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비선(秘線)과 비선주(秘線主) (2) >
졸지에 폭탄을 받은 바이제의 눈빛이 급격히 흔들렸다.
‘와, 무슨 놈의 게임이 이런 부분까지 이렇게 섬세하게 만들었냐.’
상혁은 바이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진짜 상혁이 예상한 대로 관계자가 틀림없다면 뭔가 확실한 반응이 올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바이제의 눈빛이 흔들리고 말이 바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건 그가 비선의 관계자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하며 방대하지만 아주 정교하게 얽혀져 있던 EL의 퀘스트 논리회로가 잠시 과부하가 걸렸었다. 덕분에 EL의 모든 시스템을 관리하는 카오스가 직접 관여를 해서 논리회로를 정상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과정에서 바이제의 흔들림이 있었던 것이었다.
원래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변수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파고들어 왔지만, 카오스는 이번에도 역시 아주 훌륭하게 대처해서 새로운 퀘스트 라인을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카오스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해 운영팀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다른 게임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EL은 가능했다. 상식을 초월하는 인공지능 관리자 ‘카오스’는 이렇게 다소 과할 정도로 게임을 완벽하게 관리했다.
각설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바이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선주,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 말을 하는 건가?”
히든 연계 퀘스트 ‘비선(秘線)의 비밀’을 받았습니다.
본 퀘스트는 클리어하지 못할 시에 페널티를 받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받아들이겠습니까? Y/N
‘터졌다!’
상혁은 눈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나타나는 순간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페널티가 있단 얘긴 그만큼 클리어했을 때의 보상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유저들은이런 페널티가 있는 퀘스트를 더 좋아하기도 했다. 상혁 역시 어차피 큰 보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못 먹어도 고!’
결정을 내란 상혁은 빠르게 Y를 선택하며 입을 열었다.
“보이지 않는 눈과 귀 그리고 입을 빌려 듣고 보고 말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그림자들의 팔과 다리를 빌려 움직이는······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그림자. 그게 바로 비선주 아닌가요?”
다소 오글거리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무조건 이렇게 말을 해야 했다. 당연히 이번 말도 상혁이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재해석해서 만들어낸 말이었다. 바이제가 듣고 확실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말을 미리 준비해온 상혁. 그는 이번 목표를 위해 정말 많은 준비를 해온 상태였다.
그렇다면 상혁은 어떻게 비선과 비선주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이고 또 그걸 이용해 이런 설계를 계획할 수 있었건 걸까?
그 이유는 당연히 상혁의 전생과 관련이 있었다.
상혁은 감독 생활을 할 때 같이 코치로 일하던 후배와 술을 마시다 재미있는 얘길 들었었다.
“······친구 놈도 중요한 순간에 미끄러져서 모든 걸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녀석은 비선이라고 불리던 그 비밀 조직은 NPC들이 만든 정보 길드일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었어요. 걔가 원래 좀 하나에 꽂히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면이 있는 놈이었거든요. 그리고 걔가 꽂혔던 게 바로 팔콘시에 존재하는 모든 NPC와 인연의 고리를 만드는 것이었어요. 미친 소리 같지만, 진짜 그 녀석은 게임을 시작하고 3년 동안 거기에만 집중했었어요. 그리고 결국 뭔가 대단한 퀘스트를 하나 얻게 된 거죠. 그게 바로 비선과 관련된 퀘스트였던 거예요. ·········(중략)······ 근데 결국 거기까지가 한계였던 거예요. 아무래도 제대로 레벨을 올린 플레이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겠죠. 어쨌든 그래서 그 녀석은 비선주가 되지 못했데요. 솔직히 저도 이 녀석 말을 100% 믿는 건 아니지만, 얘기에 워낙 디테일이 살아있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진짜 NPC 정보 길드 같은 게 있고 그곳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굉장하겠죠?”
