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정령 카드 (2) >
* * * *
와이번의 둥지는 황혼의 땅에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사냥터였지만 지금은 존재 자체가 밝혀지지 않은 사냥터였다. 보통 유저가 이곳에 접근하려면 선행 퀘스트를 해야 했다.
더 정확히는 선행 퀘스트를 통해 이곳의 위치를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 선행 퀘스트가 굉장히 복잡한 연계 퀘스트의 마지막 퀘스트였기 때문에 아직은 선행 퀘스트를 받은 유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당연히 상혁도 선행 퀘스트는 받지 못했었다. 아니, 그는 아예 그것과 관련된 연계 퀘스트조차 받지 않았었다. 어차피 상혁에겐 의미가 없는 퀘스트였다.
상혁은 전생에 이미 그 퀘스트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와이번의 둥지를 어떻게 찾아가는지 알고 있었다.
퀘스트를 받으면 네비게이션 시스템을 이용할 수가 있어서 길을 쉽게 찾을 수가 있다는 장점이 있긴 했지만, 어차피 EL의 세상 속에서 닳고 닳은 상혁에게 길 찾기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 어디쯤이었던 거 같은데······.’
황혼의 땅 동쪽 끝에 있는 동부절벽지대에 도착한 특유의 산타기 기술을 이용해 열심히 절벽을 옮겨 다니며 와이번 둥지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선행 퀘스트를 받고 왔다면 절벽을 탈 필요도 없이 한 번에 와이번 둥지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회귀라는 치트를 사용하면서 이 정도 고생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 과한 욕심이었다.
상혁은 그렇게 몇 시간을 동부절벽지대에서 헤맨 끝에 결국 와이번 둥지로 올라갈 수 있는 숨겨진 길을 찾을 수가 있었다. 잭과 콩나무에나 나올 것 같은 두터운 넝쿨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그 절벽의 꼭대기에 가면 와이번 둥지로 갈 수가 있었다.
와이번 둥지는 개방형 던전이라고 보면 되었다. 절벽들 사이로 연결된 커다란 넝쿨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는데 자칫 한눈을 팔다간 넝쿨에서 떨어져 추락사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상혁은 넝쿨을 붙잡고 열심히 기어올랐다. 대략 15분 정도를 열심히 기어오르자 하늘 위에 존재하는 던전이라고 알려진 그린 와이번 둥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상혁은 한때 이곳에서 무려 넉 달이나 캠프를 치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땐 아예 작업장의 다른 유저들이 보급품을 날라주고 모아놓은 전리품을 가져가는 식으로 이곳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었다.
그 넉 달 동안 상혁은 무수히 많은 와이번을 사냥했었다. 와이번은 대략 43~45레벨의 유저들도 세 명 이상이 모여 파티를 맺고 잡는 고레벨 몬스터였다.
그것도 그냥 아무렇게나 파티를 맺으면 안 되고 조합을 잘 구성해야 사냥할 수 있었다.
최소한 탱커와 딜러 그리고 힐러까지 파티의 기본 삼박자는 맞아야 했다. 그만큼 까다로운 몬스터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행인 점도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와이번들이 독립생활을 하는 몬스터라는 점이었다. 놈들은 커다란 넝쿨로 이어진 수많은 절벽 봉우리에 둥지를 하나씩 만들어놓고 있었는데 절벽 봉우리들 사이의 간격이 꽤 넓어서 한 번에 한 마리씩 상대가 가능했다.
상혁은 우선 마킹북을 꺼내 마킹을 했다. 와이번의 둥지 안으로 들어가면 마킹이 안 되기 때문에 꼭 이 부분에 해놓는 게 좋았다.
‘와이번 둥지는 생각보다 길이 복잡해서 처음 온 유저들은 대부분 길을 잃어버렸었지. 나도 처음엔 뭔 이런 개떡 같은 던전이 있냐고 말했었던 게 기억나네.’
마킹을 하던 상혁은 오랜만에 온 와이번의 둥지에서 옛 추억을 살짝 떠올렸다. 사실 추억이라고 말하기엔 슬픈 과거였지만 그래도 아려하게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긴 했다.
‘와, 잊은 줄 알았는데 대충 길이 기억이 나네······ 진짜 내가 여기서 오랫동안 캠프를 하긴 했었나 보네.’
처음엔 길이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아 걱정했었지만, 막상 와보니 그게 쓸데없는 걱정이었단 걸 알 수 있었다.
‘자, 그럼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사냥을 시작해보자.’
길은 물론이고 공략법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일단 버프 먼저!’
상혁은 사냥에 앞서 한 장의 조합카드를 꺼내 들었다. 앞서 만들어 놓은 정령 카드와 몇 가지 재료카드들을 더 조합해서 만든 이 조합 카드의 이름은······ ‘불과 바람의 축복’이었다.
최하급 불의 정령 카드와 최하급 바람 정령 카드에 세 가지 싸구려 재료 카드를 섞어서 만들 수 있는 이 카드의 효과는 ‘기본 공격력 상승과 이동 속도 상승’이었다.
