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장] 거인의 동굴 (1) >
@ 거인의 동굴.
상혁이 달려갔을 땐 이미 6개 길드 연합 유저들이 경비병들을 쓰러트린 후 순식간에 내성문을 박살 내고 내성 안쪽으로 쏟아져 들어간 상태였다.
그들 중 몇몇은 경비병을 죽인 것 때문에 이미 악인이 된 인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성을 습격하기로 했을 때부터 모두 악인이 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악인이 되지 않은 유저들도 모두 범죄자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만 더 악행(惡行)을 저질러도 금방 악인이 될 수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무리를 하는 건 그만큼 그들이 내성 안에 있는 보물에 꽂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사실 내성 안엔 보물 같은 건 없었다.
그 안에 있는 건 무시무시한 팔콘시의 태풍기사단뿐이었다. 그리고 태풍기사단의 단장인 질풍의 파라얀은 마스터 나이트였다.
마스터 나이트의 레벨은 무려 100이었다.
아무리 NPC가 유저보다 흔히 말하는 레벨빨을 덜 받는다고 해도 레벨 100이 지니고 있는 그 자체의 위엄은 어마어마했다.
레벨 100은 현재 최상위그룹을 이루고 있는 유저들이 앞으로 1년도 더 넘게 지금처럼 계속 죽을 고생을 해며 레벨을 올려야 겨우 비슷하게나마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즉, 지금 단계에선 파라얀을 막을 수 있는 유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누가 감히 이곳에서 소란을 피우는가!”
콰과과과과과과!
파라얀은 진짜 질풍처럼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애병(愛兵)인 폭풍창을 꼬나쥐고 내성 안으로 기어들어온 벌레들을 향해 돌진했다.
꽈과과과과과과광!
450명의 유저들을 향해 혼자 돌진한 파라얀. 사실 그의 주변엔 태풍기사단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태풍기사단의 기사들은 경비병하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경비병들의 평균 레벨은 50이었는데 태풍기사단의 기사들은 평균 레벨은 65였다. 15차이었지만 그 차이는 매우 큰 편이었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저들을 지나쳐 박살이 난 내성문 앞을 가로막았을 뿐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유저들이 더는 내성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이미 6개 길드 연합에 속하지도 않았으면서 호기심 또는 욕심 때문에 박살 난 내성문 안쪽으로 들어간 일반 유저들도 꽤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들 역시 인간 분쇄기에게 마구 갈려버릴 예정이었다.
‘흐음, 여길 태풍기사단이 막았구나······. 그래서 전생에서도 사람들이 다 그림의 떡이었다고 얘기한 것이었군.’
상혁은 내성 안쪽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타이밍이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들어갔다간 파라얀한테 산산조각이 날 게 분명했다.
상혁은 파라얀이 싸우는 걸 아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상혁이 파라얀을 보고 느꼈던 느낌은 경악 그 자체였다.
EL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NPC는 용병으로 고용할 수가 있었다. 물론 아무나 막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그 NPC와의 호감도부터 그 NPC의 몸값 그리고 용병을 고용할 유저의 능력까지 다양한 요소가 종합적으로 고려된 후에야 용병 고용이 가능했었다.
특히 등급이 높은 NPC들은 용병으로 고용하는 비용이 어마어마했고 고용을 할 수 있는 조건도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에 아무나 고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과거 상혁이 잡혀 있던 작업장을 운영하던 녀석들의 수완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은 무려 질풍의 파라얀과 그의 태풍기사단을 용병으로 고용한 적이 있었다. 그때가 한창 영웅의 대지에서 아주 강력한 네임드 몬스터에 헤딩 있을 때였는데 작업장의 관리자들이 질풍의 파라얀과 태풍기사단을 용병으로 고용한 후 데리고 와 그들의 힘을 빌려 레이드를 공략해버렸었다.
하지만 그렇게 레이드에 성공하고 얻은 거의 모든 전리품을 파라얀에게 강탈(?)당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무리해서 용병을 고용하지 않았었다.
콰과과과과과광!
파라얀이 분쇄를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이제 앞으로 10분 안에 모든 유저가 조각조각 찢겨서 온 사방에 빛가루를 뿌리며 죽어나갈 것이란 뜻이었다.
‘저 안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안쪽의 상황이 바깥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소리가 아주 리얼하게 들려왔다.
