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장] 울며 겨자 먹기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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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외천과 대금산 사이에 맹약의 서가 작성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천외천은 대금산이 지정된 장소에 세워주는 벤더 NPC에서 아이템을 사는 대신 대금산은 똑같은 아이템들을 골드 러쉬에겐 훨씬 더 비싸게 팔기로 약속했다.
천외천은 평소엔 20~50골드밖에 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280~ 700골드를 주고 사야 했다. 한두 개만 사는 물건들이 아니라 한 번 살 때 거의 몇천 개 수준으로 사야 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천외천은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전쟁 물자를 살 때마다 한 번에 거의 100만 골드 정도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라면 그동안 길드 차원에서 꾸준히 모아놓았던 비상자금을 탈탈 털어야 할 지경이었다.
오죽했으면 태민이 길드전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게 되면 지고 이기고를 떠나서 그냥 돈이 없어서 길드가 망할 것이라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그들이 버티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들보다 골드 러쉬의 상황이 더 안 좋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골드 러쉬가 작업장 길드로서 골드 보유량이 대단하다고 해도······ 한 번에 400만 골드를 써야지 길드전을 치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담이 된다고 대금산의 제안을 거절하면 길드전 자체를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무너질 게 뻔했다.
힐링 포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마나 스톤이었다. 길드전이 일어나면 여기저기로 계속 이동하며 산발적인 전투가 끊임없이 일어날 텐데 마나 스톤이 떨어져 리콜을 못 타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천외천과 골드 러쉬의 대규모 길드전이 펼쳐지면서 마나 스톤 매물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에 덩달아 일반 유저들이 마나 스톤을 구하지 못해 고생하고 있었지만, 일반 유저들은 리콜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장 큰일이 나는 건 아니었다.
오로지 큰일은 리콜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 골드 러쉬만 나는 것이었다.
이 상황은 골드 러쉬가 먹으면 오늘 당장 죽는 독약과 일주일 후에 죽는 독약 중 무엇을 먹을 건지 결정하는 것과 비슷했다.
물론 살길도 있긴 했다. 죽기 전에 상대를 먼저 쓰러트리면······ 상대에게 해독제를 빼앗아 죽지 않고 살 수가 있었다.
“이 장사꾼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골드 러쉬의 중간 관리자 중 한 명인 김대식, 아니 흑구는 당장에라도 대금산의 목을 날려버릴 듯이 으르렁거렸다.
“약이라도 팔아주는 걸 고맙게 생각하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당장 천외천의 타격대를 따라 이동할 여력도 없잖아요? 분명 여기저기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오고 있을 텐데······.”
대금산은 슬쩍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일부러 길드전이 열리고 바로 오지 않고 살짝 뜸을 들인 다음 천천히 골드 러쉬를 찾아왔다.
지금은 그들이 여기저기에서 긁어모았던 전쟁 물자들이 거의 떨어졌을 시점이었다.
“이 새끼가······.”
흑구는 게이머라기보단 양아치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지금은 대금산으로 변해 있는 상혁이었다.
‘이 덜떨어진 근육 덩어리 새끼는 여전하네.’
전생에 상혁을 가장 많이 괴롭혔던 녀석도 바로 흑구였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상혁을 못 부려 먹어서 안달이었던 흑구 김대식.
상혁은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나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솟구치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상황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넌 그냥 너희 마스터인 ‘골저스’에게 보고나 하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로 판단이란 걸 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상혁은 한껏 흑구를 비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대가 흑구라면 존중할 가치가 전혀 없었다.
“네가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나?”
“그래서 어쩌려고? 네가 다시 집어넣어 주기라도 하게?”
평정심이라곤 쥐꼬리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은 흑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상혁은 그를 대놓고 긁었다.
상혁이 원하는 건 하나.
그가 폭발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 새끼야 네가 간덩이를 넣어줄게!”
휘이잉!
결국, 흑구가 폭발했다. 옆에서 흑구와 대금산의 대화를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던 흑구의 부하들은 흑구를 막으려고 했지만, 그들보다 흑구가 더 빨랐다.
자신의 무기인 커다란 도를 상혁을 향해 휘두른 흑구. 흑구가 살기(殺氣)를 상혁을 향해 명확하게 내뿜은 그 순간······ EL의 정당방위 시스템이 작동했다.
