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인군단-6화 (6/127)

< [4장] 큰 그림을 그리다 (1) >

@ 큰 그림을 그리다.

[본 게임의 권장 VRA는 150입니다. VRA 100 이하의 사용자분들은 게임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터널 라이프(EL)을 시작하자 가장 먼저 나온 건 경고 문구였다. 2024년 제정된 법령에 따라 DN의 콘텐츠들은 모두 권장 VRA를 표시해주었는데 대부분 VRA 80 정도가 권장 VRA였다.

조금 높은 콘텐츠들이 100~120 정도의 권장 VRA를 지니고 있던 걸 고려하면 확실히 EL의 권장 VRA는 굉장히 높았다. 거기다 18세 미만 청소년은 접속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EL의 진입 장벽은 더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나중엔 VRA가 낮은 사람들도 손해를 감수하고 EL을 플레이했다. 게임 자체가 워낙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EL은 전체 사용가가 아닌 성인용 게임임에도 DN 게임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엄청난 숫자의 동시접속자를 기록하고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대단한 게임이란 뜻이었지만 어쨌든 EL을 제대로 즐기려면 최소 VRA가 150 수준은 되어야 했다.

그래서 EL을 직접 플레이하진 않고 프로게이머들의 라이브 방송만 보는 ‘와칭(watching) 유저’들도 상당히 많았었다.

‘EL은 직접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보는 재미도 아주 상당한 게임이었지.’

EL이 큰 성공을 거둔 이유를 몇 가지 꼽으면 게임 자체가 워낙 중독성이 있고 재미가 있던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EL은······ 망한 게임이었지.’

상혁은 잠깐 이 순간만큼은 울상을 하고 있을 라온소프트의 관계자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음 같아선 라온소프트에 연락을 해서 아직 상장도 되지 않은 그들의 주식을 사고 싶었지만 그런 주식 거래에 대해선 상혁도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고 또 아무리 지금 상황이 안 좋아도 이미 든든한 자금줄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 주식을 팔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그쪽에 욕심을 내진 않았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드디어 EL의 계정을 생성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영원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또 다른 이름이 필요합니다. 이터널 라이프 안에서 사용할 이름을 정확한 발음과 큰 목소리로 말씀해주세요.

“불멸.”

상혁은 EL엔 다소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평소에 꼭 사용하고 싶었던 아이디를 선택했다. 전생에선 ‘질풍난무’라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아이디를 사용했었기 때문에 이번엔 특별한 이름을 사용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불멸’을 이름으로 선택한 사용자는 0명입니다. 동일 사용자가 없는 최초 등록이기 때문에 내부 코드가 붙지 않습니다.

EL은 똑같은 이름을 최대 100명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초로 이름을 등록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겐 내부 코드가 붙어서 시스템적으로 이름들 등록할 땐 그 내부코드를 함께 적어줘야 했다.

예를 들어 지금 상혁이 지은 불멸이란 이름을 누군가 또 등록하면 그 사람은 불멸이란 이름에 ‘두 번째’라는 내부코드가 붙어서 시스템적으론 ‘두 번째 불멸’이란 이름이 되었다. 보통 게임 속에선 똑같이 불멸을 달고 다닐 수 있을지 몰라도 확실히 최초 사용자와는 구분되었다.

이름 생성까지 끝나자 새하얀 빛이 상혁의 몸을 휘감았고 그와 동시에 상혁의 눈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해지는 녹색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은 상혁에겐 여러 가지 의미로 그리운 곳이었다.

‘끝없는 초원.’

이곳은 EL에 처음 접속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EL은 유저에게 굉장히 불친절한 게임이었다.

보통의 게임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제공하는 게임 가이드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심지어 직업소개나 조작방법 안내까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유저들이 그런 부분에 대한 불만을 얘기할 때마다 EL의 제작사인 라온소프트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터널 라이프는 유저분들이 만들어가는 또 하나의 세상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건 사용자분들이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사용자분들이 직접 공략집을 제작하는 것까진 막지 않지만 적어도 개발사 차원에서의 공략 안내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처음엔 유저들의 반발이 심했지만 라온소프트가 아주 굳건하게 이 자세를 끝까지 고수하자 결국 유저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혁이 서 있는 끝없는 초원만 해도 일종의 튜토리얼 구역이라 할 수 있었는데 처음에 이곳이 튜토리얼 공간이란 걸 얘기해주질 않아서 최초 EL에 접속한 유저들은 굉장히 실망을 많이 했었다. 심지어 스킵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이곳에 튜토리얼 공간이란 걸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실망은 오래가진 않았다. 하루도 되지 않아 빠르게 10레벨을 달성하며 그 공간을 빠져나가 진정한 EL의 세상에 도착한 유저들이 진짜 이터널 라이프의 세상이 어떤 곳인지 커뮤니티에 공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가 이 초원은 튜토리얼 지역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끝없는 초원엔 특별한 게 없었다. 그저 초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유저가 접속한 시간을 기준으로 30분에 한 번씩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몰려온다는 점뿐이었다.

몬스터가 몰려오기 5분 전에 유저에겐 무기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희미한 그림자로 만들어진 것 같은 40가지 종류의 무기가 땅바닥에서 솟아올랐고 그 중 하나를 유저가 선택하면 그것은 곧바로 실체화가 되어 유저에게 귀속되었다.

