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장] 정산 시간 (2) >
* * * *
전쟁이 끝났다. 놀랍게도 승자는 없었다. 천외천과 골드 러쉬는 오랜 협의 끝에 승패를 맺지 않고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다.
두 길드, 아니 두 라인에 속한 모든 길드는 대략 한 달간 전쟁을 치르며 엄청난타격을 입었다.
특히 천외천과 골드 러쉬가 입은 피해는 길드가 유지되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대단히 컸다.
실제로 천외천의 길드마스터인 천웅은 게임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거의 5억에 가까운 돈을 이번 길드전으로 날려버렸다.
그나마 그가 고가의 빌딩을 몇 채 가지고 있는 건물주라서 버틸 수가 있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천외천은 이미 망해서 사라졌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골드 러쉬라고 해서 다를 건 별로 없었다. 천외천처럼 이중으로 돈을 뜯기진 않았지만, 대금산이 혼자 가져가는 돈 자체가 무지막지했다.
이번 전쟁에서 대금산은 골드 러쉬 아니, 금 라인 쪽에서만 거의 1억 골드 정도를 뜯어갔다.
현금으로 따져도 무려 50억이 넘어가는 엄청난 돈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자는 오로지 한 명뿐이었다.
대금산 혹은 블레이크라 불리는 유저······ 상혁이야 말로 이번 전쟁의 진정한 승자였다.
심지어 상혁의 정산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다.
대금산 같은 경우는 양쪽 길드에 대략 1~2천만 골드씩 더 받아야 할 돈이 있었고 블레이크 같은 경우는 천외천에게 현물로 700만 골드를 받게 되어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천외천과 골드 러쉬······. 전쟁을 시작하기 전의 두 길드는 유저들 사이에서 무조건 EL길드 중 탑10에 들어가는 길드들이라고 평가받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엔 탑10은 고사하고 탑30에도 들어가기가 힘들어 보였다.
그만큼 많이 흔들리고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이미 목록을 다 넘겨드려서 미리 검토를 해보셨겠지만, 혹시라도 가격측정이 잘못된 것 같은 물건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공정하게 다시 가격검증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태민은 상혁에게 천외천의 길드 창고를 개방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듯 얘기했다. 이미 천외천과 상혁(블레이크)은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합의를 끝냈고 그것을 맹약의 서를 통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렇기에 태민이 물건을 빼돌린다거나 혹은 물건의 가격측정을 이상하게 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목록상에서는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물건들을 직접 보고 이상한 점이 있다면 그때 이의를 제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태민은 갑자기 늙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게임 속의 캐릭터가 변했을 리는 없었다. 다만······ 그의 어투나 심리상태가 매우 고단한 상태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그그긍, 철컥!
천외천과 같은 대형 길드는 이런 길드 창고를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천외천은 그동안 꾸준히 길드 단위 레이드를 한 길드였기 때문에 제법 괜찮은 아이템들을 많이 모아놓고 있었다.
물론 상혁의 기준에선 그냥저냥 평범한 아이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탐이 나는 몇 가지 아이템도 있긴 했다.
‘다른 건 대충 챙겨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상혁이 700만 골드를 현물로 받겠다고 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 천외천의 창고에 있는 이 물건 때문이었다.
천외천의 길드 창고에 들어가자마자 곧장 그것을 찾았다.
원래는 이런 곳에 처박혀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아직은 보석세공의 명장(名匠)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생산계열을 선택한 유저들의 등급은 ‘견습공 - 숙련공 - 장인 – 명장 – 천장(天匠) - 신장(神匠)’으로 나뉘었는데 이 물건의 가치는 무조건 명장 이상은 되어야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현재 유저들 사이에선 명장은 고사하고 장인 등급에도 도달한 유저가 별로 없었다. 사실 생산계열의 등급을 올리는 게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기 때문에 장인급만 되어도 상당히 대우를 받았었다.
‘섬광(閃光)의 흑안(黑眼)! 천외천 애들은 이걸 그냥 평범한 유니크 등급의 보석형 장신구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처박아 둔 것이겠지?’
섬광(閃光)의 흑안(黑眼) [유일(Unique)]
- 검은색 보석 안쪽에서 번쩍이는 섬광은 이 보석이 매우 특별하다는 걸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준다. 다만 그 특별함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기본 능력치] 모든 능력치 +7
[특수 능력치] 모든 속성 저항력 +20%, 이동 속도 +10%
[특수 효과] 없음.
