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비선(秘線)과 비선주(秘線主) (1) >
@ 비선(秘線)과 비선주(秘線主).
피의 지식 ‘와이번 블러드(Wyvern Blood)’ [미사용]
: 와이번의 피에 담긴 강력한 힘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와이번의 피를 통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전혀 새로운 종(種)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상세 효과 : 와이번의 가죽(B)[물리, 마법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와이번의 강인함(A)[힘과 민첩이 1.5배 상승하고 이동속도가 20% 상승합니다.] 와이번의 회복력(B)[생명력과 마력의 회복 속도가 빨라집니다.]
혈통 스킬 : 와이번의 포효(A)[크게 울부짖으며 투지를 불태운다. 10분 동안 반경 10m 안에 있는 모든 적의 최대 생명력과 이동속도를 낮추고 자신의 최대 생명력과 공격력을 높입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20분>]
보너스 효과 : 모든 와이번 류 몬스터가 선공을 하지 않고 길들이기 기술이 있으면 더 쉽게 와이번을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냥 대충 살펴봐도 피의 지식은 고대의 지식과 다르게 처음부터 모든 게 완성되어있었다.
혈통을 이어받는다는 설정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성된 능력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피의 지식은 전설 등급 아이템만큼이나 얻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린 와이번 로드를 그렇게 많이 잡았던 상혁이 ‘와이번 블러드’를 한 개도 얻지 못 했던 걸 생각해보면 이것의 드롭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대충 알 수가 있었다.
‘와이번 블러드······ 분명 나쁘진 않아. 아니, 오히려 지금 시점에선 이보다 더 좋은 걸 찾기 힘들 거야. 그렇지만 내가 사용할만한 건 아니야. 분명 내가 소울 홀을 하나 남겨둔 게 피의 지식을 위해서인 건 맞지만 내가 노리고 있는 피의 지식은 따로 있어.’
상혁이 노리고 있는 피의 지식. 그것은 아직 얻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와이번 블러드를 흡수하면 지금 당장은 엄청나게 좋겠지.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야. 계획대로 가는 게 좋아.’
상혁은 게임을 좀 더 멀리 내다보았다. 그렇기에 눈앞의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자신이 원래 그렸던 큰 그림을 묵묵히 그려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팔 수가 있으니까 내가 손해 보는 건 전혀 없어. 오히려 지금 타이밍에 이걸 내놓으면······ 진짜 난리가 날지도 모르겠네.’
지금은 모든 유저가 피의 지식이란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와이번 블러드가 공개되면 당연히 모든 유저의 관심이 이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걸 어떻게 팔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네.’
어차피 급하게 처분해야 할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차분히 생각을 정리한 후 파는 게 제일 좋았다.
상혁은 와이번 블러드를 은행의 가상 창고에 넣은 뒤 다음은 퀘스트 보상으로 얻은 에메랄드 반지를 살펴보았다.
EL에선 액세서리류의 아이템이 희귀한 편이었기 때문에 몬스터에게서 이런 액세서리 완성품을 얻으면 굉장히 재수가 좋은 것이었다.
에메랄드 반지 [희귀(Rare)]
- 그린 와이번의 눈알을 가공해 만든 반지. 신묘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기본 능력치] 민첩 +20
[특수 능력치] 독 저항력 +40
[특수 효과] 해독(B) [독을 해독합니다.]
‘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반지를 손가락에 착용했다. 이런 아이템은 아무래도 파는 것보단 자신이 사용하는 게 더 좋았다.
반지를 제외하곤 다 고만고만한 아이템들이었다. 상혁은 그것들을 모두 정리해서 판매소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싸게 나온 각종 재료 아이템들은 모두 구매했다.
대충 정리를 끝낸 상혁은 팔콘시에서 가장 많은 유저가 모여드는 ‘황혼의 객잔’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혼의 객잔은 아주 커다란 술집이었다. EL은 다양한 종류의 주류와 음료를 PPL 계약을 맺고 판매했기 때문에 황혼의 객잔에선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류와 음료를 다 맛볼 수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곳엔 요리 장인 NPC가 존재했고 그는 못하는 요리가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천 가지의 요리를 전부 맛볼 수가 있었다.
