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팀의 중심, 슈퍼 루키 (7)
1회 초 노아웃 1, 2루의 찬스.
상대의 선발 투수는 스펜서 턴불이었다.
4.61의 방어율에 포심,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던지는 쓰리 피치 투수.
터프한 구종과는 다르게 무브먼트를 바탕으로 범타를 유도하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스트라이크!”
초구는 91마일(146km/h)의 몸쪽 높은 슬라이더.
우투수인 스펜서 턴불.
워낙 궤적이 큰 슬라이더였기에, 몸에 닿을 듯 날아오던 공이 마지막에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슬라이더의 궤적을 기억하며 다음 공을 기다렸다.
“볼!”
“볼!”
존에서 공 하나는 빠진 높은 포심과 스윙을 유도하는 낮은 체인지업.
두 개의 공을 전부 걸러내며 2-1의 카운트까지 승부를 끌고 왔다.
펑―!
바깥쪽 낮은 포심.
존을 살짝 빠져나온 듯 했으나,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외쳐도 어쩔 수 없는 코스.
“볼!”
하지만 심판은 볼을 외쳤고 카운트는 이제 3-1.
타자의 배팅 타이밍이라고 불리는 최적의 카운트.
투수 입장에서는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살짝이라도 빠진다면 볼넷이 되는 부담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현재 주자는 노아웃 1, 2루.
볼넷으로 날 내보낸다면 노아웃 만루가 되니 최대한 그런 상황은 피하려고 할 것이다.
초구로 봤던 슬라이더가 다섯 번째 공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몸에 닿을 듯 날아오지는 않았다.
아까와 궤적이 동일하다면 가운데로 몰리는 슬라이더.
난 일말의 고민도 없이 슬라이더 궤적을 예측하며 배트를 휘둘렀다.
따아아아악―!
가운데로 몰렸으며 살짝 높은 슬라이더.
실투를 그대로 걷어 올린 내 타구에 마운드 위의 투수는 고개를 떨궜다.
1회 초부터 앞서나가는 3점 홈런.
“나이스 배팅.”
1루 주루 코치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난 거칠게 하이 파이브를 치며 베이스를 돌았다.
이번에는 배트 플립이나 세리머니를 굳이 하지는 않았다.
이미 상대 포수는 기 싸움을 할 전의를 상실했으니.
“스트롱 맨! 최! 강! 남!”
“슈퍼 루키! 빅토리 양키스!”
이 먼 디트로이트까지 응원을 온 양키스 팬들의 환호성이 코메리카 파크를 가득 메웠다.
많은 욕을 먹고 그보다 더 많은 경기를 겪으며, 야유와 비난에는 내성이 생겨서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칭찬과 환호는 달랐다.
몇 번을 들어도 언제나 심장 박동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고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환호를 만끽하며 홈 플레이트를 밟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나이스 홈런!”
“벌써 9홈런이야. 이러다 홈런왕도 받겠네?”
“우리 강남이 다 받아!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는 같이 받자고!”
선수들이 내게 달려들어 등과 헬멧을 두들기며 축하해줬다.
난 웃으며 대답하고 벤치에 앉았다.
1회 초 3:0.
이 정도면 비겁한 플레이를 보여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괜찮은 복수가 됐을 것이다.
“아웃!”
비록 추가 득점을 뽑아내지는 못하고 1회 초가 끝이 났다.
하지만 오늘 양키스의 투수는 다른 팀이라면 1선발도 충분히 해낼 게릿 콜.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첫 타자를 2루수 땅볼로 잡아낸 게릿 콜은 이어서 올라온 두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본인의 진가를 입증했다.
이어서 경기는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3회에 2득점, 5회에 3득점, 7회에 3득점.
꾸준히 점수를 뽑아낸 뉴욕 양키스의 타선은 경기를 순식간에 11:1로 만들었다.
게릿 콜은 7이닝 1실점으로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마운드를 내려갔고, 8회 부터는 큰 점수 차에 나오는 투수들이 올라왔다.
두 명의 투수가 2이닝 3실점을 했지만 경기는 11:4 대승.
MVP는 양키스의 선발 투수 게릿 콜이 받게 되었다.
오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4번 타자인 미겔 카브레라에게 맞은 솔로 홈런을 제외하면 완벽한 피칭.
그 홈런을 포함해서 피안타 2개에 볼넷 하나였으니, 올해 최고의 피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음날 이어진 3차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스윕 시리즈를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로테이션을 하루 앞당겨서 1선발 투수를 마운드에 세웠다.
초반에는 괜찮은 피칭을 보여주는 듯 했다.
