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2) >
* * * *
일리아와 진정한 합일(合一)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혁은 그녀와 보낸 시간이 만족스러웠다. 특히 그녀의 몸매는 현실에서 활동하는 그 어떤 모델보다 더 완벽했다. 얼굴 역시 엘프가 와서 울고 갈 정도였기 때문에 상혁은 잠시 극락(極樂)에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렇게 흐뭇한 시간을 보낸 상혁은 레인보우를 나와 이번 퀘스트로 얻는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호칭 - ‘일리아의 남자’
등급 – 희귀(Rare)
설명 – 일리아가 당신에게 단단히 빠졌습니다. 그녀는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하프 엘프이자······(잠김 : 알 수 없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비밀을 더 알고 싶으신가요? 그럼 그녀의 마음을 좀 더 훔쳐보세요.
효과 - [접두: 없음] [접미: 없음] [상시지속 효과: 오! 나의 일리아(A) : 이틀에 두 시간 동안 일리아를 완벽하게 부릴 수가 있다. 파티에 넣어 용병처럼 부릴 수도 있고 또는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게 할 수도 있다. 단, 아직 그녀의 정체는 ‘잠금’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는 능력치가 제한된 상태로 부릴 수밖에 없다.]
‘일리아······ 하프엘프였군. 어쩐지 예쁘더라.’
엘프는 기본적으로 미(美)의 한계점에 도달해 있는 종족이었다. 특히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엘프는 다른 건 몰라도 아름다움은 엘프를 능가한다고 알려졌었다.
‘그나저나 능력이 봉인된 NPC라······ 이런 설정도 있을 수 있구나.’
전생의 상혁은 NPC랑 별로 친하질 않았다. 그는 NPC와 관련된 얘기들은 전해 들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은월편(隱月片)[세트 희귀(Rare) +++]
- 비선의 주인인 비선주에게 내려오는 두 자루의 단검. 은검(隱劍)과 월도(月刀)로 이루어진 은월편은 비선주의 상징이자 권위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물건이라 할 수 있다.
[기본 능력치] 공격력 70(+21), 민첩 +30(+9)
[세트 효과] (2) 민첩 +20(+6)
[특수 능력치] 이동 속도 +30%
[특수 효과] <은신(A) : 어둠 속으로 더욱더 쉽게 숨을 수 있습니다.>, <달빛축복(A) : 달빛 아래서 전투를 할 때 모든 능력치가 5% 상승합니다.>
[보너스 효과] (1) 민첩+10 (2) 민첩+15 (3) 민첩+20
‘와······ 이게 어떻게 희귀 아이템이야. 세트 아이템이면서 삼 플러스가 붙어서 그런가? 아냐, 옵션 자체도 유니크보다 더 좋아. 거기다가 보너스 효과는 삼민 크리 터졌네. 대박이네! 진짜.’
상혁은 은월편을 확인하는 순간 입이 벌어졌다. 분명 아이템 등급은 희귀였는데 실제로 아이템이 가지고 있는 성능은어지간한 유니크를 압도했다.
특히 민첩에 집중된 옵션은 상혁에게 맞춤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울렸다. 심지어 무작위로 옵션이 선택되는 보너스 효과마저 민첩이 세 개가 중첩되어 붙으면서 삼민 크리가 터졌다.
이건 진짜 어지간해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괜히 비선주의 상징이 아니란 건가?’
상혁은 은월편을 챙기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가장 기대가 되면서 동시에 궁금하기까지 한 특수 타이틀 팔콘의 그림자 공작.
이것만 확인하면 이번 퀘스트로 얻은 보상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었다.
호칭 - ‘팔콘의 그림자 공작’
등급 – 특수
설명 – 팔콘의 비선을 장악한 비선주가 가질 수 있는 특수한 타이틀. 이 타이틀은 비선주에게 귀속된 타이틀이기 때문에 비선주의 자리를 잃으면 당연히 사라진다.
효과 - [접두 : 몸 전체에 그림자 효과가 적용되어 존재감이 굉장히 희미해집니다.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NPC가 아니라면 당신을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접미 : 전신에 일루젼 효과를 적용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적용될 수 있는 일루젼 효과는 총 7가지로, 외모 설정을 통해 미리 설정해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설정된 7가지 외모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단, 전투 시에도 일루젼 효과를 유지하고 있으면 모든 능력치가 30% 하락하는 페널티가 생깁니다.]
[상시지속 효과: 모든 NPC와의 호감도가 친밀 단계까지 상승합니다. 단, 몇몇 특수한 NPC는 이 효과에서 제외됩니다.]
“와······.”
솔직히 등급이 특수라고 할 때부터 기대하긴 했었다. 특수 등급은 일반적인 등급인 ‘희귀’, ‘유일’, ‘전설’ 같은 등급과는 또 다른 매우 특별한 등급이었다.
