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장] 전쟁상인(戰爭商人) (2) >
‘이게 지금 일어났던 일이었어?’
아무리 상혁이라고 해도 모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순 없었다. 특히 상황에 대해선 어느 정도 상세히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게 ‘언제’ 일어난 것인지 시간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상혁은 글을 좀 더 읽으며 분란이 정확히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았다.
‘내가 기억하기엔 문제의 발단은 골드 러쉬의 일꾼 한 명이 우연히 천외천 길드의 정예들이 은밀하게 이동하는 걸 목격하면서부터였는데······.’
골드 러쉬 길드엔 수많은 일꾼이 있었다. 골드 러쉬의 두 종류의 일꾼이 존재했다. 한국에 있는 작업장에는 재능을 착취당하는 어린아이들이 있었고 중국에 있는 작업장에는 재능이 아닌 그냥 단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들 있었다.
솔직히 한국의 재능 있는 어린아이들은 그나마 같은 일꾼이라도 어느 정도 사람대접은 받았다. 아무래도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이다 보니 무작정 채찍만 사용하진 않고 조금씩 당근도 줘가면서 계속 부려 먹었다.
하지만 중국에 있는 작업장은 그냥 임금이 무지막지하게 싸다는 걸 이용해 단순반복 막노동을 엄청나게 시켰다. 그렇다 보니 인원 자체는 당연히 중국 쪽 작업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월등히 많았다.
천외천 길드의 정예들이 은밀하게 이동하는 걸 목격한 건 바로 중국 쪽 작업장에서 일하는 일꾼이었다.
‘일단 천외천은 붉은 피라미드의 숨겨진 지하 사냥터로 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확보한 상태일 테고······ 골드 러쉬는 숨겨진 지하 사냥터로 가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는 사실 정도를 눈치를 챈 상태겠군. 아마 그것을 놓고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것이겠지? 그 과정에서 조금씩 충돌도 있었고······ 두 길드가 워낙 대형 길드이다 보니 그 충돌 자체가 화제가 된 상황이네.’
게시판을 쭉 읽어본 상혁은 지금이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있었다.
‘지금 단계에선 그 누구도 천외천과 골드 러쉬가, 아니 천 라인과 골든 라인이 그렇게 심각하게 충돌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었지.’
사실 시작 자체는 EL 전역에서 늘 벌어지고 있는 단순한 사냥터 자리싸움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사냥터 자리싸움보단 스케일이 훨씬 크긴 했지만 그래 봤자 사냥터 자리싸움의 범위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처음엔 외부의 구경꾼들이 더 신나서 떠드는 바람에 장작이 좀 들어갔고······ 그렇게 타오르던 장작들이 없어질 때 즈음엔······ 골드 러쉬가 비밀 통로를 찾아내 사냥터로 진입하면서 장작이 쌓이기 시작했지.’
원랜 조용히 해결될 수도 있었던 일이 커진 이유는 바로 지금처럼 게임 안이 아닌 밖에서 워낙 시끄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천외천이나 골드 러쉬의 길드원이 아닌 외부의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마구 장작을 넣어가며 불을 계속 지피는 바람에 천외천이나 골드 러쉬도 빠르게 일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아무래도 대외적인 이미지란 게 있었기에 서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게 시간을 지체시켰다.
물론 외부의 장작은 오래가지 않았다. 앞으로 3~4일만 지나도 외부의 장작들은 시들해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장작이 시들해질 때 즈음 붉은 피라미드 지하에선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골드 러쉬의 사냥터 진입과 사냥.
이걸 계기로 천외천과 골드 러쉬는 더더욱 치열하게 대립하기 시작한다. 특히 붉은 피라미드 지하의 사냥터는 흔히 말하는 꿀 사냥터였기 때문에 더더욱 상황이 좋지 않아졌었다.
원래대로 사냥터를 독점하려는 천외천과 어떻게 해서라도 숟가락을 얻으려는 골드 러쉬의 신경전······.
‘이 신경전은 대략 2주를 더 넘게 유지가 되었던가? 어쨌든 앞으로 대략 3주 후에 그 사건이 터지면서 분쟁의 규모가 한 방에 커졌지. 그리고 이후 두 길드의 전쟁은 결국 라인 대 라인의 전쟁이라는 최악까지 가버린다.’
상혁도 그 전쟁에 휘말려서 미친 듯이 싸웠었다. 이 전쟁에서 상혁은 ‘버서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유명해졌었는데 상혁이 잡은 천외천 랭커의 숫자가 수백에 다들 정도였다.
‘골드 러쉬······ 골드 러쉬······.’
상혁은 게시판을 닫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냥 넘어갈 만한 기회는 아니다.’
기회는 기회였는데 이걸 어떻게 활용을 할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 같았다.
상혁은 게임에 접속한 후에도 계속 고민을 이어갔다.
‘단순히 골드 러쉬를 엿 먹이는 걸 떠나서 좀 더 판을 크게 보자.’
