용히 영상을 봐. 난 어제 실시간 방송으로 봤었어.”
“너도 봤어? 나도 봤는데······. 다들 그냥 보면 알 거야.”
이미 몇 명의 테리쿨룸 유저는 직접 영상을 봤거나 혹은 결과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일단은 조용히 있었다.
이번 영상의 길이는 23분으로 아까보다 짧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거대화염전갈이 자연발화 해 온 사방을 지옥불로 가득 채우게 되는 타이밍이 바로 등장하고 24분이 흐른 뒤였기 때문이었다.
즉, BJ질풍은 거대화염전갈이 자폭하기 전에 놈을 잡았다는 뜻이었다.
클리어 시간은 정확히 23분 22초.
자폭 시간을 앞두고 간신히 잡은 것처럼 보였지만······ 중요한 건 잡았다는 점이었다.
“참고로 이게 일곱 번째 도전이었어. 앞서 검은 미라는 두 번째 도전에 잡았고 말이야.”
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미쳤네. 미쳤어.”
“몰래 연습을 하다가 자신이 생겨서 방송을 시작한 거겠지? 제발 누가 그렇다고 좀 해줘······.”
“검은 미라까지는 어찌어찌 그렇다고 해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거대화염전갈은 아니지. 실수인지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유저는 자신이 받은 최초 킬 보너스까지 모조리 방송에서 공개를 해버렸어. 몰래 연습을 했건 안 했건······ 우린 저 유저 한 명에게 박살이 난 거야.”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애써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가슴 아픈 현실을 쿤이 냉정하게 얘기했다.
“내가 왜 다들 모여서 이 영상을 보라고 한 거 같아? 그냥 단순히 감상이라도 하자고? 아니야! 우린 그동안 너무 자만하고 있었어. 지옥불 사막으로 넘어와 그깟 별거 아닌 몇 마리 네임드 몬스터를 최초 킬 했다고 자만심에 빠져있던 거야.”
테리쿨룸의 유저들은 쿤의 말에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엔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계속 고민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우리도 바뀌어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난······ 너희에게 조심스럽게 제안을 하려고 해.”
쿤은 비장한 표정으로 주변의 동료를 천천히 둘러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테리쿨룸의 첫 번째 가입조건인 ‘오직 핀란드인이어야만 한다.’를 바꾸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조건을 유지한 상태론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는 게 힘들 것 같다.”
놀랍게도 쿤은 순혈주의를 버리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사실 원래 역사대로라면 테리쿨룸이 망하게 된 이유는 쿤이 끝까지 순혈주의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그 갈등이 테리쿨룸을 망하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쿤이 먼저 순혈주의를 버리자고 주장했다.
이건 정말 놀라운 변화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순혈주의를 버리지 않아 몇 년 후에 스스로 무너졌던 테리쿨룸이 순혈주의를 버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건 상혁의 전생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연히 이 변화를 이끌어낸 건 BJ질풍, 정확히는 상혁이었다. 상혁의 날갯짓이 거대한 태풍이 되어 EL의 세상을 휩쓸고 있었다.
테리쿨룸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길드와 유저가 변하고 있었다. 심지어 EL의 개발사인 라온과 EL의 신인 카오스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적어도 상혁에겐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상혁 입장에선 변화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았다.
하지만 사실 이런 변화는 상혁이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는 게 아니었다. 변화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는 건 더 어리석은 일이었기에 상혁은 변화 따윈 생각하지 않고 과감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
“결국, 내가 쓸만한 건 스콜피온 건틀릿 밖에 없는 건가?”
상혁은 어제 얻은 아이템들을 정리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상혁은 어제 8시간 정도를 열심히 달렸고 그 결과 결국은 인페르노 피라미드의 두 번째 네임드 몬스터인 거대화염전갈까지 쓰러트릴 수가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BJ질풍의 방송은 엄청난 대박을 쳤다.
푸 Tv 역사상 그런 대박 방송이 없을 정도였다. 아니, 지금까지 지구 상에 존재했었던 모든 개인 방송의 역사를 다 따져봐도 어제와 같은 대박 방송은 존재하지 않았다.
5시간 동안 상혁이 받은 별사탕은 무려 몇 억 단위를 넘어갔고 시청자 수는 중계방까지 합치면 무려 200만에 가까웠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종전 기록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결과를 내버렸다.
특히 BJ질풍이 일곱 번의 도전 만에 거대화염전갈을 잡아버리자 전 세계의 EL 유저들이 경악했다.
솔직히 혼자 레이드를 하는 것 자체도 엄청난데 지금까지 한 번도 잡히지 않은 거대화염전갈을 일곱 번의 도전 만에 잡아냈으니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큰 이슈가 됐으면 각종 포털 검색어 순위 1위에 순간적으로 BJ질풍이 올라갔을 정도였다.
“뭐, 첫술엔 배부를 순 없는 것이니까······ 이제 남은 건 다섯 마리인가? 하루에 세 마리 정도로 잡으면 대충 사흘에서 나흘 안에 정리할 수 있겠네.”
인페르노 피라미드는 리셋 주기가 열흘이었다. 3일 전에 리셋 되었다고 들었으니 앞으로 일주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상혁은 3~4번째 네임드를 오늘 잡아버리고 5~6번째는 내일 그리고 대망의 파이널 보스는 모레 잡아버릴 생각이었다.
누가 들었다면 상혁을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 일정이었다. 하지만 상혁은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3번째 네임드부터는 방송도 하지 않고 달릴 생각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1~2번째 네임드보다더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어제 방송이 엄청나게 대박이 나서 살짝 3번째 네임드까진 방송을 해볼까도 생각했었지만 결국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방송을 한다면 당장 쏠쏠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상혁에게 별로 이득 될 게 없었다.
어차피 지금 방송을 하는 건 라이브채널을 따내기 위한 밑밥에 불과했다.
라이브채널을 따내고 그 라이브채널을 계속 유지할 수만 있다면 매주 억 단위의 소득을 얻는 건 기본이었고 인기 있는 유료동영상 서비스만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해도 또 거기서도 억 단위의 소득을 얻을 수가 있었다.
괜히 상혁의 전생에 라이브채널이야말로 EL 최고의 꿀단지란 소리를 들었던 게 아니었다.
물론 전생의 라이브채널은 모두 길드 단위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개인이 엄청난 이득을 보진 않았었다. 하지만 상혁은 달랐다.
상혁은 겉은 길드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결국 알맹인 개인이었다. 그렇기에 라이브채널만 제대로 굴릴 수 있으면 엄청난 대박을 칠 수가 있었다.
“오늘은 아껴두었던 블레이크의 전투 동영상을 틀어줘서 어제의 여운을 조금이라도 이어가게 해줘야겠네.”
상혁은 어제 방송에서 워낙 대박을 쳤었기 때문에 오늘도 뭔가 작게라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블레이크가 천금전쟁을 치르며 마지막으로 찍은 전투 동영상이자 천외천의 비열함과 골드 러쉬의 허망함이 잔뜩 담겨 있는 그 영상을 녹방으로 틀어주었다.
그는 그렇게 방송을 틀어놓고 자신은 인페르노 피라미드에서 다시 레이드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세 번째 네임드와 네 번째 네임드였고 상혁이 예상하는 클리어 예상 시간은 대략 10시간이었다.
< [29장] 인페르노 피라미드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