최하급 정령 카드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버프형 조합카드였기 때문에 넉넉하게 100장을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츠츠츠츳.
조합 카드가 몸속으로 스며들며 버프 효과가 활성화되었다. 시야 오른쪽 위 끝에 간단하게 표시된 ‘30’이란 숫자가 바로 버프의 유지시간을 의미했다.
30이란 30분이란 뜻이었다.
‘와이번 사냥에 완벽하게 익숙해졌을 때 삼인 파티 기준으로 한 마리당 오 분 정도가 걸렸었나? 흐음, 그럼 일단 목표를 십 분으로 잡는 게 좋겠네.’
와이번은 사냥 시간이 오래 걸리는 대신 얻을 수 있는 카르마나 전리품이 큰 몬스터였다. 특히 지금처럼 경쟁자가 전혀 없는 상태라면 여러 둥지를 옮겨 다니며 끊임없이 사냥할 수가 있었고 그렇게 되면 정말 큰 이득을 챙길 수가 있었다.
촤르르륵, 철컥!
상혁은 만년금골편을 꺼내 들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전방에 보이는 녹색 와이번 한 마리······ 사실 따지고 보면 와이번들 중 가장 약한 그린 와이번이긴 했지만 적어도 황혼의 땅에선 이놈들보다 강한 몬스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자!”
준비를 끝낸 상형은 망설이지 않고 눈앞에 길게 이어져 있는 넝쿨을 달리기 시작했다.
* * * *
와이번을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놈이 조금이라도 날아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무조건 놈들의 둥지에 하나 이상씩 꼭 존재하는 와이번의 알을 계속 건드려줘야 했다.
전생에선 이걸 ‘알 도발’이라고 불렀는데 어쨌든 이렇게 계속 알을 건드려줘야지만 와이번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둥지를 향해 치명적인 전멸 기술인 와이번 브레스를 사용하는 걸 방지할 수가 있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설정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 넓은 와이번 둥지에 수컷은 오로지 한 마리만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암컷 와이번들이었다.
보통 세 명이 파티를 이루면 알 도발은 탱커가 아닌 딜러가 맡았었다. 아무래도 탱커는 와이번의 어그로를 꽉 잡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알 도발까지 같이하는 건 좀 힘들었다.
그래서 딜러가 틈이 날 때마다 알을 한 번씩 때려서 와이번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와이번을 둥지에 잡아둘 수만 있으면 그때부턴 늘 그렇듯 몬스터의 기본 패턴에 익숙해지면 끝이었다.
패턴은 별것이 없었다. 근접 기술인 ‘물어뜯기’와 ‘꼬리치기’만 조심하면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처음엔 상혁도 워낙 오랜만이라 긴장을 했었는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와이번의 패턴에 적응해 버렸다. 전생에 있었던 무지막지한 반복 사냥이 상혁의 기억 속에 명확하게 각인되어 있었고 그 효과가 곧바로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상혁의 무기인 만년금골편은 알 도발을 유지하기에도 매우 적합한 무기였다. 와이번 둥지는 대략 지름이 10m 정도 되는 원형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적당히 중앙쯤으로 이동하면 무조건 알을 건드릴 수가 있었다.
촤르륵, 티잉!
상혁은 다시 한 번 만년금골편을 날려서 알을 슬쩍 건드렸다. 알 도발의 핵심은 절대 알은 깨트리지 않는 것이었다.
실수로 알을 깨트리기라도 하면 그린 와이번은 바로 광폭화하면서 날뛰었다. 광폭화된 와이번은 아무리 상혁이라고 해도 버텨낼 수가 없었다.
크아아아앙!
암컷 와이번은 상혁이 알을 건드릴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놈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여전히 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쳇, 하물며 게임 속에 몬스터도 이런데······.’
순간 상혁은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이 떠오르며 울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세가 흐트러지진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것이다.’
상혁은 회귀 이후 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기에 순식간에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으며 만년금골편을 휘둘렀다.
휘리릭, 콰득!
알 도발을 통해 와이번이 날아오르려는 걸 막은 상혁은 연결 동작을 통해 채찍을 교묘하게 움직여 와이번의 목에 채찍을 휘감았다. 그리곤 곧바로 만년금골편을 강하게 당기며 놈의 등에 올라탔다.
상혁이 와이번 등에 올라탔다는 건 와이번의 숨통을 끊을 때가 왔단 뜻이었다.
캬오오오오오!
와이번은 상혁을 떨어트리기 위해 몸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상혁은 마치 로데오를 하는 카우보이처럼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으며 와이번의 목에 만년금골편을 더욱 휘감았다. 그리곤 그것을 아주 강하게 잡아당겼다.
콰드드드드득!
와이번의 목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만년금골편. 상혁은 마무리를 위해 만년금골편을 양손으로 붙잡고 다시 한 번 양손을 있는 힘껏 당겼다.