상혁은 자잘한 복수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아예 판 자체를 크게 엮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천외천과 골드 러쉬의 길드전······ 이건 결국 라인과 라인의 연합 전쟁으로 퍼져서 EL의 4대 전쟁 중 하나인 천금(天金) 전쟁이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상혁은 EL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전쟁이 시작되면 곧바로 가격이 폭등할 아이템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들을 꼽아보면 힐링 포션의 재료가 되는 ‘생명의 티끌’과 ‘성수(聖水)’. 그리고 리콜과 마킹은 물론이고 여러 용도로 다양하게 사용되는 여러 등급의 마나 스톤. 마지막으로 가장 단시간에 유저들을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강화석까지······ 이렇게 네 가지였다.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려면 대략 삼 주 정도 남은 건가? 시간은 충분하네.’
아까부터 계속 생각을 정리하던 상혁은 드디어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확실하게 결정을 내렸다.
‘전쟁상인! 이번 전쟁 통해 또 하나의 내 분신을 만들어내자.’
상혁이 떠올린 만들기로 한 또 하나의 모습은 바로 전쟁상인이었다. 전쟁을 사고파는 상인······ 정확히는 전쟁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축적하는 상인이었는데 상혁의 전생엔 실제로 이런 전쟁상인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EL에 서비스되고 최소 5년이 지난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등장했었다. 그렇기에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지금은 그런 인물들이 등장할 리가 없었다.
‘그럼 일단 전쟁 상인의 모습을 먼저 만들어볼까?’
상혁은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타이틀을 접미 타이틀로 장착한 후 하나의 인물 슬롯을 새롭게 열었다.
지금까지 열려 있는 인물슬롯은 두 개였는데 그것들은 ‘흔남’과 ‘질풍’이었다.
‘이름은 대충 아주 큰 금산이란 뜻으로 대금산 정도면 되겠지.’
상혁은 새로운 인물 슬롯에 대금산이란 이름까지 적어놓고 인물의 모습을 상세히 설정하기 시작했다.
키는 작게 그리고 몸은 뚱뚱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전형적인 욕심 많은 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에 수염도 염소수염으로 몇 개 달아주면······.’
화룡점정이라고 해야 할까? 염소수염 하나만으로 완벽한 수전노(守錢奴)가 탄생했다.
‘딱 좋네.’
상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로 이 설정을 대금산에 등록시켜버렸다.
전쟁상인이자 금산 상단의 주인인 대금산. 이게 상혁이 만든 세 번째 신분이었다.
자신의 원래 신분까지 합치면 네 번째였지만 어쨌든 상혁은 대금산의 설정과 모습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전쟁상인에 어울리는 완벽한 신분을 만든 상혁은 그다음으로는 본격적인 물건 사재기에 들어갔다. 자금은 어차피 넘치도록 많았다.
스킬북 장사는 이제 거의 마무리 되었지만 대신 지도의 판매량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지도의 가격은 스킬북의 가격보다 더 거품이 심했기 때문에 상혁은 앉아서 떼 돈을 벌고 있었다.
‘앞으로 이 주 동안은 기준가 아래의 물건들을 싹쓸이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이주가 지난 후부터는 가격 따윈 생각하지 않고 올라오는 족족 모두 사재기한다!’
상혁은 대략적인 사재기 기준을 정한 후 그것을 두 명의 NPC상인에게 주입했다.
아예 상혁은 네 명의 C급 NPC상인을 더 고용해서 팔콘과 튠을 제외한 나머지 대형 도시에 네 NPC상인을 배치했다.
그리곤 그들에게도 똑같은 설정을 주입했다.
이렇게 되면 총 여섯 명의 상인 NPC가 사재기를 시작하는 거였는데 이러면 일반 유저들은 상혁이 노리고 있을 아이템을 구경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시스템적으로 원래도 상인NPC가 유저보다 검색 후 구매 속도가 빨랐는데 이걸 6명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유저들이 따라가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도가 계속 팔리고 있는 한 상혁의 자금력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았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물량이 나와도 다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이것들이 없이 전쟁은 불가능하다. 그건 곧······ 나를 통하지 않곤 전쟁에서 이길 순 없단 뜻이겠지.’
상혁의 전생에도 전쟁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전쟁상인은 없었다. 그저 전쟁에 영향력을 어느 정도 행사하는 게 전부였다.
상혁이 꿈꾸고 있는 전쟁상인은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른 존재였다.
‘전쟁 자체를 꽉 틀어쥐고 내가 모든 걸 통제하면······ 그게 진짜 전쟁상인이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상혁.
그는 남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 * * *
상혁은 물건을 사재기하면서 동시에 마킹버스도 계속 운영했다. 아예 규모를 좀 더 늘려서 하루에 두 번, 총 12명씩 4층 입구까지 마킹버스를 태워줬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버스 요금은 평균 3만 골드였다. 즉, 상혁은 한 번 버스를 운행하면 대략 18만 골드를 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걸 하루에 두 번 하니 상혁은 거의 35만 골드를 벌었다.
