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쩌다 배우-111화 (111/127)

〈 111화 〉 비객(悲客). (9)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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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의 발목 부상과 상관없이 <비객> 촬영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순조롭게 항해하고 있다.

16부작으로 예정된 <비객>은 중반을 넘어서며 시청률도 탄력을 받아 20% 턱밑까지 바짝 붙었다.

기존 대본을 엎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했던 황혜경 작가는 시청률 고공행진으로 인해 신이 내렸다고 할 정도의 속도로 후반부를 써내려갔다.

특히 지난 사당놀이공연 촬영을 지켜 본 이후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악동의 스토리가 또 다시 바뀌었다.

본래는 악동이 10부에서 죽으면서 드라마에서 빠지는 스토리였다.

이온이 받은 10부에서는 악동이 살아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악동의 감정과 고민이 훨씬 깊어졌다는 점이다.

“연말 시상식에서 신인상 노려볼만 하겠어.”

“시청률 20% 찍으면 확실하지.”

스태프 사이에서 이러저런 기대와 예상이 쏟아졌다.

그 만큼 촬영현장 분위기도 촬영 페이스도 좋았다.

당분간 안건우를 중심으로 동서인 파벌 사이의 치열한 정치투쟁과 노비로 전락해 전국 각지로 흩어진 안씨 집안의 구명운동 스토리 위주로 촬영이 진행된다.

그로인해 이온은 촬영분량이 없었다.

휴가 아닌 휴가를 받았지만, 기말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온은 발목 부상을 치료하며 기말고사를 치렀다.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발목부상은 삼일 만에 털어냈다.

그럼에도 기말고사 내내 붕대를 풀지 않고 약간 절뚝거리는 쇼를 해야 했다.

공연히 남다른 회복력을 사람들에게 자랑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시험과 과제에 있어서 홍수진을 비롯한 여자 후배들이 상당한 도움을 줬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과제로 대체했는데, 후배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럭저럭 낙제는 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섭네......’

새롭게 전달 받은 대본을 보며 연기를 연구하다 보니 잔여 감정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아이돌>에서 잠시 맛을 봤던 배역에 빨려 들어간 듯한 체험을 <비객>에서는 좀 더 자주 경험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배역 투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와~ 걍 그림이네!”

효정이 강의실 복도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온을 보며 감탄했다.

초여름이었지만, 이온이 서 있는 창가만큼은 쓸쓸한 가을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고즈넉하게 서서 사색에 잠겨 있는 이온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악동이 같아.....”

서양사학과 여자 후배들은 이전의 친절하지만 곁을 잘 주지 않는 이온이란 선배와 최근의 쓸쓸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도 어린애 같이 천진난만하게 행동하는 이온이 전혀 딴 사람처럼 느껴져 종종 혼란을 겪었다.

나날이 잘생겨지는 이온으로 인해 안구가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 것은 좋았지만.

배우로써 너무 캐릭터에 몰입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배우들 사이에 종종 심하게 배역에 몰두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던데.... 이온 오빠는 괜찮을까 몰라.”

수진이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멍하니 창밖을 내려다보던 이온의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움찔.

수진이 얼른 효정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왜 숨어?”

“그냥 방해하지 말고 가자.”

“이온 오빠 좋아하지?”

효정이 은근한 어조로 수진에게 물었다.

대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조교 언니가 그러는데, 이온 오빠 군대 가기 전에 별명이 철벽남이었대.”

“......”

“대쉬했던 선배 언니들이 하나같이 다 대차게 까였다고 하더라.”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수진이 입을 열었다.

“난 지독한 아싸라고 들었어.”

“우리 과에 아싸 아닌 사람이 누가 있어.”

“그렇긴 하지만....”

“이온 오빠 여사친 중에 뮤지컬 배우가 있대. 스타일 끝장난다더라. 로스쿨 다니는 공부 열라 잘하는 여사친도 있고.”

수진의 기분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드르르르.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폰이 진동하자, 이온이 폰을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이긴 한데, 전혀 알지 못하는 번호다.

요즘 부쩍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자주 온다.

이 번호는 벌써 다섯 번째다.

지금까지는 쓸데없는 전화일 것으로 여겨 무시했다.

그런데 자주 전화를 거는 것으로 봐서는 무슨 전화인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보이스피싱이 같은 번호로 다섯 번을 전화할 리가 없으니까.

