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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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야구공이 알루미늄 배트에 맞아 멀리 날아갔다.
하지만 외야수에 의해 아쉽게 잡히고 말았다.
이온은 서울 강동구에 있는 한 사회인야구장에 와 있다.
신지균이 소속된 연예인야구팀 경기에 따라온 것이다.
등산을 다녔던 연극팀, 홍성욱 캐디, 씬 스틸러 배우도 소속된 팀이었다.
이온은 지난 두 달 동안 신지균을 따라 등산, 사회인 축구, 당구장, 낚시터, 헬스클럽, 수영장 등 온갖 곳을 함께 돌아다녔다.
심지어 파주의 액션아카데미 체육관으로 이온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신지균이 다녀가기도 했다.
신지균은 이온에게 따로 연기 트레이닝은 시키지 않았다.
숙제 검사처럼 그 주에 훈련한 성과를 확인만 했다.
이온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면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성의껏 알려줬다.
연기선생님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온을 데리고 다니며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명확하게 관계가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이 흘렀다.
“캐치볼 할 줄 아냐?”
“안 해봤습니다.”
신지균이 야구공을 쥐는 법부터 던지는 법 포구하는 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10미터 정도 떨어져서 가볍게 공을 던지고 받았다.
진지하게 하는 캐치볼이 아니다.
“배우는 감정노동자야.”
신지균이 캐치볼을 하며 이온에게 가르침을 줬다.
“매번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 극중 인물의 삶을 살아야 하지. 그 뿐인 줄 알아? 톱스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갑’의 선택을 통해 일거리를 얻을 수가 있어.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지.”
안 그런 직업이 있을까마는.
암튼 오늘 수업은 배우의 멘탈 케어 부분인 듯 싶다.
“좋은 작품에 캐스팅이 됐을 경우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야만 차기작이 확보가 돼. 안정적으로 인기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작품을 하며 사는 배우는, 특히 자신이 직접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배우는 사실상 1% 될까말까야. 더 불행한 것은 그 1%조차도 한 발 삐끗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지. 배우라는 직업이 그래.”
거저 얻어지는 기회는 없다.
순전히 운으로만 스타가 된 연예인 또한 없다.
어떤 직업군보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는 곳이 연예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
굳이 직업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제 아무리 어설프고 겉멋만 들린 배우라고 할지라도 그 직업적 특징과 성향에 따라 캐릭터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프로페셔널이라면 그렇게 캐릭터에 빠져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배우는 연기를 떠나 배우 본인의 삶을 살아야하는 '자연인으로써 인간'이고 그러니 문제는 결국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몰입하고 또 잘 빠져나올 수 있는지가 관건이야.”
단비가 말했던 배역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가르쳐줄 모양이다.
“캐릭터에 빠져들어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다시 빠져나와 일상으로 돌아왔다가 또 다른 캐릭터를 만나는 것. 쉽지 않겠지만 이런 순환 속에서 대중에 어필하는 연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우리 배우들의 숙명이야. 이 순환을 자연스럽게 이뤄내는 것 역시 배우의 능력이지.”
이온은 신지균이 던지는 야구공도 받아야 하고, 가르침도 받아들여야 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려 신지균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귀와 머리를 활짝 열었다.
“최고로 인정받는 배우들도 힘든 것이 투사에 따른 후유증이야. 아직 덜 여문 배우가 그런 패턴을 구사했을 때 당연히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 그 패턴을 순조롭게 이어가는 방법? 글쎄. 내가 알기로 정답은 없어.”
“......!”
이온이 멈칫했다.
그러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을 신지균에게 던졌다.
“어설픈 정신과 의사 찾아가지마. 내가 알기로 국내에서 배우의 배역 투사와 그에 따른 후유증에 관련해서 전문가가 단 한 명도 없어.”
한국의 영화·드라마 시장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배역 투사 후의 후유증을 위한 상담과 치유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관련 연구도 매우 희박한 실정이다.
많은 배우들이 공연 혹은 영화·드라마 출연 직후 투사와 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지만, 이에 대한 특별한 안전장치가 없다.
“프로이트는 투사가 자신이 처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남의 탓으로 돌리는 방어기제라고 했지. 심리적 현실을 부정하고 전능감과 편집증적인 불안을 야기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거야. 연극이나 영화 혹은 TV드라마는 항상 현실 세계를 투사하고 확장시켜. 그런 현실 세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스토리는 배우를 통해 구체화 되는 것이고. 그러니 배우들은 자신이 오랜 연습이나 일체화 끝에 선보인 배역이 작업이 모두 끝났음에도 현실속의 자기와 같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거야.”
신지균이 캐치볼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이온이 자신의 말을 잘 따라오는지 확인했다.
잘 따라오는 것을 넘어 이온은 이미 프로이트를 넘어 성격심리학박사 랜디의 이론을 더듬고, 스타니슬랍스키와 그에 영향을 받은 리 스트라스버그, 스텔라 애들러, 샌포드 마이스너의 연기 이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연기란 예술은 그 자체가 일종의 투사 행위다.
배우가 예술행위를 몸소 체험할 때 자아를 다른 캐릭터에 이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흔히 배우들이 겪는 투사를 ‘빙의(possession)’라 일컫는 경우가 있다.