양키스 타선은 3회까지 아무도 1루를 밟지 못했고, 디트로이트는 선취 2점 홈런을 쳐내며 2:0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했으니까.
따아아아악―!
하지만 4회에 양키스의 유쾌한 반란이 시작됐다.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타석에 들어선 2번 타자 오도어.
그가 솔로 홈런을 쳐내며 오늘 첫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했다.
그래도 1:2로 지고 있는 뉴욕 양키스.
그런 상황에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우우―
사인 훔치기로 인한 야유 면제는 하루뿐이었는지, 오늘도 타이거스의 팬들의 야유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상관없다.
난 투수와 승부를 하는 것이고 마운드 위의 저 투수는 오늘 대부분의 타자에게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았다.
초구를 볼로 던진 두 명의 투수는 나와 4번 타자인 게리 산체스.
우리 둘만 견제한다면 홈런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2번 타자 루그네드 오도어도 매년 30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타자.
쉽게 볼만한 타자가 없는 것이 현재 양키스 타선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투수의 머릿속에는 나에 대한 공략법이 이미 지워졌을 것이다.
따아아아악―!
예상대로 이번에는 초구를 볼로 빼지 않았다.
유리한 카운트로 시작하기 위해서, 어쩌면 저번 타자에게 맞았던 홈런에 의해서.
몸쪽 높은 코스의 공을 완벽한 타이밍에 당겨 쳐서 좌측 담장을 훌쩍 넘겼다.
백투백홈런.
멍해 보이던 상대 투수의 표정은 이제 창백해 보였다.
따아아아악―!
그리고 4번 타자 게리 산체스는 그의 몰린 실투를 중견수가 잡을 수 없는 담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백투백투백홈런.
많은 팬들의 관심사였던 뉴욕 양키스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3연전.
너무나도 일방적인 결과인 스윕 시리즈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10:4 뉴욕 양키스의 승리.
우리는 기분 좋게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 좌석은 주전들만 앉을 수 있는 뒷자리였다.
***
9경기를 연속으로 뛰고 맞이하는 오랜만의 휴일.
월요일만 쉬는 KBO와는 다르게 리그 일정에 따라서 쉬는 날이 자주 변경되는 메이저리그였다.
“선수님! 오늘 일정 잊지 않으셨죠? 계획대로 오전 10시까지 경기장으로 가면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양키스 숙소 로비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잡지 인터뷰를 비롯해서 광고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되도록 경기 장면과 간단한 광고 촬영만 허락하라는 내 의견을 적극 수용한 커너 코퍼레이션.
간단한 인사와 목소리 녹음만 하면 되는 촬영이었기에, 오후에 두 개의 광고가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최강남 선수님! 반갑습니다. 저번에 인사드렸던 커너 코퍼레이션의 이사 제임스입니다.”
“저번과 다른 직함이 하나 생겼네요?”
“아이고 역시 섬세하시네요. 이번에 회사가 더 커져서 승진했습니다. 저번에 인터뷰에서 스트롱 맨이라고 번역했던 일은 죄송했습니다.”
“괜찮습니다. 덕분에 재밌는 별명도 생겼는데요.”
“일단은 인터뷰 진행하시고 저희 차량 타고 광고 촬영장으로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제임스 이사의 안내에 따라서 잡지 인터뷰를 진행했다.
“어제 경기에서 10홈런 10도루를 달성하면서 최연소 10-10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혹시 어린 나이에 이런 좋은 기록을 가질 수 있었던 방법이 있을까요?”
“방법이라···. 노력과 재능 이런 이야기는 다른 많은 분들이 이미 하셨으니, 저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네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절실함이죠.”
“절실함이요? 어떤 예시가 있을까요?”
“수비할 때는 눈앞의 타구 하나에 집중하고, 타격할 때는 투수의 공에 집중합니다. 최연소 기록과 더불어서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제 목표는 어떤 타이틀이 아닌 메이저리그, 그것도 최고의 팀인 뉴욕 양키스의 주전으로서 살아남는 것이거든요.”
“오늘 했던 인터뷰 중에서 혹시 ‘잡지에 올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내용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이걸로 인터뷰 마칠게요.”
“감사합니다.”
잡지 인터뷰는 1시간도 채 되지 않고 끝이 났다.
오늘 인터뷰에서는 주로 내 워크 에씩(Work ethic) 위주로 답변했다.
차를 타고 이동한 후에 광고 촬영도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냥 대본을 읽어주거나 웃으면서 스킨로션을 들고 ‘베리 굿’ 한마디면 됐으니까.
