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인군단-50화 (50/127)

< [26장] 예상했던 그대로. >

@ 예상했던 그대로.

“죄송하지만 전 이게 편해요. 어떤 말씀인지도 잘 알고 어떤 조건인지도 잘 알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네요.”

상혁의 대답을 들은 태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정도 되는 실력자가 용병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떤 마음인지 아셨으니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태민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이런 걸로 구질구질하게 붙잡는 건 그의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런다고 바뀔 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용병으로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싸워드리죠.”

“감사합니다. 저도 제대로 정산해서 입금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적어도 소모품 정도는 저희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블레이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물건을 사서 자기한테 주겠다는데 그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 그리고 혹시 전투조를 옮겨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디로요?”

“A-S 조입니다. 저희 길드 최고의 정예들이 모인 전투조죠.”

‘역시 아직 천외일조는 안 만들어진 상태군.’

상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입을 열었다.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요.”

“말씀해 보세요.”

“조는 어디에 속해도 상관이 없는데 대신 전투가 시작되면 제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 날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 전투 스타일상 팀플레이는 별로 맞지가 않거든요.”

“아······ 프리롤을 원하시는 건가요?”

“전투 시에만 그러면 됩니다. 비전투시에는 당연히 조장의 명령에 따를 것이고요.”

태민은 상혁의 말을 듣고 가만히 다른 길드원이 촬영한 상혁의 전투 동영상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그 동영상에서도 상혁은 홀로 싸우는 게 매우 익숙해 보였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단,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는 명령에 따라주실 수 있으시겠죠?”

“그 정도 융통성은 당연히 있어야죠.”

“그럼 됐네요. 제가 미리 전달해 놓을 테니 합류만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이견은 없었다. 어차피 둘 다 원하는 게 같았기에 대화는 술술 잘 풀렸다. 이렇게 태민과의 만남을 간단히 정리한 상혁은 원래 하려고 했던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길드 사무소를 찾아갔다.

물론 당장은 길드를 만들지 못했다. 용병 일을 하려면 길드에 소속되어 있으면 안 됐다.

그래서 상혁은 일단 길드 설립 허가서만 구매해놓고 용병 일이 끝나면 그 허가서에 사인해서 곧바로 길드를 생성할 생각이었다.

‘길드 이름은······ 원(One)으로 하자.’

이번에도 역시 길드 이름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어버렸다. 다행히 원이란 이름의 길드는 없었다.

5만 골드를 주고 길드 설립 허가서를 산 상혁은 그걸 챙긴 후 길드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길드를 만드는 것도 상당히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길드가 마구 난립하진 않았다.

오죽했으면 길드를 만들었다가 망해서 길드 타이틀만 파는 중고 길드 거래 사이트까지 만들어졌을 정도였다.

길드 설립 준비까지 끝낸 상혁은 다시 천외천으로 복귀했다. 한 번의 활약으로 상혁은 대우 자체가 달라졌다. 특히 태민은 상혁을 소속 전투조를 ‘A-S’ 조로 바꿨는데 이 조가 바로 현재로선 천외천에서 가장 뛰어난 길드원들이 모여 있는 조였다.

나중에 천외일조가 탄생할 때도 거의 이 조의 70% 정도가 천외일조로 옮겨갔을 정도였다.

실력이 좋은 조로 옮겼다는 건 결국 더 강한 놈들하고 싸울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상혁은 뭐가 됐건 신 나게 날뛸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었다. 태민이 제대로 판가지 깔아준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그냥 마음 편하게 싸우기만 하면 되었다.

블레이크 출격!

천금전쟁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 * *

“확실한 거 맞지?”

“네, 확실해요. 이미 얘긴 모두 끝냈어요. 이걸 어기면 맹약의 서가 발동하는데······ 설마 그가 자신의 계정이 통째로 날아가는 걸 걸고 거짓말을 하겠어요.”

골드 러쉬의 최고 전투조인 갑 조를 이끌고 있던 흑구는 옆에 있던 같은 갑 조에 소속되어 있던 동생에게 얘길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외천과 골드 러쉬의 길드전은 결국 천라인과 금라인의 대규모 연합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천외천과 골드 러쉬가 길드전을 시작하고 정확히 열흘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도 열흘이 더 지난 지금······ 연합 전쟁의 양상은 생각보다 더 팽팽했다.

