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 전설의 출현 (2) >
‘일단 조금만 지켜보자.’
정식 길드원이 아니라 임시 길드원이었던 용병에겐 사실상 발언권이 없었다. 그들은 그냥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존재들이었다.
실제로 용병 일을 하는 유저들은 대부분 초짜를 간신히 벗어난 중간레벨이 유저들이었다. 제대로 된 상위 레벨 유저들은 굳이 용병 일을 하지 않아도 다른 할 일이 많았다.
중급 유저들이 용병일을 하는 이유는 적당히 싸우다가 누울 자리를 찾아 한 번 정도만 누워주면 몇천 골드를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엄한 곳에서 사냥하다가 죽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이득이었다.
골드 러쉬 쪽의 유저가 상혁, 아니 블레이크를 보면 머리 위에 붉은색 홀로그램이 떠 있었다. 이 홀로그램은 해당 길드의 길드 마크였는데 바로 이게 길드전 표식이었다.
용병도 엄연히 계약에 의한 임시 길드원이었기 때문에 표식이 떠 있는 게 당연했다.
반대로 골드 러쉬의 유저 머리 위에도 똑같이 길드 마크 표식이 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주위를 잘 살피세요. 언제 어디서 골드 러쉬 길드원이 나타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합니다.”
얼음 계곡으로 이동한 후에도 김성훈은 계속 조원들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파티를 이끌고 있었는데 보통 길드들은 이런 식으로 두 개의 파티를 하나로 묶어서 전투조 하나를 만들었었다.
인원수가 이보다 늘어나면 빠른 이동이 힘들어졌고 또 인원수가 이보다 줄어들면 자칫 순식간에 전멸당할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전투조는 기본적으로 두 파티 정도로 유지되었다.
간혹 정예들을 모아서 한 파티로 구성하기도 했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일 때나 적용되는 경우였다.
현재 천외천은 생각보다도 더 강한 골드 러쉬의 전투조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당하는 중이었다.
‘아마 갑, 을, 병, 정······ 이렇게 네 개 전투 조가 거의 휩쓸고 다녔었지? 특히 갑 조가 가장 대단했지. 근데 내가 빠졌으니 좀 약해졌으려나?’
전생에 블레이크는 골드 러쉬의 전투조 중 가장 뛰어난 이들만 모아놓은 조인 갑 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블레이크의 기억으론 당시의 갑 조는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전투조였다. 심지어 천외천이 갑 조를 잡기 위해 조직한 천외일조(天外一組)마저 갑 조에게 박살이 났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천외일조는 만들어지지 않았겠네. 천외일조에 용병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혹시 좀 활약해주면 천외일조에 껴 줄려나? 그러면 재미있어질 거 같은데······.’
블레이크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다른 조원들과 함께 얼음 계곡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블레이크도 예상하지 못한 손님들이 앞쪽에 나타났다.
[골드 러쉬입니다!]
‘응? 여기에 골드 러쉬가 나타났다고?’
블레이크가 알기에 이 근처에 골드 러쉬의 작업장은 없었다. 그런데도 골드 러쉬가 나타났다면 그건 로밍을 돌며 천외천 길드원을 사냥하는 전투조일 가능성이 높았다.
‘로밍을 돌 정도라면 최소 정 조 혹은 무 조 정도는 된다는 뜻일 텐데······. 이거 오늘 제대로 칼춤 한 번 춰야 할지도 모르겠는걸?’
로밍은 함부로 돌다간 오히려 역으로 토벌을 당할 수 있었다. 특히 지금 블레이크가 있는 얼음 계곡은 천외천 쪽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런 곳에 로밍을 왔다는 건 당연히 실력이 뛰어난 조일 가능성이 높았다.
[모두 전투 준······.]
김성훈이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골드 러쉬쪽이 먼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라면 저쪽이 먼저 발견하고 움직인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나마 늦게 발견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김성훈을 비롯한 A-4 전투조의 조원들은 가까스로 전투 준비를 할 수는 있었다. 다만 선공권은 천외천이 아닌 골드 러쉬가 가져갔다.
번쩍! 번쩍!
당연히 필드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가장 먼저 사용하는 기술은 일명 메즈라 불리는 군중 제어기술이었다.