그것은 일정한 틀로 평가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굳이 일반적인 등급에 비교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거의 전설 등급과 맞먹는 취급을 받았었다.
어떤 부분에선 전설 등급보다 더 대단하다고 평가받기도 했었다.
‘기본적인 능력을 상승시켜주는 타이틀은 아니지만, 이 타이틀의 가치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혁은 한눈에 이 타이틀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존재를 감추고 정체를 숨길 수 있는 효과는 물론이고 모든 NPC와의 호감도가 친밀로 올라간다는 이 부분은 정말 그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로써 이번 퀘스트의 소득은······ 최상! 극상! 이보다 좋을 수가 없을 정도다.’
상혁은 너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회귀한 후 미리 생각해둔 여러 목표가 있었는데 그중 많은 목표가 NPC들과 엮여 있었기 때문에 이 옵션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비선······ 이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 걸까?’
아직 정확하게 비선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상혁은 재빨리 조직 관리창을 열어보았다.
[관리자 페이지]
- 팔콘시의 비선(秘線) [S급]
- 마스터(Master) 불멸 [조직 장악력 : 50 / 250]
- 대리인 : 일리아 [신뢰도 150 / 250]
-조직 설명 : 팔콘시를 암중에서 장악하고 있는 정보 길드. 수많은 NPC가 황혼의 땅에 넓게 퍼져서 비밀 조직원으로 활동 중이다. 무력 자체는 별 볼 일 없는 조직이지만 정보력은 황혼의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길드보다 뛰어났다.
-조직 현황 : 대리인 임명 중 [자세히 보기]
-조직 관리 : 대리인 임명 중 [자세히 보기]
-조직 스킬
<1> 팔콘시 귀환[재사용 대기 시간 1시간(무료)]
<2> 정보 열람[재사용 대기 시간 12시간]
<3> 정보 수집[재사용 대기 시간 24시간]
<4> 정보 조작[재사용 대기 시간 48시간]
상혁은 관리자 페이지를 살펴보자 대충 비선이 어떤 조직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비선주라고 해도 내 마음대로 조직을 이용할 순 없다는 건가? 아, 조직 장악력이 올라가면 조직 스킬이 조금씩 업그레이드되니까 나아지긴 하겠군.’
귀환 스킬은 어지간한 조직은 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킬이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고 중요한 건 정보 열람, 수집, 조작. 이 세 가지 스킬이었다.
‘일단 살펴보는 건 여기까지만 하고······.’
상혁은 관리자 창을 닫고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가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을 접미 타이틀을 설정했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외모 설정 창이 나타났다.
바로 이 설정 창에서 외모를 설정하면 그 외모가 저장되고 그 뒤부터는 그걸 언제라도 선택해서 사용할 수가 있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상혁의 체형을 기준으로 +- 1.3배 정도까지만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너무 어처구니없는 변형은 불가능했다.
현재 상혁의 게임 속 외모 설정은 현실과 거의 똑같았다. 기본적으로 게임에 최초 접속할 땐 자신의 현실 외모가 베이스가 되긴 했지만, 그 상태에서 어느 정도 변경이 가능했기 때문에 못난이가 훈남이 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상혁은 외모에 별로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라서 거의 그대로 설정해버렸었다.
그렇기 때문에 키는 183cm였고 몸무게는 77kg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대략 키는 230cm 정도까지 늘리거나 혹은 130cm까지 줄일 수 있었다. 몸무게 역시 100kg까지 늘리거나 55kg까지 내릴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수염과 머리카락의 길이와 색도 세세하게 설정할 수 있었고 심지어 피부색도 다양하게 바꿀 수가 있었다.
이 정도 변경이라면 진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었다.
‘여유가 되면 기본 스킬로 변용술(變容術)을 배워볼까 했었는데······ 변용술보다 이게 백배는 더 좋은 거 같네.’
상혁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단 한 가지 외모를 설정해 보았다. 키는 조금 줄여서 165cm까지 내린 후 몸무게는 그냥 유지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좀 길게 늘였고 수염도 같이 적당히 길렀다. 피부색은 조금 더 밝게 만들었다.
다 만들고 나니 진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유저 한 명이 탄생해 있었다.
‘이걸 1번(흔남)으로 설정하고······ 나머진 나중에 설정해야지.’
흔남, 흔하디흔한 남자란 뜻을 가진 말을 1번 설정에 약칭으로 붙여주었다.
‘이름까지 바꿔주는 기능이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뭐, 이름은 내가 공개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이 알 수가 없으니까 큰 상관은 없겠지.’
* * * *
흔남으로 변한 상혁은 팔콘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볼일을 보았다. 상혁이 이렇게 외모를 확 바꾸면서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된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마군의 유저들이었다.
