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장] 울며 겨자 먹기 (1) >
@ 울며 겨자 먹기.
“태민아, 아무래도 길드전은 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천외천 길드의 천웅, 아니 천하제일검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이자 천외천 길드의 부길드마스터인 태민을 바라보았다.
“으음······ 이건 정말 별로 안 좋은데······.”
태민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쩔 수가 없어. 골드 러쉬 새끼들이 결국 비밀 통로를 찾은 후 안으로 밀고 들어왔어. 이로써 짱개 새끼들이 지하 사냥터를 포기할 가능성은 아예 사라졌어. 아마 더 달려들 거야.”
“하긴 이런 좋은 사냥터를 양보할 놈들이 절대 아니지.”
태민도 어쩔 수가 없단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길드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안 돼. 강하게 밀어붙여서 기선을 제압해야 해.”
“그래, 네 말이 맞다. 피할 수 없다면 맞불을 놔야지. 천외천 길드원들에게 비상소집령을 내릴 게. 놈들이 길드전을 선포하는 순간······ 하늘 밖의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확실히 보여주자.”
고민하던 태민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협상을 포기한 천외천. 그리고 욕심을 내기 시작한 골드 러쉬. 결국, 이들의 충돌은 기정사실로 되어가고 있었다.
대금산으로 변한 상혁은 자신이 고용한 6명의 NPC 상인에게 모든 전쟁 물자를 가격과 상관없이 사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이제는 전쟁 물자의 시세를 끌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시장에서 전쟁 물자의 씨를 말려버려야 했다.
물론 눈치 빠른 몇몇 장사꾼들은 상혁을 따라 전쟁 물자를 사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스케일은 상혁과 비교하면 하찮은 먼지와 같은 수준이었다.
아직까진 경매장에 대상(大商)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손이 붙어있질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상혁이 거의 모든 물건을 독점할 수 있었다.
상혁은 판매가 아니라 사기에 가까울 정도로 어처구니없게 비싼 가격에 올라온 물건을 제외한 모든 전쟁 물자를 사들였다.
물건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상혁은 대행수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 권한을 이용해 은행에서 특대형 사차원창고를 구매한 후 그곳에 물건을 쌓아놓았다.
상혁은 앞으로 일주일 안에 천외천과 골드 러쉬의 길드전이 시작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진 잽만 날리며 눈치만 살피던 골드 러쉬가 제대로 천외천의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발생한다.
당시 골드 러쉬는 기습적으로 지하 사냥터에서 사냥하던 천외천의 유저들을 공격했었다. 천외천은 조만간 길드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었지만 이렇게 상대가 길드전도 선포하지 않고 선제공격을 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천외천은 곧바로 길드전을 선포했고 진짜 길드전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골드 러쉬의 선제공격이 실수였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골드 러쉬에 소속되어 있던 급진 강경파 길드원 몇 명이 계속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걸 참지 못하고 그냥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제대로 사고를 쳐버린 덕분에 골드 러쉬는 어쩔 수 없이 길드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천외천에게 실수였다고 얘기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물은 엎질러졌고 어차피 주워담을 수 없다면 컵이라도 지켜야 했다.
상혁, 아니 대금산이 천외천 길드 쪽으로 연락한 시점도 딱 이 시점이었다.
* * * *
천하제일검은 다소 황당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와 뚱뚱한 몸 그리고 간사해 보이는 염소수염까지······ 자신을 대금산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전형적인 장사꾼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 가격에 이 물건들을 사라는 건가요?”
“네.”
“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당장 경매장에만 가도 이 가격의 십 분의 일 정도면 구할 수 있는데······ 저랑 지금 장난하시는 건가요?”
“십 분의 일이라······ 그 가격에 구하실 수 있으면 구하셔도 됩니다. 단, 오늘 제안을 거절하시면 다음엔 가격이 여기서 두 배로 뛸 겁니다.”
“아니, 이 사람이······.”
천하제일검은 대금산이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에라도 폭발하려는 천하제일검을막은 건 태민이었다.
“웅아, 흥분하지 마.”
태민은 천하제일검을 진정시킨 후 천천히 대금산을 바라보았다.
“사재기······ 당신이 하신 거였나요?”
길드전을 준비하고 있던 태민은 이미 며칠 전부터 경매장을 살폈었기 때문에 경매장과 위탁 판매소에서 벌어진 일들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 통하는 분이 한 분 정도는 있어서 다행이네요. 네, 그거 제가 한 겁니다.”
대금산은 당당하게 얘기했다.
“설마 당신 혼자서 그 많은 물량을 다 먹었다고 얘기하시는 건 아니죠?”