골드의 시세는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어서 사실 지금은 골드를 파는 사람을 찾는 게 매우 힘들 실정이었지만 어쨌든 대략 지금의 시세로 따져도 상혁은 하루에 1,750만 원을 벌고 있었다.
물론 상혁은 이걸 현금으로 바꿀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이 돈과 지도를 판 돈으로 전쟁 물자를 사재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킹 버스를 계속 운행되었기에 BJ질풍 방송도 매일같이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꾸준히 방영되었다.
상혁이 방송하면 시청자들이 ‘별사탕’을 제법 많이 쏴주었다. 물론 상혁은 시청자와 소통이란 걸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시청자들은 꾸준히 별사탕을 쏴주었다.
이렇게 별사탕도 제법 쌓여갔지만 상혁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다른 신경 쓸 것도 많은 상황에서 별사탕까지 신경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상혁은 방송을 하지 않을 땐 지옥불 사막에 존재하는 사냥터 중 난이도가 높은 걸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검은 모래사막’에서 블랙 오크들을 잡고 있었다.
블랙 오크들의 레벨은 55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현재 최고 레벨이라고 알려진 유저가 49였다. 슬슬 원 소울 유저들이 도태되고 더블 소울 유저들이 떠오르고 있긴 했지만, 최고 레벨 유저는 아직까진 원 소울 유저였다.
물론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최고 레벨 유저가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상혁만 해도 레벨을 이미 50까지 올려놓은 상태였다. 이걸로 레벨 40부터 시작되었던 2차 헬 구간은 레벨이 50을 찍으며 끝나긴 했다.
다음 3차 헬 구간은 55레벨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헬 구간이 아니라고 해서 50레벨부터 55레벨까지 구간에 레벨을 올리는 게 손쉬운 건 절대 아니었다.
3차 헬 구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지 몰라도 2차 헬 구간과는 비교할 수가 있었다. 지금도 2차 헬 구간에서 레벨을 올릴 때 얻어야 했던 카르마 양의 70% 정도는 얻어야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여전히 레벨을 올리는 건 무척 힘든 일이란 뜻이었다.
물론 3차 헬 구간에 도착하는 순간엔 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다. 흔히 말하는 ‘현자 타임’이 찾아올 정도로 엄청난 좌절감을 선사하는 3차 헬 구간.
하지만 상혁은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고 하루, 하루 현실에 충실했다.
블랙 오크만 해도 보통 40레벨 후반이나 혹은 50레벨 초반의 유저들이 3인 파티 이상을 구성해 잡는 몬스터였지만 상혁은 언제나 그렇듯 솔플로 놈들을 사냥했다.
솔직히 블랙 오크는 카르마를 아주 많이 준다거나 혹은 비싼 아이템을 떨어트리는 몬스터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상혁이 블랙 오크를 사냥하고 있는 이유는······ 놈이 다른 건 몰라도 스킬 관련 숙련도를 올리는 데 최적의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이런 걸 흔히 숙련도 작업이라고 말했는데 상혁은 이 작업을 통해 고대의 지식이나 혹은 일반 스킬, 영혼 스킬의 숙련도를 빠르게 올리는 중이었다.
숙련도 역시 오르면 오를수록 더 잘 오르지 않는 구조였기 때문에 틈이 날 때마다 이렇게 작업을 해주는 게 좋았다.
쿠어어어엉!
또 한 마리의 블랙 오크가 목이 반쯤 잘린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 한 줌의 빛 가루로 변해버렸다.
중급 소드마스터리(Sword Mastery)의 숙련도가 250이 되었습니다. 승급 조건이 만족되어 상급 소드마스터리(Sword Mastery)로 변경되었습니다.
‘정령술(精靈術) [하급]’의 숙련도가 250이 되었습니다. 승급 조건이 만족되어 ‘정령술(精靈術) [중급]’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동시에 두 개의 영혼 스킬 숙련도가 250이 되며 둘 다 상위 스킬로 승급이 되었다.
‘휴, 드디어 정령술을 중급으로 올렸네. 이제야 정말 제대로 된 정령폭파술을 구사할 수 있겠다.’
정령폭파술은 중급 정령들을 활용할 때부터 진정한 위력을 발휘했다.
상혁은 이 주 동안 열심히 숙련도 작업을 한 결과 정령술은 물론이고 다른 많은 스킬들의 숙련도를 상당히 올릴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가 되었는데······.’
처음엔 양측 모두 적당히 합의한 후 끝내려고 했었다. 하지만 합의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상황은 묘하게 변해갔다. 특히 골드 러쉬가 붉은 피라미드의 지하 사냥터가 얼마나 꿀이 넘쳐 흐르는 사냥터인지 알게 되는 순간······ 그들의 분쟁은 전쟁으로 변해버렸다.
“상이 차려지고 있으니······ 대금산도 무대에 올라야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웃는 상혁.
전쟁상인 대금산의 등장. 그것은 곧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 [23장] 전쟁상인(戰爭商人)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