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5)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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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의 한적한 카페.
실내는 우드톤의 아늑한 분위기였다.
최근 SNS로 뜨기 전에는 아는 사람만 찾던 카페였다.
카페 한 쪽 구석에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은 20대 초반의 여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실내임에도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데, 앞에 놓인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잠시 후 테이블 앞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자 홍성욱이 의자를 빼서 앉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저도 방금 왔어요.”
후드티의 여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옅게 화장한 얼굴이 청순하면서도 귀여웠다.
누가 봐도 연예인이거나 최소한 지망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외모가 출중했다.
사실 이 카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예인 지망생들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프로필 사진전문 스튜디오가 있다.
때문에 이 근처 카페나 식당 혹은 술집에서 준연예인 혹은 지망생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홍성욱이 후드티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카페라떼 한잔을 받아서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날 기억 못할 수도 있지만, 나는 방송국에서 데뷔 때 자주 봤어요.”
“저는 금방 떠올리지 못했는데, 기억해 주셔서 놀랐어요.”
“사람 기억 못하면 이 일 못해요.”
“말 놓으세요. 이쪽에서 일 오래 하셨고 매니지먼트 회사 대표까지 하셨는데......”
그녀의 말에 홍성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말 놓을게요.”
“네.”
“지난 번 통화에서 대략적인 건 말했고. 아직까지 재계약과 관련해서 회사에서 별다른 얘기 없어?”
“......”
홍성욱이 만나고 있는 여자의 이름은 송미나.
한 해 수백 개씩 생겨나는 흔하디흔한 걸그룹 멤버 중의 하나일 뿐.
13살부터 연습생으로 전전하다가 3년 전 데뷔를 했지만, 인지도는커녕 군부대 위문공연조차 변변히 다녀본 적 없는 비운의 아이돌이었다.
노래도 별로, 콘셉트도 어정쩡했으며 튀는 멤버도 없었다.
작은 기획사라 푸쉬도 약해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조차 불투명한 상황.
현재 송미나는 다른 회사를 알아봐야 할 처지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미나 같은 처지의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녀보다 더 예쁘고 노래 잘하고 춤까지 잘 추는 10대 소녀들이 너무나 많았다.
1집을 말아먹은 걸그룹 출신을 받아줄 기획사는 사실 없다고 봐야한다.
그렇다고 다른 직업을 알아볼 수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난데없이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홍성욱이라는 한때 잘 나갔던 매니저로부터.
“지난번에 식사자리에서도 제안했지만, 어때 나랑 해볼 생각 없어?”
“혹시...... 솔로에요? 아니면 트로트로 바꾼다 하는......”
미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는 메인 보컬은 아니었다.
일반인보다 나은 노래실력이지만 솔로로 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중음악업계의 절대신이자 만능치트키 오토튠이 자신의 가창력을 포장해 줄 테지만.
요즘은 소위 오토튠 떡칠한 노래는 대중들에게 안 먹힌다.
“아니야.”
“대표님은 가수 전문이 아니시잖아요. 기존 기획사 연습생들 모아서 팀 만드시려고요?”
말하자면 중고신인이랄 수 있는 자신에게 리더를 맡기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홍성욱은 그녀의 기대를 박살냈다.
“나와 계약하면 넌 노래를 할 수 없어.”
“네?”
미나가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배우하자.”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말에 미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연기 했었잖아.”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출연했던 드라마에 우리 회사 배우들이 많이 들어갔었으니까.”
“아역 주인공도 아니었고...... 대사도 몇 줄 없었고 그냥 단역이었는데.”
“어쩌면 넌 적성과 상관없는 분야에서 지금까지 시간을 낭비한 걸지도 몰라.”
미나는 예상치 못한 제안에 얼떨떨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선택의 순간이 과연 기회일지 아니면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게 아닐지 걱정이 됐다.
그녀가 아는 홍성욱은 비록 특급 스타를 보유하진 않았지만, 한 때는 라이징 스타를 여럿 보유했던 중견 기획사의 대표였다.
현재도 지상파와 종편을 넘나들며 많은 작품의 캐스팅 디렉터로 활약 중이기도 했다.
“제가 배우를 할 수 있을까요?”
“5년 이상 장기 계획을 잘 수립한다면.”
“오, 오년씩이나요?”
“그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겠다는 게 아니야. 연기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작은 배역부터 차근차근 경험을 쌓아가야겠지.”
“또 다시 연습생이 되라는 말씀이세요?”
“달라.”
미나는 호기심이나 기대감이 아닌 의심의 눈길을 홍성욱에게 보냈다.
