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홈런왕의 탄생-18화 (18/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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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 야구 (1)

“최강남 선수! MBS에서 온 강하늘 기자입니다. 혹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네. 괜찮아요.”

“다름 아니고 이번 결승전에서 홈런 2개를 포함해서 3타수 3안타 1볼넷 4타점을 하셨는데 그 비결이 어떤 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한승원 감독님과 김민수 코치님의 훈련이 이번 우승에 있어서 저도 그렇고 다른 선수들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중략)”

리틀야구 월드시리즈 대회 MVP까지 인터뷰를 마쳤다.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려는데 한국어가 들렸다.

돌아보니 한국에서 온 MBS 기자였고 난 인터뷰에 친절하게 응해줬다.

그리고 내가 한 이 인터뷰는 다음 날 9시 스포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날 뉴스를 본 친척들의 전화로 엄마는 꽤나 고생을 했다는 후문이었다.

한국 대표 팀은 우승 기념으로 3일간의 미국 여행을 즐겼고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할 땐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입국할 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수많은 방송사의 기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여러 차례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최강남 선수! KBC 기자 김한솔입니다. 향후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한국 명문 팀에서 뛰실 건지, 미국 중학교로 넘어가실 건지 여론의 관심이 큽니다.”

“일단은 어떤 팀에 뛸지는 조금 고민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저에게 많은 관심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강현 선수는 현재 14살의 나이인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부모님께서 선수 생활을 반대하시는데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하고 싶습니다. 엄마! 나 선수 하고 싶어!”

말 그대로 금의환향. 우리는 기자들의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해줬다.

난 어떤 중학교로 진학해서 야구를 할지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그날부터 내가 진학할 중학교는 정해져 있었다.

이강현은 부모님의 반대에 머물러서 14살의 나이에도 리틀야구를 뛰고 있었지만, 이 인터뷰를 기점으로 야구 명문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상당히 오랜 시간 공항에 머물러있었고 드디어 모든 기자들의 질문이 끝났다.

감독님은 미리 대여한 미니버스에 우리를 태우고 각자의 집에 내려주셨다.

“강남이도 고생 많았다. 이번 주말에 보자고.”

“네. 고생 많으셨습니다.”

***

정말 오랜만에 집에 도착했다.

“아들! 엄마가 경기 봤는데 엄청나게 잘하던데?”

“그럼! 누구 아들인데? 우리 최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는데. 당연하지!”

부모님은 오랜만에 보는 나를 격렬히 반겨주셨다.

특히 내가 선수 생활을 하는 거에 반감을 갖고 있던 엄마의 칭찬은 나쁘지 않았다.

“너 뉴스 나오고 얼마나 전화가 많이 왔는데? 맞다. 중학교에서도 여기저기서 전화 왔었다? 엄마가 번호 받아놨는데 줄까?”

“네. 일단은 좀 씻고 올게요.”

“그래. 맛있는 거 해놨어. 얼른 씻고 나와.”

샤워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엄마가 준 중학교 목록을 훑어봤다.

야구 강호라고 불리는 대부분의 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위해서 연락이 왔다.

거기에는 미국의 중학교도 두 곳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상우 중학교는 목록에 없었다.

하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저번 삶에서 중학교 2학년에 늦은 야구 선수로서의 도전을 결정했을 때, 날 받아주는 서울 팀은 한 곳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의정부에 있는 상우 중학교로 향했고 그 곳에서 유동기를 만나게 되었다.

유동기 감독이 지휘하던 상우 중학교는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팀이 아니었다.

당장의 결과보다는 선수 개개인의 능력과 잠재력을 끌어올리는데 집중하는 감독.

그게 유동기였다.

중학 야구 대회에서 늘 본선을 올라가지 못하는 팀의 주전 선수들.

하지만 그들은 고등 야구와 프로 무대에서는 각자의 포지션에서 한몫하는 선수들이 되었다.