흑구의 몸에서 회색을 띤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이건 상혁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었다. 이 회색을 띤 빛은 정당방위 시스템에 따라 흑구를 공격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걸 의미했다.
꽈과광!
상혁은 슬쩍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흑구가 휘두른 커다란 도를 간단히 피해버렸다.
‘흥분하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건 여전하네. 미련한 돼지 새끼.’
“어쭈 피해? 일루와. 이 새끼야!”
“형님!”
“팀장님!”
흑구의 부하들이 흑구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흑구는 그들보다 빨랐다.
상혁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흑구. 그는 전사 계열의 유저였기 때문에 그의 돌진 공격은 기세가 제법 강력했다.
흑구의 부하들은 만약 흑구가 이대로 대금산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판단하고 빠르게 이 상황을 다른 관리자에게 보고한 상태였다.
그러니 흑구를 제어할 수 있는 다른 관리자가 올 때까지만이라도 흑구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미친 황소처럼 마구 날뛰기 시작한 흑구.
그리고 그런 흑구를 막으려는 그의 부하들.
마지막으로 달려오는 미친 황소 앞에 서 있는 일반인(?).
이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곤 전혀 곧바로 의외의 장면으로 바뀌었다.
상혁은 흑구가 자신을 향해 달려온 순간 몸을 살짝 비틀며 옆으로 반걸음 정도 움직이는 것만으로 아주 아슬아슬하게 흑구의 돌진 공격을 피했다.
이것은 촌극검보(寸隙劍步)라는 영혼 스킬이었다.
더 정확히 그것은 상혁의 첫 번째 고대의 지식인 ‘기사’가 ‘블레이드나이트’로 승급되면서 얻게 된 영혼 스킬 중 하나였는데 아주 짧은 순간(1초) 동안 회피 능력을 대폭 올려주는 효과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상혁과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바로 지금처럼.
휘릭, 콰과과과광!
상혁은 너무나 간단하게 흑구의 돌진 공격을 회피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회피와 동시에 한 장의 조합카드를 흑구에게 날렸는데 그건 바로 ‘제우스의 창’이었다.
번쩍! 파지지지직!
“크윽!”
상혁이 돌진 공격을 피하는 바람에 엉뚱한 벽에 충돌했던 흑구는 충돌과 거의 동시에 날아온 한 줄기의 뇌전을 막거나 피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는 마치 가볍게 감전이라도 된 것 약간 짜릿한 느낌을 받으며 생명력이 훅 깎여버렸다.
생명력이 깎이면 고통 같은 건 없었다. 대신 상당한 불쾌감이 몸을 휘감았다.
“이 새끼가······.”
빠드득, 이를 갈며 상혁을 노려보는 흑구.
하지만 흑구가 아무리 험악하게 노려봐도 상혁의 표정에선, 아니 대금산의 표정에선 여유가 넘쳤다.
“왜? 장사꾼한테 한 대 맞아서 기분이 별로야?”
“대금산님! 그만 하시죠!”
“형님, 형님도 그만 하세요!”
그 순간 흑구의 부하들이 달려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비켜! 오늘 내가 무조건 저 새끼 멱을 따버리고 만다!”
“거참 말 많네. 알았느니 해보라니까?”
상혁은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흑구가 날뛰면 날뛸수록 이득이었다.
‘역시 예상대로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덕분에 일이 더 쉽게 풀리겠군.’
상혁이 계속 흑구를 도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금 마음이 급한 건 당연히 골드 러쉬였다.
골드 러쉬가 아무리 작업장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길드라고 해도 이번 길드 전에서 패하면 타격이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은연중 작업장의 세계에도 서열이란 게 존재했는데 현재는 골드 러쉬가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지만 그 밑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작업장들이 몇 개 있었다.
만약 골드 러쉬가 이 길드전에서 패배하면 기회를 엿보던 작업장들이 공격적으로 골드 러쉬의 영역을 침범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천하의 골드 러쉬라고 해도 상황이 아주 심각해질 수가 있었다.
사실 전생에 이 전쟁의 승자는 천외천이 아니라 골드 러쉬였었다. 그리고 당시 길드전의 여파로 사실상 천외천, 아니 천 라인 자체가 망해버렸다.