“으아아악! 살려줘!”
“괴물이야! 괴물이 나타났다!”
“모두 도망쳐. 절대 이길 수가 없는 상대야!”
유저들은 절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외쳤고 상혁은 조용히 그걸 들으며 밖에 서 있었다.
‘저들 몰래 들어갈 방법······ 들어갈 방법······ 들어갈, 아! 그게 좋겠다.’
상혁은 문득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접두 타이틀 효과······ 그것이라면 분명 가능성이 생긴다!’
상혁은 그림의 떡, 그것을 현실의 떡을 만들 생각이었다.
‘파라얀의 학살이 끝나면······ 존재감을 지운 이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내성 안으로 침투한다······.’
상혁은 내성문 앞에 모여 있는 다른 유저들 사이에 슬쩍 껴서 안쪽의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렸다.
상황는 정말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파라얀은 압도적인 무력이 뭔지를 보여주며 마스터의 경지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450명, 아니 500여 명의 유저들은 파라얀의 몸에 상처하나 내질 못하고 그의 창에서 뿜어져 나온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의 기운에 몸이 여러 조각으로 토막 나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엄청난 양의 빛가루를 뿜어내며 기어이 오늘을 피의 월요일로 만들었다.
파라얀이 500여 명의 유저를 한줌의 핏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저저······ NPC를 만만히 볼 게 아녔구나.”
“와, 대박! 저 NPC 아저씨 그냥 지나가는 거 본 적 있었는데 저렇게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니.”
“저 NPC랑 호감도를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진짜 저런 NPC를 용병으로 고용할 수만 있으면 완전 대박이겠다.”
유저들은 파라얀의 압도적인 무위를 지켜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고오오오오.
모든 유저가 쓰러지고 나서야 바람이 멈췄다. 질풍의 파라얀은 폭풍창을 거두며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악인즉참(惡人卽斬)! 내가 있는 한 팔콘시 안에서 악인들이 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파라얀은 내성 밖에 모여 있는 유저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 몸을 돌려 내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의 퇴장과 함께 폭풍기사단을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유저들이 내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폭풍기사단이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팔콘시 경비단이 폭풍기사단을 대신해 내성을 가로막았다.
“아······ 아쉽다. 저 안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대박인데.”
“그러게 진짜로 보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늘은 저기에 보물이 좀 쌓여 있겠네.”
유저들이 이렇게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450명의 유저들이 죽으며 엄청난 양의 아이템을 떨어트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500여 명의 유저들은 대부분 악인 혹은 범죄자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더 많고, 중요한 아이템들을 떨어트렸을 테고 그 아이템들은 내성 안쪽에 쌓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은 EL 시스템상 24시간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24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줍지 않으면 그대로 소멸하였다.
NPC들은 절대 유저들의 아이템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내성 안엔 수많은 아이템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이래서 상혁의 전생에 ‘그림의 떡’이었단 말이 계속 나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전생과 다르다!’
상혁은 아쉬운 표정으로 내성쪽을 바라보고 있는 유저들 사이에 서 있던 상혁은 기회가 올 때까지 계속 기다릴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구경하던 유저들이 점점 흩어졌다. 몇몇 유저들은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내성문 앞을 배회했지만 그래 봤자 방법이 없었다. 내성문은 뚫려 있을지 몰라도 그 앞을 경비병들이 굳건히 지키고 있는 이상 안으로 들어갈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경비병들을 강제로 뚫고 들어갈 순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앞에서 수백 명의 유저들이 어떻게 분쇄 당했는지 뻔히 목격했는데 또다시 무모한 도전을 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계속 시간은 흘러갔고 유저들은 괜히 입맛만 다시며 모두 흩어져버렸다.
팔콘시에 어둠이 찾아왔지만, 경비병들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들은 내성문이 다시 원상복구가 될 때까진 이곳에 계속 서 있을 것처럼 보였다.
500여 명의 유저들이 쓸려버린 지도 이제 7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이렇게 흐르자 남아 있는 유저는 거의 없었다. 아주 극소수의 몇 명이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뭔가 할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어차피 할 일이 없어서 남아 있는 저레벨의 초보 유저 몇 명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더 기다리다간 내성문이 다시 복구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상혁은 적당히 어둠도 내려앉았고 사람들의 관심도 거의 없는 지금이 자신이 움직일 적기라고 느꼈다.