무려 스무날 동안 치열하게 치고받고 싸웠지만, 특별히 우세를 점칠만한 상황이 나오질 않았다.

그나마 초반엔 골드 러쉬가 좀 밀어붙였었는데 그마저 천외천에서 괴물 하나가 튀어나오면서 다시 균형이 맞춰졌다.

“블레이크······ 이 개새끼 오늘은 기필코 작살을 낸다!”

흑구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등장한 괴물 용병 블레이크. 그가 모든 걸 망쳐버렸다. 지금까지 용병 블레이크가 기록한 킬 수는 무려 1,147킬이었다.

일개 용병이 기록할만한 수치의 킬 수가 아니었다.

사실상 블레이크 때문에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틀린 게 아닐 정도였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죽이면 블레이크를 천외천에서 떼어낼 수 있었기에 골드 러쉬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시도를 했었지만, 그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 대가로 헌납한 게 무수히 많은 킬 수였다.

심지어 이 킬 수는 골드 러쉬 뿐만 아니라 천외천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을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계약 내용대로라면 천외천은 블레이크에게 천만 골드가 넘는 돈을 지급해야 했다. 이건 대금산이 뜯어가는 돈만큼이나 큰 액수의 돈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천외천 내부에선 인제 그만 블레이크가 죽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도 대단히 많았다.

노골적이진 않았지만, 은근히 블레이크가 속한 천외일조를 위험하고 치열한 전투에 더 자주 투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블레이크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오히려 천외일조의 다른 조원들이 블레이크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아남았을 정도였다.

결국, 태민은 고민 끝에 블레이크와 합의를 다시 해서 5백만 골드는 골드로 주고 나머지 5백만 골드는 그만큼의 값어치를 지닌 현물로 주기로 했다.

가뜩이나 이틀에 한 번씩 대금산에게 100~200만 골드씩 뜯기고 있는 천외천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얼마나 골드가 없었으면 천웅과 태민이 현실에서 자신의 돈으로 골드를 따로 구매해 골드를 조달하고 있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진짜 일주일도 더 못 버틸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태민은 어쩔 수 없이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시나리오를 확인해보자. 그러니까 우리가 적당히 놈을 유인하면 천외일조 애들이 알아서 뒤쪽으로 빠질 테니 그때 우리가 놈을 포위해서 조지면 된다는 거지?”

“네, 맞아요. 아무리 블레이크가 불멸의 용병이라고 불린다고 해도 갑 조 전원이 포위해서 조지면 무조건 작살 낼 수 있을 거예요.”

“하긴 아무리 블레이크라고 해도 그건 못 견디겠지. 근데 천외천 놈들은 왜 갑자기 얠 포기한 거야?”

“그게 정확한 사실은 저도 모르는데······ 언뜻 듣기엔 블레이크에게 지급하는 골드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답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블레이크를 퇴장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 같아요.”

“미친놈들······ 똑똑한 척은 졸라 하더니 이제 와선 나보다 더 무식하게 행동하네.”

“호오, 형은 형 자신이 무식하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닥쳐 이 새꺄.”

흑구는 옆에 있던 후배의 머리를 가볍게 후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아. 오늘이야말로 그동안 당했던 걸 갚아줄 절호의 기회다. 블레이크 이 씹어 먹을 놈······ 오늘 한 번 제대로 담가보자.”

스스스슥.

흑구의 말과 함께 갑 조의 조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구를 포함한 14명의 정예 길드원들. 그들의 실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천외일조한테만 무려 세 번이나 박살이 났었다. 그 와중에 블레이크한테는 대부분 2~3번씩 죽어본 경험이 있었다.

특히 흑구는 블레이크한테 너무나 집요하게 세 번이나 연속으로 처참하게 당해서 트라우마가 생길 지경이었다.

‘이번만큼은 절대 당하지 않는다!’

약속한 시간이 불과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지금······ 흑구는 이를 갈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아, 진짜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천외일조의 소속이자 천외천 길드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인 제티는 처음부터 이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솔직히 제티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천외일조의 유저들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길드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제티야. 어쩔 수 없어. 나도 솔직히······ 블레이크님을 이렇게 쳐내는 건 아닌 거 같지만 어쩌겠냐······ 길드의 부담이 너무 심하다는데······.]

[그래도 형 이건 너무하잖아요. 솔직히 우리가 블레이크님의 도움을 얼마나 받았어요? 근데 이렇게까지······.]

