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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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아동 학대, 학교 폭력, 묻지마 폭행, 데이트 폭력, 일반 폭행, 살인 등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벌어지는 사건들이 연일 이슈가 되고 있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감정 중 하나다.
그리고 그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 특징이 있다
문제는 일시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자주 반복되거나 폭력성을 동반한다면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흔히 사용하는 '분노조절장애'란 용어는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정식 진단명은 아니다.
정신질환에서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로 명명하고 있다.
감정과 충동을 조절하는 뇌의 전두엽이 손상됐거나 일시적으로 기능이 떨어졌을 때 분노가 제어되지 못하고 행동으로 발현되는 상태다.
이미연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는 단편영화 <내가 화가 나 있다면 모두 너 때문이야>는 바로 그 분노조절장애를 담고 있다.
“요즘 게임 중에 비매너가 가장 많은 게 뭐야?”
“가장 인기 있는 게임에 비매너도 많겠죠.”
“추천해줘.”
“그런 겜 왜 하려고요?”
“어떤 것들이 유저를 화나고 짜증나게 만드는지 경험해 보게.”
“왜 요?”
“게임 하다 빡 돈 캐릭터를 연기하기로 했거든. 근데 내가 게임을 잘 몰라. SNS도 안하니까 댓글이나 DM으로 나를 약 올리며 낄낄거리고 비웃는 행동이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스트레스 엄청 받을 텐데......”
이온은 학과 후배들에게 비매너와 소위 트롤링이 난무하는 게임과 서버를 추천받았다.
또한 온갖 ‘악플‘과 ‘인성질‘이 많은 커뮤니티나 사이트도 추천받았다.
현실에서 어쩌다 마주하는 온갖 개차반들이 그 곳에 있었다.
‘이런 미친놈들이 정상적으로 사회생활이 가능한가......?’
분노가 많은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콤플렉스가 있거나 과거에 상처받은 경험이 많은 경우.
스스로의 능력으론 일을 해결하지 못할 때.
또 자신이나 타인을 과대평가했다가 크게 실망했을 때.
때로는 자신의 요구를 알아달라는 표현으로 화가 나타나기도 한다.
정작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온이 연기하게 될 PC방 죽돌이 백수 캐릭터는 그 모든 걸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마디로 분노 그자체인 청년이었다.
그런 만큼 그 분노조절장애가 제어되지 못하면 자칫 사고나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다가 골목길에 들린 경적소리에 그 제어가 깨져버리고 만 것이다.
후우.
이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분노라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만들고, 촬영에 앞서 한껏 끌어올려보았지만, 금방 가라앉았다.
원래 분노라는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가라앉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이온은 토끼발의 미신으로 인해 매사 긍정적인 편이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는 버릇까지 있다.
이성을 조절하는 좌뇌가 활성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우뇌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성격이나 성향으로 인해서 분노라는 감정에 쉽게 노출되고 그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성격의 인물을 표현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온 오빠, 감정이 잘 안 잡혀요?”
헤매고 있는 이온에게 미연이 물었다.
함께 작업을 하면서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솔직히 분노조절장애라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은 잘 보면 장애가 아니야. 장애는 조절이 안돼야 장애잖아.”
“그저 분노를 유발하는 상황에 노출된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는 건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또 다른 주인공인 40대 남자가 이 영화의 상황이 아니라 다른 상황, 예를 들어서 운전하다가 시비가 붙었어. 그래서 차에서 딱 내렸는데, 시비 붙은 사람이 마이크 타이슨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되겠어?”
“쫄겠죠. 아마도....?”
“분노의 감정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걸? 바로 그건 장애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타이슨 같이 무섭게 생긴 사람을 보고도 달려들어야 그것이 병이라는 논리잖아요.”
“조절이 안 되는. 근데 시비 붙은 사람이 나보다 약해 보이거나 만만해 보여서 더 덤비면 그건 장애가 아니라 폭력 아닐까?”
“....음.”
미연이 고민에 휩싸였다.
