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장] 두 번째 고대의 지식 (1) >
@ 두 번째 고대의 지식
재미있는 건 하르칸의 장비들에는 각각 팔콘시의 영운 하르칸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가 조금씩 새겨져 있었는데 그 얘기들을 모두 합치면 흥미로운 비사(秘史)를 하나 알 수가 있었다.
원래 하르칸은 푸얀산을 오염시킨 ‘죽음의 군단’을 몰아내고 팔콘시를 건설한 8명의 영웅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죽음의 군단과 치열하게 싸우던 과정에서 그의 심장에 아주 작은 ‘칠흑의 파편’이 박히고 말았다. 문제는 아무도 하르칸의 심장에 칠흑의 파편이 박혔다는 걸 몰랐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하르칸 본인도 몰랐을 정도였다.
결국, 작은 칠흑의 파편은 하르칸을 조금씩 변질시켰고 호탕하고 정의롭던 하르칸은 편협하고 독선적인 인물로 변해갔다.
변해버린 하르칸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다른 영웅들과 충돌했다. 아무리 하르칸이 대단해도 다른 영웅들 모두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웅들에게 쫓기던 하르칸은 도망을 치다가 다른 영웅이 날린 금천시(金天矢)에 머리가 꿰뚫리며 죽어버렸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의 시체가 당시 공사 중이던 팔콘시 하수도로 떨어져 그대로 하수도 안으로 사라졌다.
이게 바로 하수도 던전에서 그의 장비를 얻을 수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상혁이 연 77번 하수도 말고도 공용 던전인 ‘팔콘의 하수도’에서도 하르칸의 장비를 구할 수가 있었다.
팔콘의 하수도가 본격적으로 클리어 되기 시작하면서 하르칸의 장비는 자연스럽게 유명해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곤 한동안 유저들 사이에서 교복이라고 불리며 아주 큰 사랑을 받을 예정이었다.
물론 팔콘의 하수도의 마지막 보스인 ‘오염된 하르칸’은 레이드용 보스로서 조금 더 특별한 하르칸의 장비를 떨어트렸지만, 어차피 그건 몇몇 소수의 유저들만 가질 수 있는 장비일 뿐이었다.
상혁은 물량이 많이 풀려 값이 확 내려가기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하르칸의 장비들을 모두 가장 비싼 값에 팔 생각이었다.
하르칸의 장비는 기본 성능 자체가 평균적으로 무난하게 달려나오는 편이었고 동시에 세트 효과도 여러 종류의 능력을 골고루 올려주었기 때문에 모든 유저가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상혁이 보기엔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장비일 뿐이었다.
상혁의 레벨은 열흘 만에 28까지 올라갔다.
이터널 라이프의 레벨은 20까진 상당히 빠르게 올랐고 다시 20부터 서서히 오르는 속도가 느려지다가 25부터 본격적으로 지옥문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30이 되면 1차 헬(Hell) 구간이 시작되는데 처음엔 모든 유저가 여기가 진정한 레벨 업 지옥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훗날 가장 먼저 레벨 40에 도달한 유저가 레벨 41이 되는 데 필요한 카르마를 확인한 순간 자신들이 지옥이라 생각했던 30~40레벨까지의 구간은 사실은 지옥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진짜 지옥이 시작되는 레벨 40.
훗날 두 번째 행성이 추가되기 전까진 모든 유저가 그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꽤 고생했었다.
아직 상혁의 레벨은 1차 헬 구간인 30에도 도달하진 못했지만, 레벨 28은 현재 수준에선 절대 낮은 레벨이 아니었다.
정확한 건 아니었지만, 현재 각종 커뮤니티에 올라온 정보를 종합해 보면 현재 이터널 라이프(EL)에서 가장 높은 레벨을 보유한 이들이 대략 34~36 수준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원 소울 유저들이었다. 아주 소수의 더블 소울 유저도 있었지만, 상혁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쿼드라 소울을 키우고 있는 상혁은 사실상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레벨을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파지지직!