이 요리들 맛에 반해서 요리라는 콘텐츠에 푹 빠진 유저들도 많았다. 그들 중 몇몇은 나중에 요리 장인을 능가하는 요리사가 되어서 현실에서 활동하는 스타 요리사들보다 더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객잔 테이블엔 간단한 ‘인터넷 검색’이 되는 태블릿 PC가 장착되어 있었다. 이건 다른 곳에선 불가능하고 오로지 황혼의 객잔 안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맛있는 요리와 다양한 주류, 음료를 맛볼 수 있고 간단한 인터넷 검색까지 되는 이곳은 당연히 많은 유저들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하수도 던전 가실 원거리 딜러분 구합니다!”
“뱀 굴 입구 사냥하실 힐러, 탱커 구합니다.”
“근거리 단검술을 배운 딜러 데려가실 파티 없나요? 딜은 자신 있습니다!”
······
······
많은 유저들이 황혼의 객잔에 앉아서 말풍선 매크로를 띄워놓고 파티를 구했다. 솔직히 직접 말로 외치는 건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다들 이렇게 머리 위에 말풍선 매크로를 띄워놓고 밥을 먹거나 인터넷 서칭을 했다.
상혁은 파티를 구하러 이곳에 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빈자리에 앉아 간단한 요리와 음료를 주문한 후 인터넷을 살펴보았다. 그는 그동안 와이번 둥지에서 오로지 와이번 사냥에만 집중을 하다 보니 EL 세상의 최근 동향을 전혀 파악하지 못 했다.
결국 EL은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과 엮이며 살아가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나만 잘하는 걸로 모든 게 끝나지 않았다.
난 나대로 잘하고 또 남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꾸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호오, 하수도 던전을 최초로 공략한 길드가 테리쿨룸도 라이징도 아닌 레드라인(RED Line)이었어? 혹시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뀐 건가? 그건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하르칸의 철벽방패는 레드선(Red Sun)이 차지했겠네.’
레드선은 레드라인의 길드마스터이자 훗날 1세대 프로게이머가 될 유저였다. 실력은 제법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빼어난 인물은 아니었다.
‘뱀 굴은 역시 예상대로 난장판이 되었고······ 어!’
커뮤니티들에 올라온 화제의 글들을 모두 살피던 상혁은 뭔가를 발견했다.
‘젠장 이거 아무리 봐도 와이번 둥지 찾기 퀘스트로 이어지는 연계 퀘스트인 거 같은데······ 거의 다 끝나간다고?’
안타깝게도 상혁이 가장 원하지 않던 일이 조만간 일어날 것 같았다.
‘흐음, 대충 일주일······ 길어봤자 열흘 안에 와이번의 둥지가 공개 되겠네.’
솔직히 퀘스트를 받은 유저들만 와이번의 둥지에 찾아오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될 게 없었다. 와이번의 둥지는 좁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유저들에게 어느 정도 구역을 내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와이번의 둥지와 같은 난이도도 높은 대신 보상이 짭짤한 곳은 무조건 다른 유저들에게 공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최상위권 사냥터가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상황에선 와이번의 둥지에 사람들이 몰려올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일주일이라도 죽어라 꿀을 빨아야겠네.’
상혁은 30분 정도 더 인터넷을 검색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할 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와이번의 둥지에서 마지막으로 최대한 꿀을 쥐어짜는 게 먼저일 것 같았다.
* * * *
정확히 9일.
9일 만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한 무리의 파티가 와이번 둥지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치 신세계라도 찾은 것처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와, 이런 곳에 사냥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딱 봐도 고레벨 사냥터네요. 정확한 건 가까이 가서 ‘탐색’ 기술을 사용해봐야겠지만 저기 멀리 보이는 와이번들······ 상당히 강력한 몬스터가 확실해요.”
“강력한 만큼 보상도 좋겠지. 아! 그러고 보니 경매장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는 와이번 가죽이나 이빨, 발톱은 여기서 구하는 건가? 잠깐······ 그럼 우리가 여기에 최초로 온 게 아니란 뜻이야?”
“에엑? 정말? 우리가 이 지옥 같은 22연퀘를 어떻게 깼는데······”
“으으, 갑자기 소름이······.”
“그나마 우린 길드에서 밀어줘서 빨리 깬 거잖아. 다른 파티들은 아직도 연계 퀘스트에서 헤매고 있던데 진짜 어떤 길드가 여길 먼저 찾을 수 있었던 거지?”
그들은 아주 중요하면서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상혁은 다른 쪽 넝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벌써부터 내 존재를 드러낼 필요는 없겠지. 사냥터가 좀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꿀은 빨만큼 빨았고 황혼의 땅을 빠져나가기 전에 할 일도 몇 개 있으니 깔끔하게 포기하자.’