그는 단편영화 <내가 화가 나 있다면 모두 너 때문이야>에서 우리 사회의 '분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본인이 분노와 혐오범죄에 노출된 사회적 약자로써 술을 마신 범죄자를 '심신미약'으로 감경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범죄를 저지른 자의 행동이 의도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닌 양 분노조절장애가 면죄부가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친한 언니가 대낮 공공장소에서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아무 이유 없이 몸을 부딪치더니 다짜고짜 욕설을 하고 시비를 걸었던 걸 경험했다.
단순히 말싸움으로 끝났으면 불행 중 다행이었지만, 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미연의 지인은 묻지마 폭행으로 인해 눈가가 찢어지고 광대뼈가 함몰됐다.
폭행 피의자는 조사과정과 재판에서 ‘순간적으로 욱해서 한 일’이라고 그때는 자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또한 서울중앙지법은 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도주나 증거 인멸 우려가 없다면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두 차례나 기각했다.
결국 묻지마 폭행을 저지른 피의자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는 분통을 터트릴 일이다.
그래서 처음 미연이 시나리오를 썼을 때는 30대 남성 가장이 아니었다.
30대 평범한 직장여성이었다.
여성이 끝내 복수를 하는 것이 통쾌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 복수 역시 분노조절장애를 핑계로 폭력을 저지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오빠는 캐릭터를 다시 원래대로 직장 여성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
“난 분노가 축적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동시에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고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좋은 것 같아. 물론 영화를 보고 단번에 그걸 알아차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겠지만.”
“운전남이 가족과 통화할 때 부인 너머 TV에서 분노조절장애와 관련한 뉴스가 나오는 걸 찍으려고요.”
미연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분노범죄와 관련해 나름 연구를 했다.
그녀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살인범 연령대 분포가 다른 나라들과 많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가장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는 연령대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이다.
외국 영화를 봐도 그 나이 대 청년들이 일탈을 많이 한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40대~50대가 살인 범죄자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배경과 관련 있다고 전문가들이 설명했다.
한국은 높은 교육열로 인해 10대의 경우 입시 체제 하에서 24시간 관리되고, 철저히 감독받기 때문에 일탈의 여지가 매우 적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정적 상호작용으로 인해 분노의 축적이 일어나고, 40대가 될 때까지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서 결국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돌발적인 범죄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운전남에게 영화가 면죄부를 줄까봐서야.”
어떤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미연은 이온의 얼굴이 선하게 생긴 것이 걸렸다.
그런 외모에서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면 코미디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머리도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페이크 코 피어싱도 하고 목덜미에 인스턴트 타투도 하도록 했다.
명백히 양아치스러운 외모를 이온에게 주문한 것이다.
자칫 그런 양아치를 차로 밀어버리는 운전남의 행동이 또 다른 폭력을 유발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복수의 완성처럼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머리 염색한 것은 놔두더라도, 피어싱과 타투는 없애는 것이 어떨까?”
“날라리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20대 백수 청년으로요?”
“응.”
“굳이 입시 스트레스니 청년 실업난 같은 것, 1도 넣을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이 사회가 분노를 유발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로 넘쳐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이온은 의견을 냈을 뿐이다.
받아들이고 말고는 감독인 미연이 결정할 사항이다.
단순히 피어싱과 타투만 없애면 되는 걸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그 설정이 없어짐으로 해서 연출과 연기가 크게 변할 수도 있다.
영화의 톤 앤 매너부터 주제까지 바뀔 수도 있는 문제다.
“오빠.... 죄송한데, 한 삼십 분만 쉬었다 찍어도 될까요?”
“편하게 해.”
“죄송해요.”
“혹시 내가 감독을 흔들어놓은 거야?”
“그건 아닌데.... 분노, 사회적 시스템, 복수, 폭력이라는 키워드를 너무 여성의 입장에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당면한 고민일 수도 있을 텐데.”
“분노조절장애에 노출된 건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들이겠지.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런 폭력에 노출되는 대부분의 피의자와 피해자 모두는 우리 사회가 방치했거나 외면해서 생겨났을 수도 있고.”
촬영팀은 잠시 휴식과 정비 시간을 가졌다.
“호철아!”
“네. 형!”
장호철은 국제경영학과에 다니고 있는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THI)의 멤버였다.
이번 단편영화에서는 홀로 제작부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다.
“따라와.”
“어디 가는데요?”