멀로그의 푸른 뿔에서 다시 한 번 강력한 전류가 뿜어져 나왔다. 멀로그의 보물창고를 지키는 보스 몬스터인 푸른 뿔 멀로그는 이대로 쓰러질 순 없다는 듯이 발악을 했지만 그래 봤자 상혁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상혁은 이미 오래전에 푸른 뿔 멀로그의 패턴을 완벽하게 파악했기 때문에 가볍게 옆으로 몸을 굴리는 것만으로 놈의 마지막 발악을 피해버렸다.
꽈광!
강력한 전류가 허무하게 바닥을 때리는 순간 상혁의 검이 다시 빠르게 세 번 휘둘러졌다.
파파팟, 서걱!
푸른 뿔의 멀로그는 이미 생명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놈은 날카로운 세 번의 칼질에 몸과 목이 분리되며 바닥에 쓰러졌다.
푸른 뿔 멀로그를 쓰러트리며 멀로그의 보물창고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멀로그들이 모은 반짝이는 자수정 팔찌가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100번째 클리어를 달성하며 던전의 최대 클리어 횟수를 모두 채웠습니다.
멀로그의 보물창고가 소멸합니다.
상혁은 열흘 만에 멀로그의 보물창고를 깔끔하게 올 클리어했다. 아쉬운 건 등급이 낮은 비밀 던전이라 올 클리어 보상이 따로 없다는 점이었지만 어차피 100번의 클리어를 통해 상당히 많은 것들을 얻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77번 하수도 같은 경우는 아직 50번 정도 클리어 횟수가 남아 있긴 했지만 상혁은 이건 나중에 비밀 던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상승할 때 적당히 돈 많은 물주 하나를 잡아서 아주 비싸게 팔아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지 공급이 적을 땐 거품이 잔뜩 끼는 법이었기에 잘만 팔면 아주 큰 이득을 볼 수가 있었다.
아이템은 이미 하르칸의 장비를 풀로 다 맞춘 상태였다.
하르칸의 투구, 갑옷(상의), 갑옷(하의), 검, 방패, 부츠, 망토까지 총 7세트였다.
일단 하르칸의 세트를 풀로 착용하자 확실히 이제야뭔가 그럴듯해 보였다. 물론 상혁의 눈에는 이것도 누더기처럼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이것보다 더 좋은 방어구가 존재하질 않았었다.
자신이 착용한 아이템을 제외한 다른 모든 아이템은 다른 유저에게 팔 생각으로 위탁 판매에 올려버렸다. 한 번에 다 올리면 비싸게 팔기가 힘드니 하나씩 따로 올려서 최대한 물건을 구하는 이들의 애를 바짝바짝 태워 주었다.
이렇게 해야 계속 가장 비싼 가격에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을 정리할 수가 있었다.
사실 EL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게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도 EL과 관련된 여러 가지 콘텐츠들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었고 그 중엔 아이템을 거래하는 사이트도 있었다.
그 사이트를 이용하면 당장 꽤 짭짤한 돈을 만질 수도 있었지만, 굳이 상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생활비로 사용할 돈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은 현금이 아니라 게임 속의 화폐인 ‘골드’가 더 중요할 때였다.
* * * *
[단언 컨데 이터널 라이프는 최고의 DN 게임이다!]
[돌풍의 EL이 DN 게임을 압도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앞으로 한 달 안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터널 라이프(EL)의 인기 비결 다섯 가지!]
[실시간 유저 평점 9.9!! 모든 유저가 빠져버린 EL의 폭풍질주!]
······
······
드디어 EL이 제대로 터졌다.
기사에 나온대로 이제부터 한 달만 지나도 EL은 모든 DN게임을 압도하는 최고의 게임이 되어 앞으로 15년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질 않게 될 예정이었다.
“슬슬 라온소프트가 노를 젓기 시작했군.”