이미 상혁은 레벨을 올리며 얻은 추가 능력치를 대부분 힘과 민첩에 골고루 투자했기 때문에 그의 힘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작정하고 만년금골편을 강하게 조이자 가뜩이나 생명력이 별로 남지 않았던 와이번은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우드드득, 쿠쿠쿵.
결국, 그린 와이번의 목이 ㄱ자로 꺾였다. 목이 꺾였다는 건 생명력이 0을 찍었단 의미였기에 와이번은 그대로 둥지 위에 쓰러졌다.
와이번이 쓰러지는 순간 상혁은 먼저 남아 있는 버프 시간을 확인했다.
‘22분······ 8분 정도 걸린 건가? 생각보단 괜찮네.’
희망 시간인 10분에서 2분을 단축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직접 와이번과 싸우기 전까진 불확실한 게 많았는데 막상 실제로 싸워보니 과거의 감각이 새록새록 다시 살아났던 게 컸다.
‘계속 노력하면 5분까지도 줄일 수 있겠는걸?’
느낌이 좋았다. 전생의 여러 기억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무엇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해야 더 쉽게 와이번을 잡을 수 있었는지 전부 기억나기 시작했다.
“좋아! 당분간 여기서 캠프를 하자!”
뱀 굴에서 한 달간 캠프를 하며 꿀을 빨았듯이 이번에도 상혁은 이곳 그린 와이번 둥지에서 제대로 꿀을 빨아볼 생각이었다.
본격적으로 판을 깔고 와이번 사냥을 시작한 상혁.
그의 눈엔 모든 그린 와이번이 카르마와 전리품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 * * *
“나보고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거야?”
킬링머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는 말도 안 된단 표정으로 킬링머신을 바라보았다.
“정말 하늘에 맹세코 사실이에요. 제가 어떻게 형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어요.”
“흐음······.”
확실히 킬링머신은 절대 그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5년 전 한 게임에서 무차별적으로 PK를 하며 놀다가 우연히 비슷한 성향을 지닌 킬링머신과 인연을 맺었다.
물론 PK 실력 면에서 격이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던 남자에게 킬링머신은 그냥 말 잘 듣는 부하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5년간 알고 지내면서 현실에서도 가끔 만나 술도 마시곤 했었다.
킬링머신은 현실에선 가상현실에서보다 더 못난 놈이었기 때문에 만나면 늘 남자에게 매일 온갖 구박만 당했었다. 만약 킬링머신이 거짓말을 했다간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제대로 갈굼을 당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진짜 십 초 만에 당했단 거야?”
“네, 정말 무지막지한 놈이었어요.”
“그렇단 말이지······.”
아무리 킬링머신이 허접하다고 해도 10초는 너무 심했다. 남자는 당장 자신이 나선다고 해도 킬링머신을 제압하려면 아무리 빨라도 1분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제가 지금 몰래 수배를 해보곤 있는데 어디에 숨었는지 찾기가 힘드네요. 찾는 대로 연락 드릴까요?”
킬링머신이 원하는 건 복수였다. 그가 찾아온 남자······ 그는 적어도 킬링머신이 알고 있는 유저 중 가장 PvP 실력이 뛰어난 이였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호승심이 굉장히 강해 강자(强者)와의 싸움을 미친 듯이 좋아했다.
그의 이름은 다크드래곤(Dark Dragon), 일명 DD라 불리는 그는 EL 이전에 다른 게임에서 이미 최고의 PvP 유저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아씨, 근데 할 게 많아서 당분간은 악인이 안 되려고 했는데······ 지금 다크 카르마가 좀 아슬아슬한데 그 녀석을 죽이면 당연히 악인이 되겠지?”
“그럼 형은 제압만 하시고 죽이진 마세요. 죽이는 건 제가 할게요.”
“야이, 멍청한 놈아 EL의 범죄자 시스템이 그렇게 허술한지 알아? 네가 죽여도 결국 내가 제압을 한 것 자체가 죽음에 제일 큰 관여를 한 게 되어서 내가 죽였을 때랑 별반 차이가 없다고.”
“으음······ 그럼 제가 놈을 찾을 동안 최대한 다크 카르마를 낮춰보시는 건 어떠세요?”
“결국, 그 방법밖에 없나······. 일단 알았으니까 수배해봐. 그리고 이 병신아 내가 당분간은 악인 유저가 힘을 못 쓸 테니 조용히 사냥이나 하라고 했었잖아. 내 말 안 듣고 꼴에 PK를 하고 다니겠다고 설치니까 그 꼴이 나잖아. 스스로 판단을 못 하겠으면 말이라도 좀 쳐들어.”
“아니, 난 뭐 그냥······.”
DD만 만나면 작아지는 킬링머신.
킬링머신은 이게 싫어서 DD를 떠나 혼자 악인 유저가 된 것이었지만 결국 복수를 위해선 다시 DD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 [14장] 정령 카드 (2)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