그리고 유동기는 훗날 그 재능을 인정받아 프로 팀 수석 코치를 뛰었고 많은 팀들이 그를 감독으로 임명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전 기록보다는 선수들의 가치를 발굴해주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습니다.”

유동기는 그런 수많은 제의를 거절한 후 수석코치까지 관두고 고등학교 감독으로 돌아갔다.

그걸 보고 수많은 언론들은 괴짜 감독의 등장, 진정으로 야구를 사랑하는 지도자 등 수많은 기사들을 쏟아냈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깨 부상으로 투수를 관두고 유격수로 다시 도전하던 그 시절.

그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유동기의 타격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 역대 최고의 투수라는 평가까지 받으며 모두의 기대 속에서 1라운드에 지명을 받은 투수 유동기.

그의 2004년 계약금 10억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진 역대 최고의 기록이었다.

하지만 어깨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늘 말썽이었고 치료를 받아야 할 20살의 유동기는 그렇지 못했다.

그 당시에 유동기를 지휘하던 감독에게도 나름의 입장은 있었다.

신인에게 10억의 계약금을 주고 데려왔는데 먹튀 논란도 그러했고, 당장 계약이 2년밖에 남지 않았기에 결과를 내야 했었다.

선발 투수를 희망했지만 감독은 팀의 사정을 이야기했고 마무리 투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유동기.

하지만 말이 마무리였지, 아슬아슬한 위기 때에는 7회부터 올라와서 9회, 연장으로 경기가 간다면 10회, 11회까지 던질 수밖에 없었다.

2년 만에 팀은 2000년대 들어서 첫 우승을 기록하지만 유동기의 어깨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 후로 한국 역사상 최고의 유망주라고 불리던 유동기는 프로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무려 11년의 2군 생활. 2, 3년마다 종종 1군에서 등판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155km/h의 구속은 140km/h 초반까지 떨어졌고 팬들은 그런 유동기를 비난했다.

― 저게 무슨 10억짜리 에이스야? 먹튀도 저런 먹튀가 없지.

― 불동기가 따로 없네. 마운드에만 올라오면 불을 질러대니. 에휴 방출 좀 해라.

팬들은 이런 댓글을 적어댔고 그 당시의 유동기는 많이 상처받았다고 한다.

― 그래도 좀 안타까운 케이스긴 하지. 치료를 받아야 할 시기에 그렇게 굴렀으니.

물론 종종 이런 댓글도 있었지만 사람 마음이 참 그렇다.

아무리 좋은 댓글들이 달려도 악플 하나에 흔들리게 되는 것이 사람의 마음.

하물며 수많은 악플 속에서 좋은 댓글은 극 소수였으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팀까지 옮기며 마지막 도전을 불태웠던 유동기는 결국 현실의 벽 앞에서 지쳐 쓰러져 선수 생활을 포기했다.

그리고 제 2의 야구 인생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의정부의 상우중학교였다.

유동기는 본인의 선수 생활. 11년 동안 2군에서의 지옥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육성했다.

정말 중요한 경기에서도 80개의 투구 수를 넘기지 않게 무실점의 투수들을 늘 강판시켰다.

“감독님! 저 더 던질 수 있어요. 제가 여기서 내려가면 저희 팀은 올해도 예선 탈락일 거예요. 더 던지게 해주세요. 제발요.”

16살 질풍노도의 시기. 가끔은 이런 철없는 고집을 부리는 투수들에게 유동기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늘 경기는 고작 중학교 예선전이야. 넌 이제 16살이고 앞으로 20년은 더 야구를 해야 해. 난 너만 할 때 눈앞의 승리에 집착했고 후회의 시간들을 보냈어. 너 5회부터 폼이 무너지고 릴리즈 포인트가 늦춰졌던데, 정말 어깨 안 아픈 거 맞아?”