당시 상혁은 술자리에서 거의 몇 시간 동안 이 얘길 들었었다. 후배처럼 상혁 역시 워낙 얘기에 디테일이 살아 있어서 정말 재미있게 듣고 기억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심지어 상혁은 그 뒤에 나름대로 비선에 관해 조사까지 해봤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짜 비선에 대한 여러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때부터 상혁은 비선의 존재를 믿었었다. 그래서일까? 회귀를 한 후 가장 먼저 떠올린 몇 가지 정보 중 하나가 바로 비선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선주는 언제까지 계속 비워둘 생각이신가요? 이대로는 모든 게 엉망이 될 겁니다.”
뒷말은 그냥 던져본 말이었다. 상혁은 이런 식으로 아니면 말고 식의 말을 던진 후 상대방이 반응하는지 살펴보았다.
“확실히 그 자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비워둘 수 없는 자리이긴 하지.”
상혁의 말에 낚인 바이제가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더 제공해주었다.
“그렇기에 전 더더욱 증명해야 합니다.”
상혁은 교묘하게 말로 바이제를 엮어갔다.
“알겠네. 자네의 뜻을 그에게 전달하겠네.”
히든 퀘스트 ‘비선의 비밀’이 새롭게 갱신되어 ‘발 없는 말의 주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바이제가 넘어갔다. 이로써 상혁은 가장 어려운 첫 번째 문턱을 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상혁은 이런 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중간에서 치고 들어가는 방식은 성공보단 실패 확률이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도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기에 과감히 도전했고 그 결과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 * * *
상혁은 바이제의 연락을 기다리며 위탁 판매소와 경매장에서 남은 물건들을 정리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와이번 둥지에서 제대로 꿀을 빤 덕분에 다시 상혁은 아주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상혁은 이걸로 만족하지 않고 이 돈을 다시 투자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이번에 그가 골드를 투자한 항목은 스킬북(Skill Book)이었다. 영혼 스킬(Soul Skill)이 아닌 기본 스킬(Basics Skill)은 스킬북을 통해 스킬을 배울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유저들이 스킬북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유저들은 당연히 스킬북을 그냥 있는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만 알고 있었다. A란 스킬북을 사용하면 A란 스킬이 생성되는 게 바로 가장 기본적인 사용법이었다.
하지만 스킬북은 또 다른 활용법이 존재했다. 아직은 아무도 모르고 있는······ 아니, 알 수가 없는 활용법. 그것은 바로 스킬북 합성과 강화였다.
스킬북 합성과 강화, 그건 지금은 시도 자체를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스킬북 합성과 강화를 하기 위해선 ‘조합 술사’와 관련된 능력을 지닌 NPC 또는 유저가 필요한데 일단 황혼의 땅엔 조합 술사 NPC가 없었고 그 NPC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조합 술사와 관련된 고대의 지식을 익힌 유저도 없었다.
조합 술사는 황혼의 땅을 벗어나면 등장하는 지옥불 사막의 첫 도시인 오아시스 ‘단투’에 가면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유저들도 스킬북도 합성과 강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유저들은 왜 이따위로 NPC를 배치해서 자신들이 손해를 입게 하였느냐고 라온소프트에 엄청나게 항의했었지만 라온소프트의 대답은 간단했다.
‘황혼의 땅을 벗어나야지만 얻을 수 있는 고대의 지식은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조합 술사도 그 중 하나일 뿐입니다.’
참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유저들이 아무리 항의해도 바뀌는 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본 스킬은 카르마를 좀 소모하기만 하면 무리 없이 스킬을 지우고 빈 슬롯으로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항의가 아주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그리고 스킬북의 합성 공식은 아주 간단한 편이었다. 절대 카드 조합식처럼 복잡하고 특이하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냥 합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합성 스킬북이 그냥 기본 스킬북보다 더 성능이 좋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강화까지 추가되면······ 합성도 강화도 하지 않은 기본 스킬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상혁은 현재 기본 스킬을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있었다.
‘기본스킬이 아무리 영혼스킬보다 중요도가 떨어져도 잘만 사용하면 굉장히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이지.’
진정한 고수라면 10레벨마다 하나씩 늘어나는 기본 스킬 슬롯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아야 했다. 기본 스킬을 그냥 공짜 스킬 정도로 생각하는 유저는 절대 상위 랭커가 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쌓여 있던 스킬북들이 합성, 강화 시스템이 알려지게 되면 씨가 마르게 된다. 특히 강화는 수치가 커질수록 실패확률도 급속도로 높아졌기 때문에 정말 많은 스킬북이 강화 실패로 사라질 거야.’