[아이템 스킬] 없음.
‘무난하다 못해 구려 보이기까지 한 능력치. 그렇기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나마 등급이 유니크니까 대충 70만 골드 정도로 가격을 책정했을 것이고 막상 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데 등급은 높으니 창고에 던져 놓은 것일 거야.’
상혁은 을 검은색 보석을 집어 들고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이것은 장신구 슬롯에 장착이 가능한 보석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 보석의 진짜 모습은 이게 아니었다. 지금 이 상태는 가공 전의 상태였다.
즉, 원석(原石)이란 뜻이었다.
이 섬광의 흑안을 보석 세공 기술을 이용해 세공하면 ‘섬광의 반지’, ‘섬광의 목걸이’, ‘섬광의 귀걸이’(2개)를 만들 수 있었다.
이 네 개의 장신구는 일명 섬광 세트라고 불렸는데 등급은 유니트 세트 등급의 아이템이었지만 상혁이 회귀를 하기 전까지도 최고의 장신구 세트 ‘베스트 5’에 늘 들어가던 최고의 장신구 아이템 중 하나였다.
그 이유는 섬광 세트가 가지고 있는 세트 옵션 때문이었다. 이 세트 옵션이 워낙 특별하고 좋아서 대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섬광 세트의 가격은 시간이 갈수록 계속 올라갔었다.
재료가 되는 섬광의 흑안이라도 구하기가 좀 쉬우면 가격이 어느 정도 올라간 후 멈출 텐데······ 이 섬광의 흑안 자체가 매우 구하기가 힘든 보석이었다.
준 네임드 몬스터로 분류되는 놈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던 섬광의 흑안은 그냥 안 나온다고 보는 게 좋을 정도로 획득할 수 있는 확률이 너무나 낮았다.
로또 당첨확률보다도 훨씬 더 낮았으니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 밝혀진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은 이게 그렇게 귀한 것이란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섬광의 흑안 하나면 섬광 세트 장신구 두 개를 만들 수 있다. 그 얘긴······ 적어도 2세트 효과는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섬광 세트는 2세트, 3세트, 4세트 효과가 모두 굉장히 좋았지만, 특히 더 유저들의 사랑을 받은 건 2세트 효과와 4세트 효과였다.
한 개를 구했으니 이제 하나만 더 구하면 대망의 섬광 4세트를 완성할 수가 있었다.
‘눈먼 흑안이 경매장에 올라오길 빌어야 하는 건가?’
이미 경매장에서 일하는 금산상단의 NPC들에겐 섬광의 흑안은 가격과 상관없이 사라고 설정을 해놓은 상태였다.
아직까진 눈먼 섬광의 흑안이 올라오지 않았지만 그게 올라올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상혁은 그렇게 제일 먼저 섬광의 흑안을 챙긴 후 다시 창고를 둘러보았다. 섬광의 흑안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챙길만한 건 대부분 재료 아이템들이었다.
쓰임새는 잘 모르지만, 등급이 높은 고가의 재료 아이템들······ 천외천은 그것들을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창고에 쌓아놓고 있었다.
상혁은 그중에서 나중에 더 귀해질 재료아이템들만 선별해서 모조리 쓸어 담아버렸다.
어차피 이곳에 쌓여 있는 완성형 아이템들은 그다지 좋은 게 별로 없었다. 이미 이곳에 있는 아이템들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들을 다수 가지고 있는 상혁이었기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겨우 700만 골드를 맞춘 상혁은 창고 밖으로 나왔다. 상혁이 볼 때 천외천의 길드창고는 이제 속이 빈 강정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물론 태민에게 그걸 얘기해주진 않았다.
“너무 물량이 많아서 가방에 담지 못한 건 창고 안에서 바로 은행으로 쐈습니다.”
창고에서 은행으로 물건 즉시 옮기는 서비스는 유료라 골드가 들어갔지만 상혁이 그 정도 골드 소모를 망설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네, 방금 전송 요청 메시지가 떠서 모두 인가해드렸습니다. 밖에서 대충 계산해보니 몇천 골드 모자라신 거 같던데······.”
“뭐, 이 정도면 됐습니다. 남는 금액은 제가 포기하죠.”
“그럼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것이겠죠?”
“네, 끝났네요.”