“여보세요?”

[나이온 배우님 되세요?]

“예. 나이온입니다.”

받기를 잘했다.

일단 보이스피싱도 대부업자도 광고 전화도 아닌 것 같다.

[정말 통화하기 힘드네요.]

“......어디시죠?”

[안녕하세요. 영화사 넝쿨담장의 연출부 이윤기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조감독님.”

[혹시 <비객> 촬영 중이신가요?]

“아니요. 이번 주는 촬영이 없어서 개인적인 볼일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셨구나....]

“실례지만 제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 방송연기자협회에 전화했더니 연락처를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그래서 액션아카데미 쪽의 아는 형, 도훈이형 아시죠?]

유도 선수 출신의 스턴트맨 동기다.

[전에 작품을 같이 했었거든요. 그 형한테 물어봤더니 알려주더라고요. 혹시 알려져서는 안 되는 번호라도.....]

“아닙니다. 도훈이 형이 알려줬군요.”

[매니저가 없으신가 봐요?]

“네.”

[그러셨구나. 암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영화사 넝쿨담장에서 준비 중인 영화 <서커스 소녀>에서 인물담당을 하고 있어요.]

몇 달 동안 단편과 독립영화 그리고 <비객>에 집중하느라 방송과 영화계의 신작 라인업에 대한 정보가 업데이트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서커스 소녀>가 어떤 프로젝트인지 정보가 전혀 없었다.

[혹시 <칠곡 계모 살인>이라는 영화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그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님이 이번에 <서커스 소녀>라는 영화를 들어가세요.]

인물담당 조감독이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영화에 대해 대략적으로 소개했다.

영화는 5살 때 서커스단에 팔려가 7년간 온갖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다 1991년 탈출한 실존 인물의 비극적인 삶을 다룬 휴먼드라마다.

서커스 단장에는 연극배우 출신의 조동규가 캐스팅되어 있었고, 현재 아역 캐스팅이 한창이라고 알려줬다.

참고로 배우 조동규는 <바다를 건너 온 자>에서 젊은 내연녀와 불륜을 저지르며 꽤 큰 규모의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사건의 발단이 되는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배우였다.

[나이온 배우님은 올해 하반기 스케줄이 어떻게 되세요?]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감독님이 나이온 배우님을 한 번 보시고 싶어 하세요.]

“오디션을 보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미팅 입니까?”

[간단하게 리딩은 준비하셔야 할 거에요.]

“제가 앞으로 보름 정도는 더 <비객>을 촬영을 해야 합니다.”

[스케줄은 나이온 배우님한테 맞춰드릴 게요. 감독님도 작가랑 윤색 들어가셔서 당장 미팅을 하실 순 없으니까요.]

“제가 이메일 주소 남기겠습니다. 쪽대본하고 간략한 영화 정보 부탁드립니다.”

[예. 바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온은 통화를 마치고도 한참을 창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정신을 깨끗하게 비운 후에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후우.”

<비객>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 캐스팅 관련 연락이 종종 오고 있었다.

즐겁고 감사한 일이다.

문제는 <비객>을 마무리하지 않은 상황에서 오디션 기회를 욕심껏 소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광고도 두 개 정도 들어왔었다.

안하기로 했다.

업체 측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출연료를 스턴트맨 금액으로 책정했던 것.

마치 두 업체가 짜기라도 한 듯 똑같은 양아치 제안을 했다.

뻔뻔스럽게 일본 로케이션이니까 여행 다녀오는 셈 치면 안 되겠냐는 이야기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이온은 깔끔하게 거절했다.

이온은 방송출연료 등급(외주)상으로 12등급이다.

최소 6개월 계약으로 3,000만 원을 받아도 모자를 판에 스턴트맨 출연료 300만 원을 제시했던 것.

매니저 없이 홀로 일을 하고 있다고 우습게 안 것이다.

주변에 신지균이란 스승이 있고, 액션아카데미 선배들도 있으며, 비록 분야는 다르지만 현역 뮤지컬 배우가 절친이고, 언제든지 관련 상담을 할 수 있는 매니지먼트 실장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

그들은 이온을 업계 물정 하나 모르는 애송이로 여겼던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광고대행사 두 곳은 영원히 이온과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온 자체적으로 작성하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갔으니까.