무기는 웨이브가 올 때마다 계속 바꿔가며 고를 수 있었는데 대신 다른 무기를 고르면 들고 있던 무기는 다시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이것은 한 마디로 여러 종류의 무기를 마음껏 사용해보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를 미리 골라두란 의미였다.

그렇게 20번의 웨이브를 막고 나면 21번째에선 아주 기초적인 스킬이 담겨 있는 116가지의 스킬북(Skill Book)이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이것도 무기와 마찬가지로 웨이브가 올 때마다 계속 바꿔서 사용해볼 수가 있었다.

스킬 북은 최대 40번의 웨이브를 막을 때까지 계속 다른 걸 고를 수가 있었다. 보통은 몬스터 웨이브를 50번쯤 막으면 자연스럽게 레벨이 10이 되었다.

몬스터 웨이브 자체는 난이도가 아주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게임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쉽게 클리어할 수가 있었다.

유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속된 말로 EL에서 유일하게 무쌍(無雙) 모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끝없는 초원이었다.

유저들은 끝없는 초원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무기와 스킬을 미리 경험할 수 있었고 그건 곧 이곳을 나가 진짜 EL의 세상에 갔을 때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선택에 도움을 주었다.

물론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유저들은 끝없는 초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선택하기보단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흔히 꿀이라 불리는 것들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끝없는 초원에서의 경험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다.

탁탁, 상혁이 오른쪽 귀 위를 가볍게 두 번 두들기자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들이 여러 개 나타났다. 이런 동작을 통한 시스템 창 불러오기는 이미 5년 전부터 모든 DN 게임 개발사가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상현실게임을 경험한 사람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눈앞 허공에 나타난 시스템 창 중 퀘스트창을 선택해 확대한 상혁은 첫 번째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정확히 27분 22초.’

상혁과 마찬가지로 서버 오픈과 동시에 접속한 다른 유저들은 이 순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는 지금 상혁은 앞으로 무엇이 나올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몸을 풀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끝없는 초원······ 내가 이곳에서 얻어야 할 것은 두 가지.”

이미 상혁은 EL의 오픈을 기다리던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계획하고 준비한 상태였다.

두 가지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상혁은 그 두 가지를 얻기 전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유일(唯一) 등급 타이틀 하나와 숨겨진 희귀 등급 아이템 하나를 얻어야 한다.”

누군가 상혁에게 EL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느냐고 묻는다면 상혁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타이틀’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건 EL을 즐겼던 모든 유저가 똑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EL에서 타이틀은 이름 앞에 붙여서 ‘접두’ 타이틀로 사용할 수도 그리고 이름 뒤에 붙여서 ‘접미’ 타이틀로도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굳이 장착하지 않아도 효과가 적용되는 상시 시속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 활성화할 수 있는 타이틀의 최대 개수는 30개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것만으로도 그 어떤 게임보다 타이틀에 중요도가 높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어쨌든 타이틀은 그 어떤 게임 요소보다 중요한 것이었고 상혁은 이미 자신이 꼭 얻어야 할 몇 가지 특별한 타이틀을 골라놓고 있었다.

“우선 타이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부터!”

유일 등급의 타이틀인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 이것은 오로지 이곳 끝없는 초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엄청나게 희귀한 타이틀이었다.

4,444번.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란 타이틀을 얻으려면 이 끝없는 초원에서 4천4백4십4번을 죽어야 했다. 정확히는 그만큼 죽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을 해야 했다.

사실 이 타이틀은 절대 얻을 수 없는 타이틀이었다. 아무리 VRA가 낮은 사람이라고 해도 적어도 이곳 끝없는 초원에선 얼마든지 몬스터를 찍어 누를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끝없는 초원에서 죽는 유저는 만 명에 한 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희박했다.

그렇기에 이 단계에서 4천 번을 넘게 죽는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사실 이 타이틀의 존재가 밝혀진 건 EL이 출시되고 무려 10년이 지난 뒤였다.

정확히는 라온소프트가 EL 출시 10주년 기념으로 이제는 삭제된 다섯 개의 특별한 타이틀을 공개하며 알려졌었다.

당시 라온소프트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10년 동안 유저들이 얻지 못한 타이틀이 10개가 있다고 얘기하며 그중 5개는 패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삭제되었고 현재 아무도 얻지 못한 타이틀은 5개가 남아 있다고 공개했었다.

그 과정에서 공개된 게 바로 삭제된 5개의 특별한 타이틀이었다.

지금 상혁이 노리고 있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란 타이틀도 바로 이 삭제된 5개의 타이틀 중 하나였다.

등급은 무려 유일(唯一)! 등급이 유일이라는 건 이 타이틀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뜻이었다. 즉, 상혁이 이 타이틀을 얻으면 설사 누군가 똑같이 4,444번을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끝없는 초원에서 4,444번을 죽어야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상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몬스터 웨이브에 몸을 던졌다.

이건 답을 몰랐다면 절대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짓이었다.

죽음 또 죽음.

그렇게 상혁은 남들이 모두 가볍게 끝없는 초원을 빠져나갈 때 혼자 계속해서 죽고 또 죽었다.

< [4장] 큰 그림을 그리다 (1) > 끝

ⓒ 성진(成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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