“커피전문점에.”
이온은 장호철을 데리고 근처 커피전문점으로 가서 단편영화팀들을 위해 커피를 사왔다.
자신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은 아니지만, 고생하는 후배들은 나몰라하고 배우입네 폼만 잡을 수는 없었다.
그 시간 동안 미연은 홀로 떨어져서 자신의 시나리오를 고쳤다.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순찰을 도는 경찰 장면이 하나 추가 된 것 말고는.
대신 캐릭터와 연기 부분에서 이온의 의견을 상당 부분 들어줬다.
“.....잊고 있었네. 최 병장 X발놈~”
이온은 분노의 감정을 오래 유지시킬 방법을 찾았다.
바로 공군 비보이팀 꼴통 선임을 떠올린 것이다.
액션캠프 시절의 임대한과 심동혁도 이가 박박 갈릴 정도로 짜증나는 인간들이었지만, 공군 비보이팀의 꼴통 선임에 비하면 애교수준이었다.
그 정도로 악질적이었다.
이온은 미연의 ‘레디’ 사인이 나오면 곧바로 공군 비보이 시절 악마 같았던 꼴통을 떠올리며 분노를 한껏 끌어올렸다.
무식한데다가 독사 같았던 바로 그 최 병장.
[니들은 집에 삼촌도 없냐!]
[XX X발~ 삼촌 있었으면 XXX 삼촌한테 담배 심부름 시키지 이 %^[email protected]아~ 우리가 응 이렇게 고생을 X발 X나 X발 처하고 자빠졌겠냐~ 삼촌 같은 소리하고 &%$#!]
이온에 입에서 욕설이 섞인 대사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대사톤은 평상시보다 약간 높게 잡았다.
목소리가 가볍도록 의도한 것이다.
욕설 자체는 살벌한데 그걸 뱉는 청년의 외모나 톤이 전혀 살벌하지 않은.
불량하고 어디서 좀 놀았을 것 같은 양아치 청년이 아니라,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백수 청년으로 캐릭터를 바꿨다.
그래야 운전남이 무서워하지 않고 맞상대를 할 수 있으니까.
이전까지는 폭력에 대한 맞대응적인 복수의 구도였다.
그런데 캐릭터와 연기톤을 바꾸자, 을과 을의 대결처럼 보여졌다.
분노-폭력-복수.
그랬던 구도가 폭력에 대한 또 다른 폭력으로 앙갚음.
결국에는 살인이라는 파국의 전개로 정리가 된 것이다.
“모두 수고했어.”
촬영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았다.
스태프도 적도, 장소도 대부분이 야외다.
당연히 야외에서는 반사판만으로 인물 조명을 해서 시간을 아껴서 쓸 수가 있었다.
카메라도 최근 독립영화나 단편영화 영역을 넘어 프로들도 세컨드 카메라로 많이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카메라 즉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용해 편의성을 높였다.
물론 콤팩트 하이브리드 카메라는 DSLR의 한계를 극복했다거나 뛰어난 성능을 보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DSLR보다 가볍고 조작성이 좀 더 직관적이며 화질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서 스마트폰과 영화용 카메라의 중간적인 개념으로 각광 받고 있다.
프로들은 전용 마운트를 구매해서 DSLR 카메라 렌즈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단편영화팀들은 그 정도까지 투자하진 못했다.
최근에는 초고화질 8K 동영상 촬영 기능을 탑재한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나는 추세여서 굳이 비싸고 복잡하고 다루기 버거운 전문가용 카메라를 졸업영화나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지고 있다.
암튼 <내가 화가 나 있다면 모두 너 때문이야>는 모두 5회 촬영이 잡혀 있었다.
그 중에 이온은 3일을 촬영했다.
겨우 단편영화일 뿐이다.
하지만 <활빈>에서 수행하는 액션연기와 다른 연기의 세계다.
<아이돌>의 크리스티안 역할 이후로 얼마 만에 만나게 된 배역인지.
스턴트맨이 아닌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서면 신비로운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이온은 백수 청년을 연기하는 동안 그 감정을 구석구석 음미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촬영팀이면 어떤가.
아마추어들이면 또 어떻고.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펼친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