<비객>의 홍보를 맡은 외주대행사를 통해 매체 인터뷰도 몇 개 잡혔다.

제작PD는 예능출연 언급도 했다.

현재 메인 주인공인 안건우와 송민아가 출연하는 예능과 이온을 포함해 주조연급들이 나갈 예능프로그램을 분리해서 타진하는 모양이다.

<비객>이 요즘 핫한 드라마이고 MBS에도 20% 시청률 달성을 위해 강하게 밀어주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예능프로그램을 골라서 나갈 수 있는 분위기다.

이온은 그런 상황들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받아들여야 했다.

이젠 스턴트맨이 아니라, 전업 배우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뭐 다른 건 없나.....?”

학교를 나서며 스마트폰으로 포털에 들어갔다.

자신의 이름을 쳐보았다.

매번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는 것이 오글거리고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처음에는 혼자 있을 때도 누가 볼까봐 엄청 부끄러웠었다.

자신의 이름을 포털이나 검색엔진에 쳐보는 것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뭐가 이렇게 많지.’

각종 기사와 동영상 목록이 주르륵 나왔다.

<비객>을 시작으로 일반인들의 목격담 그리고 가장 최근에 참가한 워크캠프에서 찍은 듯한 사진과 과거 남미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도 여럿 검색됐다.

친한 동생인 정섬과 후임들이 올린 것으로 보이는 공군시절 공연사진이라던가 잠시 몸담았던 비보이 크루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도 있었다.

이온 개인이 담긴 동영상 가운데 가장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몇 년 전 카나한 윈터게더링에서 카이사르와 트릭킹 배틀을 벌일 때의 동영상이었다.

댓글도 많이 달려 있었다.

이온은 신기해서 일단 하나하나 다 들어가서 읽어보았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도 잠시.

이온은 자신과 관련한 기사나 블로그, SNS 글, 이미지 등에 빠져들었다.

기말고사도 끝나고 종강까지 한 터라 이온은 온전히 <비객>에만 집중 할 수가 있었다.

다만 자신의 촬영분량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울 뿐.

모처럼 조선시대 세트장을 벗어나 강원도 정선에 와 있었다.

화암 8경 중 제7경에 해당하는 몰운대에서 한창 <비객> 촬영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층층이 포개어 놓은 듯 깎아지른 바위 절벽 위에 널따란 반석이 펼쳐져 있고, 반석 끝에는 수령이 족히 500년은 넘어 보이는 고사목이 멋들어진 자태를 취하고 있다.

이온과 민아가 그 몰운대 절벽 끄트머리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다.

그리고 지미집의 암이 절벽 밖으로 길게 튀어나와서 두 사람을 화면에 담았다.

참고로 지미집(Jimmy jib)은 크레인과 같은 시소 원리의 촬영장비로 리모컨으로 카메라를 컨트롤할 수 있는 무인 카메라 시스템이다.

“오빠는 남미 어디어디 갔었어?”

“아르헨티나부터.... 여섯 일곱 개 나라 쯤.”

자주 두 사람이 엮이다(?) 보니 한 순간 말을 놓게 됐다.

자신의 회사사람에게 연예인 태를 내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함께 작업하는 동료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에게는 싹싹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남미 요리도 할 줄 알겠네?”

“요리 하는 걸 자주 옆에서 보긴 했는데, 내가 해본 적은 없어.”

“자원봉사 가서 직접 밥을 해먹었다면서?”

“나는 한국사람이니까. 기회가 있을 때는 외국 친구들에게 불고기나 떡볶이 같은 한국음식을 해서 먹였지 뭐.”

“자주 음식을 해봐서 요리도 잘하겠다 그치?”

“잘하는지 모르겠네. 대신 설거지는 만렙이야.”

“오빠 체지방률은 사기인 것 같아. 어떻게 그런 몸매와 근육을 유지할 수 있어?”

“액션배우는 언제 어떤 순간에도 액션을 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 만약 내가 배우가 아니라 무술팀의 일원으로 <비객>에 참가했으면 건우형 스턴트더블을 했을 걸? 그 형도 많이 말랐잖아. 당연히 그 체형에 맞춰야 했겠지.”

“자기관리도 적당히 해야지. 옆에서 보는 사람이 걱정하기 시작하면 그건 관리가 아니라 방치인 것 같아. 좀 적당히 할 필요가 있어.”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면 민아가 자꾸 이온에게 말을 시킨다.