“그건 뭐 알아서 생각하시면 됩니다. 혹시 저보다 싸게 파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한테 가셔도 됩니다. 단, 나중에 가서 저랑 다시 거래하시려면 무조건 가격이 두 배로 뛸 겁니다.”
“물량에 자신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상혁의 말에 태민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자신이 없었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욕심을 너무 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그러다 전부를 놓칠 수도 있을 겁니다.”
태민은 은근슬쩍 경고를 날렸다.
“욕심이라······ 이게 욕심으로 보이나요?”
“원래 시세의 열 배를 받겠다는 건 욕심이 맞죠.”
“그 시세는 누가 정한 거죠? 후후, 뭐 원래 시세에 물건을 구할 수 있으시다면 그렇게 구해보세요.”
태민의 경고에도 대금산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물론 그 가격에 파시는 건 대금산님 자유겠지만 결국 그걸 사주는 사람은 저희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태민은 결국 돈을 주는 쪽이 갑이란 얘길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태민의 말에 대금산은 슬쩍 웃었다.
“내가 파는 것도 자유고 여러분이 사는 것도 자유라는 거죠? 뭐, 알겠습니다. 그럼 거래는 없던 걸로 하죠. 전 이 길로 바로 골드 러쉬 쪽으로 가봐야겠네요. 그래도 제가 천외천에 좋은 감정이 더 많아서 여길 먼저 왔었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아, 그리고 혹시 마음이 바뀌면 아까 드린 이메일 주소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참고로 다음에 연락하셨을 땐 말씀 드렸던 대로 모든 물건의 가격이 두 배로 올라갈 겁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대금산.
순간 태민의 등줄기를 타고 뭔가 서늘한 기운이 솟구쳤다. 태민의 예리한 감(感)이 대금산을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잠, 잠깐만요.”
태민은 일단 상혁을 잡았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한 시간만 기다려주실 순 없나요? 솔직히 이게 쉽게 결정하기 힘든 일이란 건 대금산님도 잘 아시시지 않습니까?”
“흐음······ 삼십 분. 삼십 분만 기다리겠습니다.”
대금산은 끝까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너희가 갑이 아니라 내가 갑이라고 얘기하듯 한껏 배짱을 부렸다.
[야, 아무리 봐도 사기꾼 새끼 같은데 왜 그렇게 쩔쩔매? 그냥 보내 버려. 설마 저 새끼가 없다고 그 물건들을 못 구하겠냐?]
민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천하제일검이 귓속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얘기했다.
[기다려봐. 사기꾼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보고 보내도 늦지 않아.]
태민은 지금 대금산이 얘기한 물건들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그 물건을 원활하게 구하지 못했을 땐 길드전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질 수도 있었다.
삼십 분을 투자해 그걸 조금이라도 예방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태민의 방식이었다.
태민은 곧바로 모든 길드원들에게 당장 근처의 경매장이나 위탁판매소로 달려가 생명의 티끌, 성수, 마나스톤, 강화석을 구해보라고 얘기했다.
그리곤 대금산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곤 로그아웃을 한 후 게임 밖에서도 자신이 얘기한 물건들을 파는 이들을 찾아보았다.
삼십 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잠깐 로그아웃을 했던 태민은 조금 전 접속했다. 그리곤 자신의 명령대로 움직였던 수많은 길드원들에게서 날아온 충격적인 보고를 확인하고 있었다.
[구할 수가 없어요.]
[경매장이나 위탁 판매소에 물건이 올라오면 굉장히 비싼 것 같은데도 1초도 안 걸려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있어요.]
[전부 사라졌어요. 정말 하나도 남지 않았어요.]
[웃돈을 얹어준다고 삼십 분 동안 외쳤는데 티끌 몇 개랑 최하급 마나 스톤을 한 개 구한 게 전부에요.]
[이미 경매장에서 상당히 비싸게 팔리니까 죄다 거기다 올려버리고 있어요. 올리면 1초 안에 팔리니까 들고 다니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없어요.]
······
······
이미 게임 밖에서 심상치 않은 정보들을 확인하고 들어온 태민은 길드원들의 보고를 전부 확인한 순간······ 자신이, 아니 천외천이 외통수에 걸렸다는 걸 눈치챘다.
‘이건 빠져나올 수가 없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대금산······. 태민은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태민아, 지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천웅아······ 아무래도 제대로 걸린 거 같다.]
[응? 제대로 걸리다니 뭐가?]
[저놈······ 보통 놈이 아니었어.]
[뭐야, 진짜 저놈 말대로 모든 물건을 저 녀석이 독점하고 있는 게 맞아?]
[아마도 그런 거 같아. 저놈을 통하지 않으면 길드가 아니라 파티 하나에서 사용하기도 힘들 정도의 물량밖에 확보하지 못할 거 같아. 그럼······ 진짜 망하는 거지.]
