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이제 연기해도 되겠어...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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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et 금토 드라마 <아이돌>이 끊임없는 떡밥으로 궁금증을 유발하며 매주 시청률 최고점을 찍으며 멈춤 없는 시청률 경신을 이어가고 있다.
장현기, 고한별 그리고 김성식, 박호섭 등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배우들의 호연과 한국의 아이돌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에서 있을 법한 현실적인 사건들, 그 속으로 뛰어든 청년들의 고민과 좌절 및 희망적인 모습 등을 통해 큰 감동과 선사하고 있다는 평가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아이돌> 10회는 수도권 가구 기준 평균 15%, 최고 17%, 전국 가구 기준 평균 12.4%, 최고 14.3%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했다.
남녀 2049 시청률은 수도권 평균 9%, 최고 10.3%, 전국 평균 8.2%, 최고 9.6%를 기록했다.
가구와 타깃 모두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에서 동시간대 1위에 오른 수치다.
당초 주 타깃을 10~20대 중반으로 잡고 있었지만, 아이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주변까지 다루면서 Vnet 주 시청층인 2049 시청률에서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청률이 잘 나오면서 피로에 찌든 스태프들도 힘을 내서 촬영에 임했다.
강행군이다.
처음으로 한 작품을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하는 이온으로써는 드라마 제작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절실하게 경험하고 있었다.
“슛!”
“씬 27, 커트 하나 테이크 하나!”
딱!
슬레이트가 치워진 모니터 화면에 크리스티안과 우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두 사람은 을지로에 있는 한 건물 옥상에 올라와 있다.
[위약금 내지 않고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방법?]
크리스티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진에게 묻는다.
TV 드라마에서는 전자담배조차 피우는 모습을 묘사해선 안 된다.
따라서 피울까말까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식으로 연출한다.
우진이 전자담배를 피우려다 말고 대답한다.
[그래, 병신아~]
[차라리 중견 기획사로 옮겨서 몸값을 높이는 게 나아.]
[그래도......]
크리스티안이 ‘그것은 좀 바보 같은 생각인데’라는 의미의 스페인어를 중얼거린다.
우진은 크리스티안의 혼잣말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난 회사에서 배울 건 다 배운 것 같아.]
[어떻게 하려고?]
[실장이 개쌍욕하는 거 물고 늘어져야지. 또 계약 조건 조항 중에서 법적으로 걸수 있는 것 다 찾아서 물고 늘어지고.]
[그래도 안 통하면?]
[매일 밤 몰래 라면이라도 먹어야겠지.]
[살찌면 방출당하니까?]
[응.]
요즘 연습생들은 영악하다.
여전히 계약에 묶여 불이익을 당하는 아이돌 지망생도 많지만, 연습생들 사이에서 위약금 없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암암리에 공유하고 있다.
인터넷 특정 커뮤니티에는 오디션, 기획사, 연습생 정보를 나누는 게시판이 따로 운영되고 있다.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커뮤니티가 상당히 발달돼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들은 비공개 댓글, 쪽지, 순식간에 삭제되는 게시물 형태로 공유될 때가 많다.
[난 엄마하고 상의해봐야 돼.]
[으이구. 이 마마보이 같은 새끼.]
그렇다.
크리스티안은 상당한 댄스실력, 훌륭한 외모, 외국어 능력에 걸맞게 자뻑이 상당한 캐릭터로 그려지지만, 결정적으로 마마보이 성향이 있다.
마마보이는 크리스티안의 잘난 모습 뒤에 숨겨진 일종의 약점 혹은 결함이다.
비록 조단역급 캐릭터지만, 이 작은 설정 하나로 크리스티안은 입체적인 인물이 되었다.
“컷! 모니터 보고 갈게요!”
이온은 자신이 연기를 할 때는 한 장면을 찍고 나서도 동작이 너무 크지 않았는지, 표정이 지나치지 않았는지 일일이 모니터를 하곤 했다.
결과는 노력한 만큼 돌아왔다.
“대사 좋아졌다.‘
박호섭 선배가 지나가다 툭 한마디 던지기도 하고.
“잘하고 있어.”
김성식 선배가 등을 토닥여주기도 했다.
한번은 분장실에서 중견탤런트 선배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무술팀, 이제 연기해도 되겠어.”
평소 말씀이 많지 않고, 이온을 배우 후배가 아니라 동료 즉 스태프로 대하던 선배의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전까지는 젊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던 대선배였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배님이 그러셨어. 배우는 모멸감을 이겨낼 줄 알아야 한다고.”
비록 이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분장실에 있던 어린 배우들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이쪽을 쳐다봤다.
이온은 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듣고 싶었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자신만 해도 액션아카데미의 쟁쟁한 감독급들과 있는 자리에서는 각을 잡고 귀만 열어놓고 있으니까.
선후배간에 군대식 규율이 남아있는 게 탐탁치는 않았지만, 그 부조리함은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서 바뀌는 영역이 아니었다.