길드들이 완전히 괴멸된 건 아니었지만, 패배의 여파로 꾸준히 세력이 약해지다가 대략 넉 달 정도 만에 사실상 5대 라인이 4대 라인으로 줄어들며 천 라인이 제외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가 바뀌면 많은 것이 바뀌려나?’
사실 미래가 바뀌는 건 상혁에게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었다.
구더기가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 순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상혁에게 골드 러쉬는 무조건 자근자근 밟아줘야 하는 존재였다.
“이거 놔! 내가 오늘 저 새끼······.”
“김대식. 너 이 새끼 뭐 하고 있는 거야!”
등장과 함께 흑구의 시끄러운 입을 닫게 한 남자. 상혁은 그 남자 역시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황금충(黃金蟲) 골저스! 드디어 저 씹어먹을 새끼가 등장하셨군.’
황금충 골저스, 그는 골드 러쉬의 길드마스터이자 ‘금’ 라인의 라인마스터. 그리고 중국과 한국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작업장을 돌리고 있는 사장이었다.
현실에서도 굉장한 재력가였던 그는 과거 상혁이 잡혀 있던 작업장이 박살 났을 때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간 거물이기도 했다.
‘그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번엔 다른 거야.’
상혁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골저스를 바라보았다.
“넌 이따 나 좀 보자.”
골저스는 흑구를 바라보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러자 흑구는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잔뜩 기가 죽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당신이 대금산인가요? 메일을 통해 당신의 제안을 보긴 했는데······.”
골저스는 고개를 돌려 대금산을 바라보며 얘길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성격대로 잡스러운 대화는 모두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희가 이걸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셨나요? 40배입니다. 그리고 우리랑 싸우는 놈들에겐 14배를 받는다면서요? 정말 제가 이런 불합리함을 받아들일 거로 생각하신 건가요?”
골저스는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대금산을 노려보았다. 그는 당장에라도 판을 엎어버릴 것 같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 상황에선 한, 두 발자국 정도는 물러나 주었다. 상대가 판을 엎으면 결국 자신이 손해이기 때문에 적어도 판을 엎진 않을 정도로 양보를 해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금산은 골저스가 어떤 분위기를 풍기던 아무런 상관이 없단 듯이 초지일관 같은 뜻을 고수했다.
“받아들이셔야죠. 뭐, 이대로 그냥 항복하실 생각이면 안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배짱을 부린다······. 근데 정말 우리가 항복을 해버리면 손해가 막심하지 않나요? 우리로선 40배의 가격에 그 물건들을 사서 길드전을 치르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게 되는데 차라리 항복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아, 거참 말이 많으시네. 그럼 항복하시라니까요. 당장 길드전 메뉴 열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신 다음 상대가 원하는 대로 전후 보상도 좀 해주고, 대외적으로 쪽도 좀 팔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른 작업장 놈들한테 뒤통수도 좀 몇 대 얻어맞고, 언제라도 배를 갈아탈 수 있는 얌체 같은 길드원들도 대거 이탈해주시고······. 어우, 항복하면 바빠지시겠네요.”
“······.”
대금산이 웃으며 한 말에 골저스는 순간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EL에서 최고의 현금부자가 골드 러쉬인데 그깟 40배 정도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건 엄살이죠.”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나요? 골드 러쉬도 그냥 다른 대형 길드와 비슷한 수준······.”
“에이, 선수끼리 이러시면 안 되죠. 제가 골드 러쉬의 금맥들을 좀 읊어볼까요? 솔직히 ‘폐광 작업장’하고 ‘어둠 골짜기 작업장’ 그리고 ‘망망대해 작업장’까지 세 개의 작업장만 풀로 돌리면 하루에 200만 골드는 너끈히 들어오잖아요? 그 밖에도 자잘한 작업장까지 모두 다 까볼까요? 설마 아니라고 그러시려는 건 아니죠? 혹시라도 부정하시면 제가 이 작업장들 위치랑 작업 방법까지 인터넷에 공유할게요.”
기습적인 대금산의 말에 골저스는 정말로 말문이 턱 막혔다. 이건 상대가 알고 있어서는 안 되는 정보였다.
이 정보들은 골드 러쉬에서도 중요 관리자급만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대는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작업장들을 짚어냈다.
대금산의 강력한 스트레이트 한 방.
이 한 방이 바로 승부를 결정지어버렸다.
< [24장] 울며 겨자 먹기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