처음에는 왜 그러는지 몰랐다.

“오빠 내가 자꾸 말 시켜서 감정 잡는데 힘들었어요?”

“뭐....”

“그게... 사실은 메이킹 카메라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

“홍보팀하고 메이킹 팀에서 촬영 중간중간 생기는 텀에 오빠한테 자꾸 말시키라고 하더라고요. 오빠가 이런 게 처음이라서 적응을 못할 거라면서.”

이야기인즉슨, 주인공들의 친한 모습, 장난치는 모습, 즐겁게 촬영하는 모습 등을 메이킹으로 담아서 공식 채널이나 각종 SNS를 통해 내보내야 하니까 뻣뻣한 이온 대신 민아가 그런 상황을 리드해 달라는 홍보팀의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소위 짬밥에 오는 행동이랄까.

메이킹 카메라가 눈에 뜨이게 되면 이온은 그걸 상당히 의식했다.

스턴트맨일 때는 안 그랬다.

배우로 출연하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이돌>에서는 그런 거 없었는데....”

“러브라인이 없었잖아요.”

“있을랑 말랑하다가 그냥 흐지부지 뭐 그랬죠.”

“멜로 장면이 방영되기 전에 주로 그런 사바사바 알콩달콩 꽁냥꽁냥 한 현장 메이킹 장면을 풀더라고요.”

“그러다 스캔들 나면?”

“요새 시청자들은 실제 사귀는 거와 촬영 메이킹하고 귀신같이 구분해요.”

“별로 안 믿기지만, 그렇다고 해 둘게요.”

“나랑 스캔들 나는 게 싫어요?”

“안 좋죠. 민아씨한테 피해가 갈 텐데.”

“그 반대가 될 것 같은데....”

민아가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어요?”

“아니에요. 아무 것도!”

이온은 쾌활하게 외치는 민아의 목소리에 회상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감독님~ 저희는 언제든지 슛 갈 수 있어요~”

어쨌든 이온은 배우는 단순히 연기만 잘해서는 안 되고, 메이킹 노출시 태도, 더 나아가 인터뷰 스킬도 꽤 높은 수준으로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었다.

“슛 갑시다!”

이 날 촬영은 악동과 방실이 꽁냥꽁냥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러니 사전공개 메이킹 영상에서 두 사람이 남미음식과 요리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갈 것이 확실했다.

두 배우가 실제 사귀지는 않지만, 시청자들이 촬영현장에서 배우들의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고 난 후 드라마 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좀 더 몰입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랄까.

[여기에 뭐가 있소? 왜 만날 이 절벽에 올라오는 것이오?]

[넌 말해줘도 모를 거야.]

[한 번 말해보시오. 알아듣던 말던 들어나 봅시다.]

[눈 감아봐.]

[......]

[얼른!]

이온이 반석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눈을 감았다.

[어때?]

[고요하오. 아니, 저기 밑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새소리도 들리고.....]

[바람은?]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것 같소.]

[바람에도 맛이 있어.]

악동이 감았던 눈을 뜨고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듯 방실을 빤히 쳐다봤다.

[여름의 맛이 다르고 가을의 맛이 다르고 겨울의 맛이 달라. 언제가 제일 맛 나는 줄 알아?]

[바람의 맛이 있다는 걸 난생 처음 듣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소.]

[참나무가 노랗게 변할 때 즈음.]

[그게 언제요?]

[참나무 잎이 다른 나무들보다 좀 늦게 나와. 처음에는 약간 황토색이었다가 점점 초록색으로 바뀌게 돼. 초록색으로 막 바뀔 때 그 때가 바람의 맛이 제일 상큼하고 맛이 좋아.]

[배가 고프면 말을 하지 그랬소.]

[아휴~ 이 바보가~ 바람의 맛이 있다구.]

[그래봐야 바람 아니오. 그것으로 주린 배를 채우겠소? 괜히 화만 날 것 같소.]

[바부 멍충이! 내가 너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겠어~ 이 답답이~ 바보~]

방실이 답답해서 악동을 마구 구박했다.

악동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평화로운 일상이다.

악동이 이런 날이 매일매일 이어지기를 저 멀리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예인촌 움막을 바라보고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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