경력 많은 선배들 선에서 하나같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잡아줬다면 후배들도 따라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대선배가 호통을 치면 그게 틀린 것이라도 고개를 조아려야하는 풍조가 아직 남아있었다.
“편하게 들 대해.”
이런 말조차 때로는 어린 배우들에게 폭력일 수도 있었다.
“배우에게는 말이야. 선배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혼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기에 대한 비판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도전하려는 자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대선배는 연기력도 중요하며 경험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연기에 대한 비판을 받거나 위축될 때도 혹은 자신의 연기가 혹독히 비판받고 인정받지 못한 초라한 신인의 상황에서도 결코 현장에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어떤 모욕일지라도 흔쾌히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성격이 긍정적입니다. 그래서 뻔뻔하다는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선배님!”
당시에 이온은 넉살좋게 대답했었다.
“이온아~”
한 PD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던 이온을 일깨웠다.
“바로 가도 되겠어?”
“예. 준비됐습니다.”
지금 촬영할 장면은 크리스티안이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모님과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그리움과 설움을 울음으로 표현하는 내용이다.
펑펑 울어선 안 된다.
딴에는 부모님께 우는 걸 들키기 싫다는 감정도 담아야 한다.
그런데.
엉엉.
이온이 감정에 북받쳐 올라 펑펑 울어버렸다.
“컷! NG!"
당연한 결과다.
훌쩍훌쩍 울어야 하는 감정이다.
이온은 과장 좀 보태서 대성통곡했다.
‘....제기랄!’
이온이 분장팀에서 건네준 티슈로 눈물을 닦아내며 내심 욕을 했다.
전혀 통제를 못했다.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울기만 했다.
마치 어떤 스위치가 ‘팍‘ 하고 들어오자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 듯이 터져나왔다.
이온조차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감정의 홍수였다.
“잠깐 쉬자.”
“괜찮아요.”
“눈이 충혈 됐잖아. 현기 부분부터 찍고 있을 테니까 충분히 감정 추스르고 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어. 가끔 배우들이 그럴 때가 있더라. 자신도 모르게 잠시 어딘가 갔다 오는 거. 넌 아직 미숙해서 그런 걸 컨트롤 할 수 없을 거야.”
“죄송합니다.”
이온은 거듭 한PD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촬영감독을 포함해 스태프와 배우들에게도 사과했다.
배우의 과욕 혹은 실수는 때로 촬영 진행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처음이다.
이온은 지금까지 자신의 맡은 바 역할 안에서 촬영에 지장을 초래하는 일을 벌여본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 배우로서 창피했다.
우는 연기 하나 제대로 못해서 추태를 부리다니.
명백히 크리스티안이 운 것이 아니라 이온이 운 것이다.
배우는 눈물 한 방울을 1초마다 하나씩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의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실제 우는 걸 보여줘서 보는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날것을 그대로 담아 편집하는 다큐멘터리에서나 가능하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배우가 우는 것 같은 연기를 해야 한다.
픽션인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배우가 보는 사람을 납득시키지 않으면 어떤 공감도 이끌어낼 수가 없다.
배우가 서럽게 운다고 해서 시청자도 함께 울어줄 거라고 착각하면 오산이다.
후우.
촬영장에 벗어나자마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건물 복도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PD의 ‘큐’ 사인이 떨어진 이후부터 찬찬히 자신의 연기와 감정을 떠올려보았다.
이온은 크리스티안의 감정에 이입하기 위해 어릴 때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감정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어린 이온은 할머니와 헤어진 것에 대한 슬픔도 큰 부분을 차지했지만, 누나와 단 둘만 남겨졌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었다.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는 고모가 있었다.
하지만 고모부의 사업실패로 인해 고모 식구는 빚쟁이를 피해 지방 어딘가를 전전하고 있을 때였다.
어쨌든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른으로써 의지했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설움, 그리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들어왔으니, 통제가 될 리가 없었다.
물론 좀 더 노련한 배우였다면 그 감정을 꽉꽉 눌러서 밀도 있는 연기로 승화시켰겠지만, 이온에게는 아직까지 무리였다.
‘지적인 과정이 지나치게 개입된 연기의 한계일까?’
이온은 대사의 속도, 억양, 끊어야 할 부분, 서 있는 자세, 손과 팔의 움직임 등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모든 걸 미리 준비하고 연습하는 유형이다.
그 전에 반드시 논리적이고 납득 가능한 감정을 충실하게 구축한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충동이 그 모든 준비를 무력화시키는 걸 경험했다.
경험이 없다보니 충동에 완전히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속수무책으로 휘말렸다.
- 좋은 연기란 항상 배우의 무의식적 행동에서만 나올 수 있다.
현재 이온의 연기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연기법이다.
이는 본능적인 충동, 무의식적인 감정을 끌어내서 즉흥적으로 표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런 연기를 펼치는 이들에게 이온의 지적이고 분석적인 연기는 미리 정해진 연기 즉 다음 장면이 예상되는 지루하고 진실하지 못한 연기일 뿐이다.