‘고레벨 몬스터인 와이번을 홀로 사냥하는 유저가 있다.’라는 소문이 도는 건 상혁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영원히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황혼의 땅 안에선 조용히 지내다가 누구보다 먼저 황혼의 땅을 빠져나가 드넓은 대륙을 마음껏 활보할 생각이었다.
팔콘시로 돌아온 상혁은 가지고 있던 와이번 가죽과 발톱을 평소보다 조금 더 싸게 그리고 더 많이 시중에 풀어버렸다. 사실 그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이렇게 물량을 풀고 있었다.
늘 공급이 부족했던 와이번 가죽과 발톱, 이빨이었기 때문에 거의 올리자마자 바로바로 팔려나갔다. 상혁은 이런 식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와이번 가죽과 발톱, 이빨을 거의 정리한 상태였다.
‘어차피 그들이 본격적으로 사람을 긁어모아 사냥을 하기 시작하면 가격은 계속 떨어진다.’
대충 아이템 정리를 끝낸 상혁은 황혼의 땅에서 자신이 이뤄야 할 마지막 목표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목표는 회귀자인 상혁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상혁의 전생에서도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목표였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를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상혁은 우선 자신과 가장 친하면서 동시에 팔콘시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토칸을 찾아갔다. 상혁이 알고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그 정보를 이용해 원하는 답을 찾으려면 NPC들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흐음······ ‘발 없는 말의 주인’이라······ 모르겠어. 난 처음 듣는 별명이야.”
한참을 고민하던 토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향력만 따지면 팔콘시에 존재하는 NPC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토칸이 모를 정도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 그러지 말고 바이제를 찾아가 봐. 그 녀석이라면 알 수도 있을 거야.”
탐구하는 자 바이제. 어차피 상혁도 토칸이 모르면 다음으로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상혁은 토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바이제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인 건 상혁이 토칸의 소개장과 정령술을 이용해 바이제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놔서 소개장이 없이도 바이제와 다이렉트로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바이제는 토칸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NPC가 아니었다. 특히 그는 여러 중요 퀘스트와 엮여 있는 핵심 NPC였기 때문에 많은 유저들이 바이제와 만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일까? 수혁이 바이제의 연구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가자 어떻게든 바이제를 만나보려고 연구실 앞을 기웃거리던 유저들은 깜짝 놀라며 상혁이 들어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뭐, 뭐야······ 저 사람 소개장도 없이 그냥 들어간 거야?”
“얼굴 봤어? 유저였지?”
“후드를 걸치고 있어서 얼굴은 못 봤는데 유저는 맞는 거 같았어.”
“시발 난 저기 한 번 들어가 보겠다고 며칠째 뺑뺑이를 돌고 있는데······. 짜증난다.”
“이따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이제랑 친밀도 어떻게 올리는지 물어봐야겠다.”
“거참 순진한 분이네. 그걸 저 유저가 가르쳐줄 것 같아요? 차라리 인게임즈 질문 게시판에 질문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근데 바이제랑 친밀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해요? 소개장 하나 받는 것도 더럽게 힘들던데.”
“누가 그러는데 소개장도 급이 있어서 등급이 낮은 소개장으론 바이제랑 만나기 힘들데요.”
“와, 진짜 짜증 나는 NPC네.”
유저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갑론을박을 하는 사이 상혁은 바이제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의 주인이라······.”
“네, 그를 만나고 싶습니다.”
“왜 그를 만나려는 건가?”
바이제는 매우 진지한 눈빛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증명하고 싶은 게 있거든요.”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지금부터 상혁이 할 말 들은 그가 전생에 들은 아주 중요한 정보를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해서 만들어낸 가상의 소스들이었다.
이소스들이 먹힌다면 상황이 상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고 먹히지 않는다면 목표는 구경도 못하고 거하게 퇴짜를 맞을 수가 있었다.
“증명? 무엇을?”
상혁은 바이제의 질문을 듣는 순간 그 안에 숨겨진 미묘한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 녀석 분명 관계자다!’
진짜 사람도 아닌 NPC와 이런 눈치싸움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상혁은 지금이야말로 베팅을 해야 할 때라는 고 느꼈다.
“비어있는 비선주(秘線主), 제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걸 증명을 할 생각입니다.”
폭탄은 던져졌다. 이제 남은 건 이 폭탄이 어떻게 터질 지만 기다리면 되었다.
< [16장] 비선(秘線)과 비선주(秘線主)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