[야, 착한 척은 그만해. 까라면 까는 거지 뭘 그리 말이 많아. 솔직히 블레이크 그 양반이 받아가는 돈이 얼만데······ 오히려 그 양반이 우리에게 고마워해야 한다고.]

천외일조의 모든 유저가 블레이크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수 이상의 유저가 블레이크를 시기하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하긴 액수가 너무 크긴 하더라. 천만 골드래. 그거 지금 현금 시세로 따지면 거의 5억 돈은 될걸? 아무리 잘 싸워준다고 해도 한 달도 안 돼서 5억을 뜯어가는 건 도둑놈이지.]

[5억? 진짜야? 미쳤네. 미쳤어.]

[하지만 그런 계약을 인정한 건 우리 쪽이었잖아요.]

[순진한 소린 그만하고 하기 싫으면 그냥 미리 빠져. 괜히 일 망치지 말고.]

제티가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일명 ‘가지치기’ 계획은 실행된 상태였고 이대로라면 블레이크는 매우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후우······ 결국 나도 선택을 해야 하는 건가?’

제티는 자신을 나무라는 동료들의 채팅을 바라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

천외일조와 갑 조의 충돌.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충돌이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적어도 시작은 그랬다. 그런데······ 전투가 진행되며 약간 상황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천외일조의 전투 방식은 블레이크가 혼자 미쳐 날뛰고 천외일조의 다른 조원들은 블레이크가 만든 틈을 파고들어 이득을 보는 식이었다.

그렇다 보니 블레이크가 혼자 싸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그림이긴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천외일조의 다른 조원들이 블레이크가 만들어낸 틈을 노리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 자꾸 바깥쪽으로 돌았다.

그리곤 어느 순간······ 마치 낙오라도 된 것처럼 모두 사라졌다.

진짜 혼자가 되어버린 블레이크.

골드 러쉬 갑 조의 조원들은 그런 블레이크를 둥글게 포위하며 도주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졸지에 블레이크는 14명의 적에게 포위를 당한 상태가 되었다. 누가 봐도 이건 블레이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블레이크! 이렇게 만나니까 너무나 반갑구나.”

흑구는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블레이크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는 이미 블레이크를 잡아서 자신의 앞에 무릎이라도 꿇린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블레이크가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참······ 어쩜 이렇게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의 웃음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자신이 예상한 그대로 흘러갔고 그게 너무나 노골적이라 웃음이 나온 것이었다.

“네놈도 죽을 때가 되니까 헛소리를 하는구나.”

사실 흑구는 이렇게 블레이크를 한 번 죽인다고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가 풀릴 것 같지가 않았다. 솔직히 용병으로 죽어봤자 받는 페널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말을 길게 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스트레스를 좀 풀어보려는 것이었다.

“그놈참 혓바닥은 여전히 기네.”

블레이크는 흑구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늘 그랬다. 전생에도 흑구는 꼭 중요한 순간에 쓸데없이 혀를 놀렸었다.

“뭐?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

흑구의 긴 혓바닥이 계속 출렁거리는 그때 상혁은 재빨리 조합카드를 꺼내 연달아 자신의 몸에 박아 넣었다.

지이이잉, 번쩍! 번쩍!

그 순간 갑 조의 조원들은 전투태세를 갖추며 언제라도 달려들 준비를 끝냈다.

흑구 역시 지금은 혓바닥을 놀릴 때가 아니란 걸 깨닫고 곧장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상혁은 그 사이에 이미 도핑(?)을 끝내버렸다.

“너희 놈들이 작당해서 만들어준 내 죽을 자리를 만들어준 건 고마운데······ 어쩌냐? 난 아직 죽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스르르릉, 채앵!

오우거슬레이어를 꺼내 들며 사악하게 웃는 블레이크.

모든 게 그가 예상했던 그대로였기에 별로 당황스럽거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기다리기까지 했었다. 그래야 명분이 생기고 명분이 생기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졌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신 나게 칼춤이나 한번 추면 되는 상황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건 없었다. 자신에게 득이 되면 미련없이 서로 뒤통수를 치며 자신의 이득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곳······.

그런 비정한 세상이 바로 EL이었다.

- 2권 끝 -

< [26장] 예상했던 그대로. > 끝

ⓒ 성진(成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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