때문에 배우는 항상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진실한 본능과 충동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며 연기하고자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선생님도 항상 말씀하셨지. 저마다 추구하는 연기이론은 있을 수 있지만, 현장에서 하는 연기에 있어서 정답은 없다고.’
당장 충동에 맡길 수는 없다.
이미 그 한씬을 위해 준비한 수많은 과정과 연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재적인 연기를 철저히 차단하고 외적인 연기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것.
한PD가 얼굴 클로우즈업을 찍겠다면 달라지겠지만, 당장 이온이 연기방식을 바꿀 순 없었다.
“준비됐습니다!”
이온이 촬영장으로 돌아와 한PD에게 씩씩하게 말했다.
분장팀이 다가와 이온의 스킨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안약을 내밀었다.
인공눈물이 아닌 일반 안약이다.
이온은 분장팀이 내민 거울에 눈동자를 비춰보고는 안약을 한 방울 눈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촬영에 들어갔다.
[mamá Quiero irme a casa.]
(엄마, 나 집에 가고 싶어.)
크리스티안이 계약한 회사는 연애, 음주, 흡연 등 통상적인 금지 조항들이 있었다.
그 외에 사소한 것들도 트집을 잡히게 될까봐 모든 것들이 조심스러웠다.
부모님과 통화만 해도 눈치가 보였고, 회사 앞 편의점에 잠깐 다녀오는 것도 누군가 보게 된다면 불성실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무서웠다.
회사 밖의 생활은 과장을 조금 보태 24시간 통제 당했다.
휴일에 외출을 하게 된다면 사진을 찍어서 보고해야 했다.
클럽 같은 곳은 물론이고 사람 많은 곳은 거의 금지였다.
크리스티안은 데뷔조로 확실하게 결정이 나면서 출석 협의가 비교적 수월한 예술고등학교로 전학까지 갔다.
연습시간은 정규 수업시간을 우선으로 하고 남는 시간을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보통 오전 수업만 하고 연습실에 나왔다.
친구들하고 단 몇 시간 PC방으로 일탈이라도 하면 담당 기획실 직원에게 연락이 취해진다.
그 와중에도 부질없이 영화감상문에 독후감까지 꼬박꼬박 써내야 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소년에게도 숨막히는 생활이다.
아르헨티나라는 비교적 낙천적이고 유유자적한 나라에서 온 크리스티안은 한국계임을 떠나서 적응하기 쉽지 않다.
[도시락 지겨워.]
[닭가슴살 아닌 것만 해도 어디야. 그만 투덜대.]
[후우. 이건 아니야.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구!]
[다 감수하기로 한 거잖아.]
급기야 크리스티안은 짐을 싸서 몰래 숙소에서 도망칠 계획을 꾸민다.
[어디가게?]
[집에.]
[가출하는 거야?]
[매니저 형한테 나 휴가갔다고 전해줘.]
[크리스티안, 그러지 마! 방출 당할지도 몰라!]
크리스티안이 숙소 탈출을 감행한다.
막상 숙소를 나서긴 했는데, 갈 곳이 없다.
이모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가자니 부모님께서 알게 될 것이고.
어쩌면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뻔한 걸 어떻게 자연스럽게 만들 것이냐가 문제일 뿐.
결국 크리스티안은 주인공이 아르바이트하는 가게로 찾아간다.
진부하지만 여전히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단골 자취방인 옥탑방에서 하루를 묵기까지 한다.
이런 전형적인 드라마 클리셰는 우리 시청자들에게 매우 식상하다.
그런데 해외 K-드라마 팬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옥탑방에서 모 대형 기획사가 보이게 촬영하기 때문에 해외 KPOP팬들의 일명 덕심을 자극할 수 있단다.
송하나 같은 작가가 괜히 이런 진부한 장면을 만들어 넣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네 고민은 고민이 고민을 낳고 있다 뭐 그런 고민인거잖아?]
[......?]
[고민이란 게 고민 그 자체로 있으면 그냥 난관일 뿐이야. 근데 막상 부딪쳐 보면 진짜 별 거 아니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
[너 지금 한국말 하는 거 맞지? 혹시 최근에 쓴 랩 가사야?]
[그래서 고민이 고민인 거라는 말씀.]
[Qué vas a hacer!(뭐 하자는 거야)]
[다 털어놔봐. 뭐가 고민인지. 내가 들어 줄게.]
크리스티안은 주인공을 앞에 두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
혼자 독백처럼 대사를 하는데, 이온은 발끝부터 짜릿한 전율 같은 게 느껴졌다.
펑펑 울었을 때와는 또 다른 세계였다.
그 역할 속에 완전히 들어갔던 거다.
‘무당들이 접신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
이온으로써는 굉장히 낯설면서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이야기를 신지균 선생님에게 했더니 껄껄 웃기만 하셨다.
비록 <아이돌>에서 조단역 캐릭터를 연기할 뿐이지만.
이온으로써는 연기가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빙의나 깊은 몰입을 느껴봤기 때문이 아니다.
연기예술의 세계를 비로소 맛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