“살짝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야 이 멍청한 새끼야. 잘 들어. 네 어깨가 그런 상황이면 감독이 던지라고 해도 멱살을 부여잡고서라도 마운드를 내려와야 하는 게 투수야. 던져야 되는 경기? 있긴 하겠지. 월드시리즈 결승전? 올림픽 결승전 9회? 거기서도 나였으면 안 그러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어깨보다 중요한 경기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지금은 고작 중학교 예선전이야. 평생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내려와.”

“감독님······. 알겠습니다.”

뭐··· 이 이야기도 그때 내려온 그 투수가 세계 야구대회인 WBC에서 우승하고 나온 예능에서 10여 년이 지난 후 밝힌 내용이긴 했지만 말이다.

난 중학교 재학 당시에 유동기 감독이 끔찍하게 싫었다.

입에는 항상 욕을 달고 살 정도로 거친 말투, 거기에다가 투수인 나에게 타격 폼에 대해서 지적을 많이 하기도 했다.

보통 정말 싫어하던 사람이 좋아지게 된 이유는 사소한 일로 시작된다.

16살이 되던 4월, 난 그날따라 고열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화장실에 세수를 하러 가다가 쓰러졌다.

그걸 본 내 동료는 새벽 4시에 유동기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날 업어서 차에 태우고 응급실로 직행했다.

응급실 앞에 도착한 그는 또 날 들쳐메고 의사에게 달려갔고 난 독감 진단을 받았다.

“최강남 이 새끼야! 그렇게 타격하면 어깨에 무리 간다니깐? 말귀를 못 알아먹어.”

이 사건 이후로 유동기 감독이 타격 폼을 지적해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 보면 대부분 나를 위한 충고긴 했다. 말투가 좀 그랬을 뿐이지.

“감독님! 저 타격 폼 어때요? 이렇게 하면 좀 괜찮을까요?”

“아! 귀찮게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그렇게 해!”

그 후로는 오히려 내가 귀찮을 정도로 유동기를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물어보기까지 했었으니.

사람 인생은 참 모르는 것 같다.

내 어깨는 고등학교 2학년에 출전한 청룡기 4강에서 유동기처럼 산산조각이 났었다.

그리고 중학교에서 지적받으며 고쳤던 내 타격이 좌절에 빠진 날 다시 경기장으로 불러줬다.

난 저번 생에서 유격수가 KBO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번 생에도 내가 갈 중학교는 정해져있다.

“강남이 일찍 일어났네? 오랜만에 학교 가니깐 좋지?”

“학교 오늘까지만 안 갈게요. 가야 될 곳이 있어서요.”

“무슨 소리야? 한 달을 안 갔는데!”

“어디 중학교로 갈지 결정해서요. 지금 거기로 가보려고요.”

“음··· 오늘만이다? 어디로 가는데? 서울?”

“아니요! 의정부요.”

“의정부···? 그래. 잘 갔다 오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던 나는 엄마의 물음에 답하고 빠르게 집을 나섰다.

엄마는 의정부의 중학교로 갈 거라는 내 말에 뭐라고 할 줄 알았지만, 선택을 존중해주며 배웅을 해줬다.

난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철을 갈아타며 1호선, 의정부 역에 도착했다.

역 주변에 있는 상우 중학교였기에, 걸어서 가기에 충분한 거리.

상우 중학교에 들어가자 운동장 너머로 따로 마련된 야구장에서 훈련을 지시하는 유동기가 보였다.

“감독님!”

“뭐야? 너 누구니?”

그렇게 며칠 동안 뉴스에 나왔을 텐데 날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아는 유동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른 팀 감독들은 경기를 챙겨보고 유망주를 영입시키려고 눈에 불을 켤 때조차도 자기 팀 선수들밖에 모르는 감독.

“감독님! 저 친구 최강남입니다. 그 월드시리즈···.”

“최강··· 뭐라고?”

다행히 옆에 있는 코치는 날 알아봤고 조금 수월하게 이야기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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