[와······ 미치겠네. 어디서 갑자기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지? 아, 골치 아파.]
[근데 바꿔 생각하면 이게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을 거 같아.]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전쟁 물자는 우리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잖아. 10배를 주거 사건 20배를 주고 사건 우리가 저놈을 통해 전쟁 물자를 독점만 할 수 있다면 이번 길드전은 무조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오호······ 그건 또 그러네.]
[그러니까 이제부터 잘 구슬려서 조금이라도 싸게 사도록 노력해보자. 그것밖에 답이 없다.]
[알았어.]
천하제일검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기꾼이라도 막말을 했었지만 이젠 상황이 완벽히 달라진 상태였기에 천하제일검은 공손한 표정으로 대금산을 바라보았다.
태민의 말은 분명 타당한 면이 있었다.
전쟁 물자는 길드전을 치르는 양쪽 길드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걸 대금산을 통해 독점만 할 수 있다면 길드전의 승리는 무조건 자신들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태민, 아니 천외천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네, 네? 골드 러쉬한테도 파실 거라고요?”
태민은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대금산을 바라보았다.
“뭘 그리 놀라세요? 저 같은 태생이 장사꾼인 놈은 돈만 주면 누구에게도 물건을 팝니다.”
“하지만 저희와 독점 거래를······.”
“전 독점 거래를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요?”
“그래도 저희도 대금산님을 믿고 다른 곳과 거래를 하지 않을 생각인데 대금산님도 저희를 믿고······.”
“태민님. 죄송한데 누가 누굴 믿어요? 후후후, 전 아무도 안 믿어요. 제가 믿는 건 오로지 돈뿐이에요. 태민님도 절 믿지 마세요.”
대금산이 된 상혁은 정말 돈독이 오른 장사꾼처럼 행동했다. 실제로 상혁은 아무리 이번 일에 개인적인 원한이 섞여 있다고 해도 그건 그거대로 알아서 챙기고 돈은 돈대로 또 알아서 챙길 생각이었다.
“그래도······.”
태민은 뭔가 아쉬운데 말은 못하는 아주 답답한 상황이었다. 이로써 태민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가 있었다.
“흐음,자꾸 태민님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니까 마음이 약해지네요. 좋습니다. 그럼 제가 제안을 하나 하죠.”
대금산은 계속 간을 보며 밀당을 하다 적당한 시점이 되자 밑밥을 슬쩍 풀기 시작했다.
“물건 가격을 좀 올리겠습니다. 더도 말고 40%만 올리죠. 대신······ 천외천 쪽에선 40%를 올리고 골드 러쉬 쪽엔 400%를 올리죠. 아, 그리고 우린 서로 믿는 관계가 아니니 모든 계약을 ‘맹약(盟約)의 서’를 통해 하도록 하죠. 그럼 믿으실 수 있겠죠?”
대금산의 제안은 한 마디로 골드 러쉬쪽에 네 배 정도 더 비싸게 팔 테니 너희들도 조금만 더 비싸게 사라는 제안이었다.
이건 정말 뼛속까지 장사꾼 마인드를 지닌 자만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순간 태민은 욕을 한바탕 쏟아낼 뻔했다. 진짜 너무나 짜증이 나서 머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태민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려던 욕을 꾸역꾸역 다시 집어삼킨 후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쉽게 받을 수도,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는 제안을 앞에 두고 태민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었다.
“아, 선택하시기가 곤란한 거 같으니 좀 더 쉽고 빠르게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죠. 참고로 이 제안을 거절하시면 똑같은 제안을 골드 러쉬에 해볼 생각입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천외천이 400%고 골드 러쉬가 40%겠죠?”
말을 끝낸 대금산은 너무나도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태민을 바라보았다.
“크으······.”
빠드득.
태민으로서는 이가 절로 갈리는 상황이었지만 참고 또 참았다. 여기서 폭발하면 이번 길드전은 무조건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이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린 상태에서 길드전을 허무하게 패배하게 되면 골드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길드 자체가 공중분해가 되어버릴 수 있었다.
골드 러쉬에게 물어줘야 하는 막대한 전후 보상금은 물론이고 천외천 길드의 이미지가 단번에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 보지 않아도 결과는 훤히 예상되었다.
즉, 이 얘긴 태민이 대금산의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독하다······ 정말 너무나 독한 놈한테 잘못 걸렸다······.’
허탈한 표정으로 대금산을 바라보던 태민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태민의 처참한 패배······.
결국, 천외천 길드는 울며 겨자를 먹는 심정으로 전쟁상인 대금산과 굴욕적인 계약을 맺게 되었다.
< [24장] 울며 겨자 먹기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