특히 전투조 단위의 싸움에선 누가 먼저 군중 제어기술을 제대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골드 러쉬가 먼저 천외천 쪽에 날린 두 개의 군중 제어기술이 얼마나 제대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초반 전투의 양상이 확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골드 러쉬가 급하게 날린 두 개의 군중 제어기술 중 하나만 광역기술이란 점이었다. 둘 다 광역기술이었다면 자칫 천외천 쪽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했을 수도 있었다.
쩌저저저저적!
천외천 유저 중 대략 5명 정도가 군중 제어기술에 휘말리며 양발이 바닥에 얼어붙었다. 이 정도라면 그나마 선방한 것이었다. 특히 천외천 쪽도 곧바로 군중 제어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시작 자체는 골드 러쉬가 60 그리고 천외천이 40 정도로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동영상 녹화 시작!’
당연히 블레이크도 군중 제어기술에 휘말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상황에서 여유 있게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
‘BJ질풍으로 끌어모은 시청자를 블레이크의 동영상으로 사로잡는다!’
스르릉, 챙!
동영상 녹화를 시작한 블레이크는 그 상태에서 오우거슬레이어를 뽑으며 전방을 바라보았다.
골드 러쉬와 천외천이 서로 군중 제어기술을 주고받으며 제대로 충돌한 상태였다. 이 상황이라면 진형이나 전술 같은 건 별로 의미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전투조 단위의 싸움은 진형이나 전술 같은 건 거의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군중 제어기술이 기가 막히게 들어가지 않는 이상 지금처럼 서로 뒤엉켜 싸우는 난전(亂戰)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난전 수칙 하나······ 동료를 버려라!’
블레이크는 이런 난전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피잉, 파파파팟!
블레이크는 ‘블레이드 나이트’의 영혼스킬 중 하나인 ‘검광난무(劍光亂舞)’를 사용하며 전장에 뛰어들었다. 사정없이 사방을 마구 베어버리는 검광난무······ 언뜻 보기엔 동료까지 모조리 베어버릴 것처럼 보였지만 어차피 시스템적으로 동료로 인식되는 같은 조원들은 검광에 휘말려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촤아아아아악!
피해를 입는 건 오로지 적대, 전투 상태인 골드 러쉬의 유저들뿐이었다.
동료를 버리란 의미는 이게 아니라 바로······ 동료를 구하거나 도와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그저 적을 베고 또 베는 게 가장 좋았다.
바로 지금처럼!
서걱, 서걱! 파아아앗!
블레이크는 등 뒤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적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들고 있던 대검을 정말 무식하게 휘둘렀다.
이런 움직임이 가능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그가 ‘블레이드 나이트’라는 근접 난전에 특화된 고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고 두 번째는 엄청나게 높은 VRA를 바탕으로 꾸준히 쌓은 그의 전투 감각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살아있다는 점이었다.
블레이드 나이트의 영혼 스킬 중엔 ‘촌극검보’와 ‘육감증폭(六感增幅)’이란 스킬이 있었는데 블레이크는 이 두 가지 기술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블레이크는 이미 골드 러쉬의 등장을 알아차렸을 때 두 개의 조합 카드를 자신의 몸에 쑤셔 넣은 상태였다.
‘불타는 심장’과 ‘바람의 날개’.
이 두 개는 각각 코스트값이 7과 8이었는데 불타는 심장은 공격력을 대폭 올려주는 대신 방어력을 소폭 깎는 조합카드였고 바람의 날개는 이동속도와 회피 능력을 상승시켜주는 조합카드였다.
둘 다 하급 정령이 들어간 상당히 비싼 조합카드였다. 물론 비싼 만큼 그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카드들이었고 앞으로도 블레이크가 앞으로 꾸준히 사용할 카드들이었다.
블레이크가 알고 있는 개인 버프용 조합카드 중 이보다 좋은 건 2~3장 정도밖에 없었는데 개인 버프란 게 비슷한 효과끼린 더 좋은 효과가 약한 효과를 먹어버렸기 때문에 이 카드들을 대체할 카드는 없었다.
휘이잉! 콰드드득!
또 하나의 목이 날아갔다. 목이 날아갔다는 건 곧 생명력이 0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천외천 길드의 용병 ‘블레이크’님이 골드 러쉬의 길드의 ‘샤샤샷’님을 쓰러트렸습니다.