하지만 홍성욱은 그런 그녀의 눈빛이 썩 마음에 들었다.
영 맹탕이 아니라는 뜻이 되니까.
연습생부터 데뷔까지 나름 산전수전까지는 겪어본 태가 났다.
그래봐야 아직 어린애일 뿐이지만.
“대표님과 함께 하면 배우로 잘 될 수 있어요?”
“응. 나만 따라오면.”
“......!”
미나가 눈길조차 주지 않던 커피를 호로록 마셨다.
갈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동안에 고민에 휩싸였다.
“1~2년 동안은 최소한의 생활밖에 못할지도 몰라.”
미나가 고개를 들어 홍성욱을 똑바로 쳐다봤다.
“무보수로 단편영화도 찍어야 할 수도 있고, 독립영화에도 출연하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미지단역으로 하찮은 연기만 해야 할 수도 있어.”
미나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다.
연습생 생활도 지겹고 무명생활은 더더욱 하기 싫은 것이 솔직한 마음.
또다시 힘겨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좋아. 부모님과도 상의하고, 주변에 믿을 만한 선배나 동기들과도 충분히 의논해 봐.
“그래도 되요?”
“응.”
급한 것은 송미나지, 홍성욱이 절대 아니다.
그녀는 기존의 회사에서 재계약이 불발되면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어버리실업자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어디로 가는데요?”
"한 명 더 오기로 했다고 했지. 그 친구가 술을 못해. 그래서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어.“
홍성욱은 미나를 데리고 홍대에서 제법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이온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홍대에서 보기 드문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에 어둑한 조명 그리고 테이블 간격도 비교적 넓어 프라이버시도 어느 정도 보장되는 레스토랑이었다.
이온은 홍성욱, 송미나와 차례로 인사했다.
미나는 심사가 매우 심란했다.
이대로 레스토랑을 박차고 나가버릴까 고민했다.
지금 상황이 어딘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홍성욱이 미나에게 스폰서를 소개시켜주려 한다고 오해한 것이다.
이온의 행색이 재벌가나 신흥부자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이온씨는 최근에 뭐했어요?”
“조폭 똘마니 8번이나 일진 5번 같은 역할로 출연해 얻어터지고 뒹굴고 그랬습니다.”
“매니지먼트에서 컨택 온 데는 없어요?”
“네.”
일단 스턴트 훈련하기도 바빠 시내를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촬영현장에서도 액션아카데미 스턴트맨 선배들과 무리지어 다니기 때문에 기획사 관계자와 접촉할 일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홍성욱에게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미숙하게 그런 태를 낼 리 없다.
노련한 매니저답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하, 하하하. 그랬구나.”
“비싼 거 먹어도 됩니까?”
이온의 물음에 홍성욱이 호기롭게 대답했다.
“비록 법카는 아니지만, 오늘 내 카드 한도 다 채워도 됩니다. 마음껏 주문해요.”
“단품 보다는 세트로 시키는 건 어때요, 미나씨?”
“예, 예?”
이온의 갑작스런 물음에 화들짝 놀라는 미나다.
“메뉴판의 세트 보니까 와인 안주로 괜찮은 해물스튜도 포함되어 있네요.”
“저는 아무 거나 잘 먹어요.”
일행은 30만 원대 코스 세트메뉴와 대중적인 가격대지만 스페인 최고의 와인으로 손꼽히는 플로 드 핑구스를 주문했다.
전채를 시작으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미나는 이온과 홍성욱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당분간 출연 계획은 없어요?”
“딱히요. 장마 기간이기도 하고, 이 시기가 스턴트맨들에게는 비수기인가 봐요.”
“신지균 선배는 매주 봐요?”
“원래 오전에 비만 내리지 않았으면 선생님과 등산을 갔을 겁니다.”
"연기를 본격적으로 배워보니 어때요?“
“어렵네요.”
이온은 연기에도 물론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주 종목은 아니다.
스턴트와 트릭킹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하고 있었다.
“아직도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알고 지내는 배우들이 많으실 텐데, 제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를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지금은 이전 소속 배우와 법정분쟁 건도 걸려있고, 직원도 없이 혼자 캐디를 하고 있지만 한때 매출 120억 원 대 매니지먼트를 운영했던 몸이에요. 난 사업가에요. 이런 말하면 쓰레기로 보일지 몰라도 나는 사람의 가치를 볼 줄 알아요. 내게 이익을 가져다 줄 누군가의 가치 말이에요.”
그렇게 말한 홍성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홍성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회사를 다시 하나 만들려고 해요. 여기 미나양도 영입 대상이죠. 사실 신지균 선배가 계약기간이 끝날 시기면 영입할 생각인데, 1년이나 남아 있죠.”