일단 상혁은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타이틀을 접미에서 접두로 옮겼다. 그러자 접미 효과는 접두 효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연히 변신은 풀렸고 원래 상혁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상혁은 그 상태에서 은검과 월도를 꺼내 들고 차분히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은월편의 특수 효과 덕분에 더더욱 어둠 속에 은밀하게 스며들 수 있었던 상혁은 조용히 내성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아무리 상혁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경비병들이 상혁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됐다.
하지만······ 지금 내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상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타이틀의 접두 효과······ 그것 때문이었다.
솔직히 파라얀, 아니 달빛기사단 정도만 되었어도 아무리 상혁이 타이틀 효과를 이용했다고 해도 바로 걸렸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상혁에게 만만한 상대였기 때문에 역시나 예상한 대로 타이틀 효과가 너무나 잘 먹혔다.
경비병들은 상혁이 내성 안쪽으로 들어가는데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던 초보 유저 몇 명도 상혁을 발견하지 못했다.
존재감을 흐리게 하는 건 유저들에게도 어느 정도 통용이 되었고 상대가 초보 유저라는 점과 어둠 속에 은신까지 했기 때문에 전혀 상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리 존재감이 최대한 지워졌다고 해도 조심은 해야지.’
상혁은 어둠이 짙게 깔린 지역으로만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결국 20분 만에 내성 안쪽으로 들어올 수가 있었다.
‘와!’
내성 안에 들어선 상혁은 그곳에 펼쳐진 멋진 광경을 보고 감탄을 했다.
수북이 쌓여 있는 아이템들. 500여 명의 유저들은 시체 대신 아이템들을 가득 남겨놓고 사라져 있었다.
NPC들은 마치 이 아이템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템들은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법 등급의 아이템은 정말 일일이 세기도 힘들 정도로 많았고 간간이 희귀 등급의 아이템이 보였다. 최근 들어 제법 능력이 좋은 생산 계열 유저들이 늘어나 유저들의 아이템 질도 그에 맞춰 급상승했기 때문에 이곳에 떨어져 있는 아이템들도 생각보다 질이 괜찮았다.
‘그나저나 어딘가에 유일(유니크) 등급 아이템이 하나 있을 텐데······.’
상혁이 찾는 건 이번 습격 사건 주도한 라이트닝 길드의 길드마스터인 ‘썬더볼트’가 떨어트린 ‘그림자 망토’였다.
아직 글이 안 올라왔겠지만, 며칠 사이에 썬더볼트는 인게임즈에 이번 습격 사건에 대한 후회를 담은 장문의 글을 적을 것이고 그 내용 안에 그림자 망토에 대한 언급도 있었다.
그가 현금으로 무려 3천만 원을 주고 샀다는 그림자 망토. 그걸 잃어버린 썬더볼트는 그 아이템과 똑같은 아이템 가진 사람이 있으면 3천만 원을 다시 줄 테니 꼭 팔아달라고까지 얘기했었다.
당시 글을 읽었던 상혁은 돈의 단위가 워낙 커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림자 망토······ 그림자 망토······. 아! 저기 있다!’
결국, 상혁은 그림자 망토를 찾아냈다.
수많은 아이템 사이에 깔려 있던 그림자 망토. 상혁은 그것을 가장 먼저 공간확장가방에 챙겨 넣은 후 그다음부터는 등급이 높은 희귀 아이템들을 차례대로 챙겨 넣기 시작했다.
상혁이 가지고 있는 공간확장가방은 팔콘시에서 판매하는 공간확장가방 중 가장 확장비율이 높은 가방이었다. 그리고 상혁은 혹시 몰라 가방을 텅텅 비워온 상태였다.
그럼에도 내성 안에 쌓여 있던 아이템이 워낙 많다 보니 공간확장가방이 꽉 차버렸다.
대략 쌓여 있던 아이템의 10% 정도는 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담지 못한 아이템들은 모두 값어치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냥 버려두어도 별 상관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해!’
상혁은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은 아이템을 가지러 다시 여기에 돌아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가방을 가득 채운 상태로 다시 어둠 속을 살금살금 걸어서 내성을 빠져나가기 시작한 상혁······. 그는 결국 그림의 떡을 현실의 떡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 [18장] 거인의 동굴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