킬 마크를 따로 챙길 필요도 없이 길드전에서 킬을 따내면 자동으로 기록이 남았다. 현재 블레이크는 벌써 네 명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4연속 킬. 천외천에선 오로지 블레이크만 킬을 따내고 있었다. 천외천이 5명이 죽고 골드 러쉬가 4명이 죽었는데 그 4명을 모두 블레이크가 죽였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블레이크는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드드드드득!
블레이크는 오우거슬레이어를 비스듬히 사선으로 들며 상대방의 공격을 흘려버렸다. 상대는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가능하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지만, 그땐 이미 오우거슬레이어가 그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푸욱! 콰드득!
사방으로 폭사 되는 빛가루. 이미 블레이크는 전신에 빛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나마 진짜 피가 아니라 뭔가 신비로운 광채를 내뿜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이게 진짜 피였다면 한 마리의 혈귀(血鬼)가 등장했을 것 같았다.
천외천 길드의 용병 ‘블레이크’님이 골드 러쉬의 길드의 ‘천재검객’님을 쓰러트렸습니다.
‘다섯.’
블레이크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재빨리 촌극검보를 다시 사용해 몸을 옆으로 급격하게 비틀었다.
꽈과과광!
어김없이 블레이크가 서 있던 곳에 떨어진 마법 공격. 골드 러쉬는 이미 블레이크를 잡지 않으면 자신들이 박살 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블레이크 쪽으로 공격을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다 보니 다른 천외천의 유저들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킬 수는 블레이크가 방금 한 명을 또 잡아줬기 5:5로 똑같았다. 당연히 남은 인원수도 9:9로 똑같았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블레이크가 거의 다섯 명이 넘는 골드 러쉬의 유저들을 혼자 상대해주자 전장의 판도가 손바닥을 뒤집듯이 홱 넘어가 버렸다.
분명 기습은 골드 러쉬가 했고 초반 분위기도 골드 러쉬가 조금 더 좋았었다. 하지만 한 명의 유저가 모든 걸 바꿨다.
그냥 바꾼 게 아니라 아예 완벽하게 뒤집어 버렸다.
이건 마치 거대한 태풍이 전장을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누구도 막을 수도 그리고 잡을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동료라 할 수 있는 천외천의 유저들도 아주 매우 놀랐을 정도였다.
최종 결과는 천외천은 불과 6명만 죽고(그중 둘이 용병) 골드 러쉬는 14명이 모두 죽었다. 그 14명 중 12명을 블레이크가 잡았다.
시작부터 엄청난 신위를 보여준 블레이크.
하지만 전설의 시작은 지금부터였다.
* * * *
첫 전투를 끝낸 상혁은 이번 전투에서 찍은 동영상을 잘 저장한 후 잠깐 틈을 내 황혼의 객잔에서 그 동영상을 확인해 보았다.
‘캬, 이번 건 진짜 제대로 뽑혔네. 저번엔 신분 노출 때문에 가위질을 너무 많이 해서 엉망이었는데······ 이번엔 그럴 필요도 없고 딱 좋네.’
상혁은 이번 전투 동영상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전투 중에도 계속 동영상 촬영을 신경 쓰며 일부러 더 좋은 각도에서 멋진 모습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했었다.
이런 걸 신경 쓰며 싸웠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여유롭게 전투를 치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요런 동영상을 대여섯 개만 모아서 나중에 BJ질풍을 통해 공개하면 대박이겠군. 아! 그러고 보니 빨리 길드를 만들어야겠네. 길드를 만든 후 BJ질풍과 블레이크를 한 길드로 묶어서 연합 채널로 등록하면 나중에 라이브채널을 따낼 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상혁이 이번 전쟁에 굳이 끼어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멋진 전투 동영상을 확보해서 그것을 통해 더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그것을 통해 라이브채널을 얻을 수 있는 최소 조건을 채울 예정이었다.
이 정도라면 한 개의 돌로 두 마리 새를 잡는 게 아니라 거의 네 마리 이상의 새를 잡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영상 확인을 끝낸 상혁은 일인(一人) 길드부터 만들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바로 그때 천외천 길드의 용병 전용 채널을 통해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블레이크님, 혹시 지금 바쁘지 않으시면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메시지를 보낸 이는 당연히······ 태민이었다.
< [25장] 전설의 출현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