온갖 게임 사이트에 경쟁적으로 올라오는 EL에 관한 기사들을 쭉 살펴본 상혁은 슬쩍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길드들이 등장하겠군.”
아직 길드 콘텐츠는 제대로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중요한 건 알려진 게 없다는 것이지 콘텐츠가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떤 길드가 팔콘의 하수도 보스인 ‘오염된 하르칸’을 최초로 쓰러트렸었지? 쿤(Kun)이 이끌던 테리쿨룸(terrícŭlum)이었던가? 아니면 슈팅스타의 라이징(Rising)이던가?‘
상혁은 EL 초창기부터 유명세를 떨쳤던 몇몇 특별한 길드를 떠올려봤지만, 정확히 누가 하라칸 최초 킬을 기록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난 건너뛸 던전인데.”
열심히 기억을 더듬던 상혁은 아무 의미 없단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포기하기로 한 것에 집착하는 건 상혁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르칸은 진짜 애들 장난이지······.”
상혁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수많은 던전과 레이드 보스들을 떠올려보았다. 진짜 이가 갈릴 정도로 고생했던 놈들도 많았다.
비록 상혁은 최상위 길드에서 활동을 한 건 아니었지만 상혁이 노예처럼 일했던 작업장 자체가 거의 거대 길드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에 작업장 단위로 자주 레이드 콘텐츠를 진행하곤 했었다. 그렇기에 레이드 경험도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걔들이 하르칸에서 삽질을 하는 동안 난 다른 걸 준비해야겠지?’
상혁은 이젠 슬슬 두 번째 고대의 지식을 얻을 때가 되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상혁이 두 번째 고대의 지식을 채워 넣지 않고 있었던 이유는 아직 그것을 얻을만한 조건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레벨도 25를 넘겼고 가지고 있는 골드도 넉넉했다. 이러면 충분히 두 번째 고대의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상혁이 두 번째로 얻으려고 하는 고대의 지식은 어떻게 보면 상혁이 구상하고 있는 쿼드라 소울의 가장 핵심이 되는 고대의 지식이라 할 수 있었다.
전생에 ‘크래쉬(Crash) 최상열’에게 최강이란 타이틀을 손에 넣게 해주었던 그것! 비록 그것을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한 이는 최상열이었지만 이론적으로 그것을 완성했던 인물은 상혁이었다.
전생에는 폐인이 된 자신은 절대 완성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남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 상혁은 폐인이 아니었다.
폐인이 될 이유도 없었다.
상혁은 전생에 불법 개조된 VR기기에서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과도하게 노예처럼 부려지다가 결국 ‘VR 과몰입 증후군’이라는 평소엔 잘 알지도 못한 병에 걸렸었다.
이 병에 걸리면 평상시 생활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VR에 접속하면모든 감각이 엉망이 되어 VRA의 측정 자체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한 마디로 ‘VR’만 놓고 봤을 땐 폐인이 된다는 뜻이었다.
상혁은 과거로 회귀하기 전까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었다. 애초에 이 증후군 자체가 거의 신종 불치병으로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에 고칠 수가 없었다.
상혁이 게임에 집중하면서 한 편으로는 철저히 몸을 챙기고, 스스로 자신에게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이유도 이미 한 번 몸을 막 굴렸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경험을 해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땐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너무나 심각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굴려진 것이라 더더욱 큰 데미지를 입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상혁은 절대 다시 폐인이 될 생각은 없었다.
“읏차!”
바닥에 테블릿 PC를 내려놓고 인터넷을 보며 열심히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던 상혁은 자리에서 가볍게 일어났다.
맛은 없지만, 영양가가 아주 높은 밥도 먹었고 적당히 운동도 끝났다. 잠은 아까 잤기 때문에 지금 컨디션은 아주 좋았다.
“좋아, 그럼 또 달려볼까?”
컨디션이 좋은 상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캡슐형 VR기기를 바라보았다.
< [8장] 두 번째 고대의 지식 (1) > 끝
ⓒ 성진(成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