스킬북은 정확히 +10까지 강화할 수 있었는데 +5를 넘어가기 시작하면 성공 확률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조합 술사는 단순히 스킬북만 합성하고 강화하는 게 아니라 거의 모든 종류의 아이템을 합성하고 강화했기 때문에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아이템 체계가 대격변을 맞이하게 될 예정이었다.
‘아무리 내가 골드가 많아도 모든 스킬북을 다 사재기할 순 없으니 인기가 가장 많을, 그리고 내가 사용할 스킬북만 집중적으로 사재기하자.’
결정을 내린 상혁은 스킬북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눈치 빠른 전문 장사꾼들의 관심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천천히 스킬북들을 사재기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계속 쌓이고 또 쌓일 스킬북들이었기 때문에 매물이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게 상혁이 며칠 동안 위탁 판매소와 경매장에서 주야장천 판매와 구매만 반복해서 하고 있는 사이 바이제는 ‘발 없는 말의 주인’이라 불리던 그 NPC에게 상혁의 얘기를 전달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난 후······ 드디어 발 없는 말의 주인이 상혁을 만나겠다는 연락이 왔다.
* * * *
그, 아니 그녀는 식스나인 스트리트에서 가장 큰 환락업소인 ‘레인보우’를 운영하고 있는 대표였다.
레인보우는 NPC들만으로 운영되는 식스나인 스트리트를 대표하는 환락업소였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NPC들은 죄다 현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엄청난 미녀들이었다.
현행법상 매춘 서비스를 제공할 순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최대로 즐길 수 있는 게 유사성행위 중에서도 가장 단계가 낮은 수준 정도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이곳은 늘 남성 유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려고 몇 시간을 기다리는 유저가 넘쳐날 정도였다.
상혁이 이런 대단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그녀와 독대를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녀가 ‘발 없는 말의 주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출이 심한 복장과 아찔할 정도로 잘빠진 몸매. 그리고 엘프가 울고 갈 정도로 예쁜 얼굴까지······ 상혁은 눈앞에 있는 NPC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계속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냥 NPC일 뿐이야.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이렇게 계속 자기 최면이라도 걸지 않으면 속된 말로 꼴릴 것만 같았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그런 추한 모습을 보여줬다간 비선주는 고사하고 대화도 제대로 못 하고 쫓겨날 수가 있었다.
“바이제님에게 듣기는 했지만 전 아직도 당신이 어떻게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그녀, 아니 일리아는 상혁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길 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이란 건 없는 법이죠.”
상혁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 역시 퀘스트의 일부분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했다.
“완벽한 비밀이라······ 좋습니다. 그럼 당신이 우리에 대해 알게 된 건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도록 하죠. 하지만 비선주는 다릅니다. 그 자리는 아무나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혹시 그 자리에 이름표라도 붙어 있습니까? 그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의 존재가 그 자리에 어울린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곳에 앉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요?”
상혁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곧바로 돌직구를 찔러 넣었다. 사실 상혁도 정확한 걸 알고 있진 않았다. 다만 이럴 것 같다고 예상한 후 그에 맞춰 미리 말을 만들어왔을 뿐이었다.
“······으음······.”
탁탁탁탁.
일리아는 손가락으로 의자의 손잡이 부분을 두들기며 계속 상혁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혁 역시 굳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일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휴우, 좋습니다. 당신의 자격 증명······ 그걸 받아들이겠습니다.”
한숨을 내쉬며 상혁을 인정하는 일리아.
그 순간 퀘스트가 다시 한 번 갱신되었다.
히든 퀘스트 ‘‘발 없는 말의 주인’이 새롭게 갱신되어 ‘비선주가 되기 위한 자격 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건 배짱의 승리, 아니 미래를 알고 있는 자의 승리라 할 수 있었다.
< [16장] 비선(秘線)과 비선주(秘線主)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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