이온이 알기에 신지균은 현재 소속사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친한 사이라고 해도 신지균이 홍성욱이 만들 회사로 소속사를 옮길 것 같진 않았다.
“딱 까놓고 솔직히 말하면 엄청 욕심나요. 이온씨와 미나양 둘 모두. 당장은 꾸준히 일을 하고 있는 소위 씬 스틸러 배우들 두서넛 영입을 타진하고 있지만,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처럼 가능성이 있는 신인들로 회사를 세팅하고 싶네요.”
피자를 오물거리던 미나와 스테이크를 썰던 이온의 눈이 딱 마주쳤다.
이온이 칼질을 멈추고 홍성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배우로 전향하면 액션아카데미 소속을 포기해야 합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걱정이 많이 될 거에요. 품위 유지비 정도는 챙겨줄 수 있어요.”
“얼마나요?”
미나가 냉큼 물었다.
“월 백 정도.”
“휘유~”
이온은 알지 못했지만, 신인배우에게 지급하는 품위유지비치곤 상당히 파격적인 금액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대부분의 매니지먼트는 신인에게 계약금은커녕 품위유지비를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제게 그런 투자를 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럼요.”
홍성욱이 단언했다.
그것으로 영입과 관련한 이야기는 마무리됐다.
홍성욱은 더는 이온과 미나에게 영입과 관련해 압박하지 않았다.
“...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중요한 전화라서.”
미나가 전화통화하며 테이블에서 멀어지는 홍성욱을 힐긋거리며 이온에게 소곤거렸다.
“저기요.”
“......?”
“오빠라고 해도 되죠?”
“편할 대로."
"오빠는 오래 전에 영입 제안 받은 것 같은데, 맞죠?“
이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고민하는 거예요? 제가 알기로 신인한테 월급 주는 기획사는 거의 없어요.“
“홍 캐디님의 제의를 받아들이면 스턴트맨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배우가 스턴트맨보다 좋은 거 아닐까요?”
“보기에 따라 다르겠죠.”
“제 말은 스턴트맨이 후지다는 게 아니고요. 그 뭐냐......”
“알아요. 오해 안 해요.”
“저는 걸그룹하다가 데뷔앨범 망하고 낙동강 오리알 되게 생겼어요. 그러다가 홍 대표님이 제 앞에 딱 하고 나타났어요.”
홍성욱은 중요한 통화인지 한참 동안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 미나는 이온에게 이러저런 정보를 얻었다.
“내가 만나본 바로는 홍 캐디님이 이상한 분은 아니에요. 좋은 사람인지 음흉한 사람인지는 나도 알 수 없어요. 의심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나쁜 분이라면 아직까지 연예계에 계실 수 없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르긴 몰라도 나쁜 놈인데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도 수두룩할 터.
때만 되면 연예계에서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는 걸 보면, 순진하고 어수룩하다가는 뒤통수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처맞고 다닐 가능성이 농후한 세계임에 틀림없다.
식사를 마무리할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만 오고갔다.
미나는 오늘 처음 만난 이온에게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한국대, 언어능력자, 비보이, 스턴트맨, 신지균 배우에게 연기를 배우고 있는 것 등등.
홍성욱이 탐낼 만 하다고 생각했다.
“미나씨는 숙소에서 짐 뺐어요?”
“저번 달에요.”
“지금 어디서 지내요?”
“아는 언니 집에서요.”
“미나씨는 내가 집까지 바래다주고, 이온씨는 전철 타야 되죠? 역까지 데려다 줄게요.” “광역버스 탈 거라서 여기서 걸어가면 됩니다.”
“다음 주에 사회인 야구하러 와요?”
“모르겠습니다.”
“조만간 또 봐요.”
“들어가세요. 미나씨도 오늘 반가웠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누군가가 자신을 열렬히 원한다는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헌데 이온은 이 같은 상황이 요행 같이 느껴져서 불편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온은 무슨 일을 하더라고 가능한 요행 없이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성격이다.
지금까지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달성하기 위해 요령을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는 대체로 좋았다.
비록 나이는 많지 않지만 그렇게 걸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두 사람과 헤어진 이온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폰을 만지작거렸다.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망설였다.
지금까지 소개팅 남자와 함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톡을 보내봤다.
누나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홍대 버스킹 거리에 들어섰다.
아침까지 비가 내렸음에도 몇몇 팀이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비보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온은 광역버스를 타고 일산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일산 집에서 마주한 남매가 보자마자 한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