“마지막이니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뒤통수를 친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선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태민은 솔직하게 얘길 했다. 지금 상황에선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전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씁니다. 뒤통수를 맞으면 그에 따라 복수를 하면 되는 것이고 도움을 받으면 은혜를 갚으면 되죠. 단순하게 생각하시면 돼요. 이 전쟁······ 천외천이 이길 수도 있던 거였어요.”
상혁의 말을 듣는 순간 태민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만약 태민이 블레이크과 대금산이 동일인물이었다는 걸 알았다면 더 확실하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겠지만, 모습은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다른 블레이크와 대금산이 같은 사람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천외천으로부터 뜯어낼 걸 다 뜯어낸 상혁은 대금산으로 변해 골드 러쉬와 천외천으로부터 마지막 잔금을 모두 송금받았다.
상혁은 이번 전쟁에서 순수하게 골드로만 거의 1억 2천만 골드 정도를 남겨 먹을 수가 있었다. 이건 재룟값이나 인건비를 제외한 순이익이었다.
그리고 상혁은 전쟁이 일어나는 한 달 동안에도 하루에 두 시간 정도씩은 시간을 빼서 거인의 동굴 마킹 버스도 계속 운행했다.
꾸준히 BJ 질풍의 인지도를 쌓아놔야 나중에 블레이크의 전투 동영상을 공개했을 때 더 많은 파급력을 얻을 수 있었고 솔직히 수입도 하루에 10~15만 골드 정도라면 상당히 큰 편이었다.
이렇게 모든 걸 다 정리한 상혁은 EL에서 로그아웃한 후 DN에서 그동안 모은 동영상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이미 ‘원’ 길드는 만들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건 BJ질풍이 자신의 소속 길드를 밝히고 그 길드에 같이 소속되어 있는 블레이크를 간단히 소개한 후 오늘 편집한 동영상을 하나씩 공개만 하면 되었다.
조만간 LGN에서 라이브채널을 은밀히 선정할 테니 그 전에 확실하게 고정 시청자들을 만들어놔야 했다.
* * * *
[개대박! 뭐야 이거?]
[와~ 이게 바로 그 소문의 블레이크야? 쩌네.]
[나 팬티 젖어서 갈아입는 중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불멸의 용병이라 불릴만했네. 천외천도 미친놈들이지 이런 애를 왜 버린 거야?]
[소문 못 들었냐? 저 블레이크가 골드 먹는 하마였다고 하더라.]
[솔까 이 정도로 싸워주는 용병이라면 아무리 골드 먹는 하마라도 안고 갔어야지.]
[와, 개쩐다. 방금 공격들 다 흘려버리는 거 봤어? 이게 가능한 거였어?]
[다른 게임에서 프로게이머하다고 넘어온 애들이 간혹 타이밍이 잘 맞으면 저런 식으로 방어하는 걸 보긴 했었는데······ 얜 그냥 마치 스킬처럼 계속 사용하네.]
[저게 스킬이 아니라고? 그게 말이 되는 거야?]
[말이 됌. 예상컨대 최소한 VRA가 200대 후반인 거 같음. 한 마디로 천재임.]
[와 눈 정화 되네. 혼자 적들을 도륙 내고 있어. 골드 러쉬라면 그래도 좀 유명한 길드 아니었어?]
[작업장 길드인데 실력은 어디 가서 안 빠지지.]
[아마 작업장 길드 중 탑일 걸?]
[노노, 이번 천금전쟁으로 다른 작업장 길드가 치고 올라감. 골드 러쉬는 완전 하락세.]
[그래도 저력이 있어서 쉽게는 안 무너질걸?]
[근데 저 블레이크란 유저 클래스가 뭐야?]
[딱 보니 검사 계열이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검사 계열 유저 중 가장 세다. 와, 진짜 한 번만 파티하고 사냥 좀 같이 해보고 싶어지네.]
[BJ질풍이랑 같은 길드라고 하던데······ 저 길드 유저들은 왜 다 저렇게 괴물 같아?]
[소수 정예 길드인 듯.]
[나도 들어가고 싶다.]
[가입 신청하면 받아주려나?]
[너 같은 좆밥을 왜 받아줘.]
[닥쳐 너보단 나아 병신아.]
······
······
시청자들의 얘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문을 듣고 시청자들이 마구 몰려오고 있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시청자.
이대로라면 푸 TV의 최고 시청자 수를 갱신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 [27장] 정산 시간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