그들은 벌써 한 달 전부터 열심히 상혁을 찾고 있었다. 초기엔 상혁이 와이번 둥지에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아서 상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상혁이 ‘그림자의 다섯 가지 시련’ 때문에 팔콘시를 닷새 동안 활보할 때 겨우 마군 유저 중 한 명이 상혁을 발견하고 킬링머신에게 연락할 수 있었다.
하지만 킬링머신이 소식을 듣고 재빨리 달려왔을 땐 이미 상혁이 흔남으로 변한 후였다.
아무리 그들이 눈에 불을 켜고 팔콘시를 샅샅이 뒤져도 절대 상혁을 찾을 순 없었다. 상혁은 당분간 사냥할 때를 제외하곤 이 모습으로 계속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진짜 변용술은 비교조차 할 수가 없네. 심지어 변용술은 전투 시엔 자동으로 풀려버리는데······ 이건 페널티가 있긴 해도 풀리지가 않네. 정말 최곤데!’
상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접미 타이틀 효과가 마음에 들었다.
황혼의 객잔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상혁은 보고 있던 인터넷 창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황혼의 땅에서 이뤄야 할 목표는 사실상 다 이뤘으니 이제부터는 거인의 동굴 공략에 집중해야겠네.’
생각을 정리한 상혁. 하지만 그의 이러한 판단은 불과 몇 초 만에 다시 바뀌게 되었다.
“내성까지 무조건 달려라!”
황혼의 객잔 앞쪽에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유저들. 언뜻 봐도 수백 명은 넘을 것 같은 그들은 팔콘시의 내성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고 있었다.
“뭐, 뭐야?”
“어! 저거 라이트닝 길드 아냐?”
“펜타킬 길드도 있는 거 같은데? 어라, 핑 길드도 있네?”
황혼의 객잔에 앉아 있던 유저들은 내성으로 몰려가던 수백 명의 유저들을 바라보며 제각각 한마디씩 했다.
‘쟤들은 뭐지? 왜 갑자기 내성을 향해······ 아! 맞다. 오늘이······ 피의 월요일이었구나!’
상혁의 머릿속에 그가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떠올랐다.
‘전생에선 이때 오크 숲 사냥터에서 피똥 싸면서 오크만 잡고 있었는데······ 이번 생에선 이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있겠구나.’
오늘은 월요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월요일이 아닌 피의 월요일이 될 예정이었다.
피의 월요일이란 별 게 없었다.
그냥 팔콘시에 피가 넘쳐 흘렀다고 해서 피의 월요일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피는 없었고 피를 대신한 빛가루가 엄청나게 흘러넘칠 예정이었다.
지금 내성으로 달려가는 이들은 상혁이 알기엔 대략 6개 길드 연합을 한 연합세력이었다. 6개 길드 모두 나름 큰 길드였었는데 놀랍게도, 아니 무모하게도 이들은 팔콘시를 점령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팔콘시의 내성은 유저들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간혹 특별한 퀘스트를 받은 이들이 살짝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금방 다시 나오곤 했다.
이렇다 보니 유저들에게 내성은 동경의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성 안에 온갖 보물이 가득 있다는 소문까지 돌아서 더더욱 내성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유저들이 많이 늘어났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거칠 때마다 더 커지고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 누구도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시간이 흐르자 소문은 단순한 소문이 아닌 명확한 사실이 되었다.
6개 길드가 뭉친 것도 소문을 소문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무한한 자유도를 지닌 EL의 특성상 자신들이 무력으로 내성을 장악하면 내성 안에 있다는 보물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들이 이렇게까지 무모해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팔콘시 경비단에 속해 있는 NPC들이 너무 약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처음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경비병들은 유저들이 넘을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유저들의 레벨이 40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경비병들이 슬슬 만만해지기 시작했다.
1:1은 몰라도 40레벨 이상 유저가 둘 이상 모이면 경비병과 비등비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몇몇 고레벨 악인 유저들이 경비병을 죽이고 도망가는 일까지 여기저기에서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유저들은 팔콘시의 경비 체계를 만만히 보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6개 길드의 450명이 넘는 유저들이 일시에 내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이 정도 전력이라면 당연히 내성을 장악하고 그 안에 있는 보물창고를 털 수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내성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게 헛된 망상이었을 뿐이란 걸 깨닫게 되지. 마스터 나이트이자 팔콘시의 기사단장인 질풍의 파라얀이 나타나는 순간 저들은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들처럼 한 방에 쓸려버리지. 아! 그러고 보니!’
상혁은 파라얀이란 살아 있는 분쇄기에 의해 450명의 유저들이 순식간에 갈려버리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문득 아주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오늘 내성 안에서 진정한 아이템 파티가 열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상혁은 재빨리 내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 [17장] 팔콘시의 그림자 공작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