“고생하셨습니다. 혹시 약속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냥 숙소에 데려다주시면 됩니다.”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아직 저녁 시간은 멀어서요. 그리고 선수들이랑 아마 같이 먹을 것 같네요. 다음에 시즌 끝나면 제가 밥 한 끼 살게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경기장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인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제임스의 차를 타고 다시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공 세 개와 미리 준비한 유성펜을 건네받은 나는 모두 사인을 해주고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바로 트레이닝 센터로 향했다.
많은 선수들이 운동하고 있는 모습.
나도 일단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처럼 스트레칭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2루수 오도어가 와서 말을 걸었다.
수염이 있는 모습은 카메라로만 봤는데도, 아직도 다람쥐 같은 모습은 적응이 힘들긴 하다.
“루키! 오늘 일정 거의 슈퍼스타급으로 빡빡하던데 잘 보냈어?”
“어휴. 카메라 보면서 웃는 것보다 홈런 하나 치는 게 차라리 더 쉽겠더라고요.”
“다들 그렇지. 억지로라도 웃어야 광고주들이 좋아하니까. 코리 클루버 야구용품 광고 봤지? 뭐 인터넷에서는 자본주의 미소라느니 했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몸이 3주 동안 많이 좋아진 것 같은데? 인바디 체크도 하고 있어?”
“그럼요. 홈에서는 매일 오후 9시마다 인바디 체크하고 있죠.”
“어제도 원정 돌아오자마자 체크한 거야?”
“네. 요즘 가장 집중하는 두 가지가 체력 증진과 피지컬 성장이니까요.”
“키랑 몸무게가 어떻게 나왔어?”
“188cm에 90kg이요. 처음 뉴욕 양키스에 왔을 때보다 4kg 쪘네요. 물론 대부분 근육으로요.”
내 이야기에 루그네드 오도어는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따로 뭐 챙겨 먹는 거는 아니지? 혹시라도 뭐 챙겨 먹으면 프런트 직원들한테 꼭 이야기하고.”
“프로틴도 안 먹습니다. 약물검사에서 절대 아무것도 안 나와요. 특별하게 챙겨 먹는 건 없거든요.”
“그런데 3주 4kg 근육 증량이 가능한가?”
“오도어의 16살 때는 어땠어요?”
내 질문에 오도어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내 웃었다.
“젊다고 자랑하는 거지? 나도 겨우 94년생이야. 아직은 파릇파릇하다고.”
“16살로 돌아가면 어떻게 야구를 하고 싶어요?”
“어릴 때의 나처럼 조급해하지는 않겠지. 조급하게 한 훈련이 부상과 슬럼프를 오게 했으니까. 아! 그리고 결혼도 늦게 할 거야.”
“딸 이야기할 때 제일 행복해 보이던데요?”
“당연히 돌아갈 수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난 너무 행복해. 너도 괜히 조급해서 부상이나 슬럼프를 겪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야.”
“충고 감사합니다.”
난 웃으며 오도어의 말에 대답을 하고 운동 기구로 향했다.
나도 어릴 때는 너무나도 조급했다.
나보다 앞서가는 동기들과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선배들.
후배들은 늘 내 자리를 위협했고 나는 더욱 대단한 선수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면서 10대를 보냈다.
투수로서의 첫 번째 야구 인생은 고등학교 때 어깨 부상으로 그렇게 끝이 났다.
두 번째 야구 인생인 유격수는 그 어깨를 달고 시작했다.
그래도 조급함이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
20대 중후반에 몇 번이고 경험했던 햄스트링 부상과 몇 번의 슬럼프.
언론은 날 하나같이 욕했고, 팬들은 커뮤니티에 역대급 먹튀라는 글들을 올리기 바빴다.
그런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은 30대 초반에 깨달았다.
야구팬들은 늘 일희일비하니 모든 의견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것.
그 당시의 내 몸은 근육에 비해서 유연성이 떨어지니 코어 운동에 집중하는 것.
인생의 진리와 내 약점을 깨닫고 30대 초반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던 나였다.
근데 지금은 겨우 한국 나이로 17살.
내 몸은 아직 성장 가능성이 너무나 많았고, 멘탈은 느긋함을 넘어선 초연함 그 자체.
거기다가 많은 부상과 슬럼프로 겪은 내 몸의 장단점을 완벽하게 깨닫고 있었다.
또한 그 어떤 트레이너도 나보다 내 몸을 잘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30대 후반까지 이미 경험해봤으니.
2위인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경기 차이는 어느덧 4경기 반.
이 기세라면 동부 지구 우승은 어려운 목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목표는 포스트시즌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다음 경기, 다음 투수, 다음 공.
난 내 눈앞에 모든 것들에 집중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시 얻게 된 기회에 늘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