투사와 빙의는 몰입을 전제로 하는 심리현상으로 평소 내재된 다른 인격이나 자아가 표출되는 다중 성격적인 증상이란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빙의는 보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영혼(귀신)이 옮겨 붙음’이란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구별해야 한다.
빡.
야구공이 이온의 글러브에 들어왔다.
하필 손바닥 부위에 날아와 박혀 고통을 선사했다.
이온이 얼른 글로브를 벗어 호들갑스럽게 손을 털었다.
“많은 배우들이 그가 연기했던 배역에 갇혀 영화와 현실을 잘 분간하지 못하고 우울증, 불면증, 대인기피 등 각종 부작용으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어. 심지어 생활에 큰 지장을 받기도 해. 배우에게 공연이나 매체 작업이 끝난 뒤 허탈감이 엄습하는 것은 투사로 인해 익숙해진 역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야.”
신지균이 배역 투사와 그에 따른 부작용에 대해 잔뜩 겁을 줬다.
“어쩌면 너처럼 덜 여문 상태에서는 경쟁심 그리고 못하면 어쩌지 하는 강박관념 그런 것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엄청난 경험과 연륜을 쌓은 배우라고 할지라도 몰입하면 예민해 질 수밖에 없어. 내가 아는 어떤 배우는 공연을 시작하기 전과 후에 최면 치료를 받고 있지.”
“최면치료가 가장 좋은 방법입니까?”
“몰라 나도. 일종의 감정적인 해갈이라고 할까. 내 경우는 어떤 배역을 연기하든 그 캐릭터에 최대한 집중해. 정말 미련 없이 다 빠져 들어. 그래야 캐릭터에서 나와 있어도 미안해지 않고 보내 주는 것 같아. 또 몸이 약해지면 감정적으로 약해지니까 등산이나 축구, 야구를 쉬는 기간에 꾸준히 하려고 한다.”
“제가 보기에 술이 더 선생님께 도움이 되는 것 같던데요?”
“술도 좋지. 그러나 난 그 술을 핑계로 만나는 일상의 사람들로 인해 다양한 감정의 회복이 일어나는 것 같아.”
“저는 술을 못 마시니까, 차라리 운동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 수다 떨고 그래야 할까요?”
“배역 투사는 오직 배우만이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라서 선배와 동료 배우들의 도움이 중요해. 대학로 배우들이 다들 술을 열심히 마시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약간 있다고 볼 수 있지. 본능적으로 공연이 끝나면 동료들과 술집에 모여서 현실과 동떨어져 있던 자신을 다시 불러온다고 할까? 영화배우들 같은 경우 영화가 끝나면 곧바로 여행을 떠나거나 가족과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지. 가족과의 격의 없는 대화가 캐릭터의 잔상을 잊는데 도움을 준다고 믿으니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정답이 없는 거군요. 본인 스스로 찾아가기 전에는.”
“배우가 배역 투사와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려면 이론적으로 투사된 감정이나 캐릭터와 정반대되는 것을 재투사해야 해.”
“아!”
이온이 단번에 신지균이 제시한 방법을 간파했다.
“역투사를 통해 상쇄해야 하는 거군요?”
“배역 투사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해. 주인공급이 아닌 이상 차분히 대응하기 쉽지 않지. 본인만의 노하우와 방법을 찾아야 해. 그것도 배우 지망생 단계부터.”
“그래서 절 등산부터 수영까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신 겁니까?”
“투사는 결국 배우가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해결되는 문제야. 상투적이지만 그래서 힘을 빼는 법을 깨우쳐야 하는 거야. 그리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직업 훈련을 멈춰선 안 되는 거고.”
“기본기 훈련 말씀이시군요.”
"발성, 화술, 신체훈련은 어느 정도 단계에 올라서면 시간을 줄여나갈 순 있겠지. 하지만 감각의 기억, 릴렉세이션, 관찰, 흉내 내기는 정말 꾸준히 해주는 것이 좋아.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거지. 난 배우 직업을 가진 신 아무개다 하는.“
“어떤 사람은 연기수첩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배우수첩이라고 할까. 일기를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일기를 쓸 거라면 배우로써가 아니라 자연인으로써 일기를 써. 연기나 배우 직업 세계가 아니라. 공연이나 촬영을 끝내고 차분하게 그걸 읽어보면 자신을 객관해 볼 수 있겠지.”
“일기는 아니지만, 봉사활동 다니면서 여행일지를 써봤습니다.”
“뭐든. 형식이 중요한 건 아니지.”
결국 역할에서 잘 빠져나오는 것은 누가 가르쳐서 되는 문제가 아니란 사실만 확인했다.
신지균이 말한 것처럼 배역 투사는 오직 같은 배우만 이해할 수 있는 거다.
따라서 배역 투사 고통을 겪어보고, 그를 어느 정도 극복해냈으며, 여전히 순조롭게 투사와 역투사 이어가는 신지균과 상담과 의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
이온만의 방법을 가르쳐 줄 순 없다.
다만 함께 고민해주고 방법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이 되어줄 순 있다.
야구경기가 진행되는 사이 이온은 홀로 야구장 주변을 걸으며 신지균과의 대화를 복기했다.
간이 더그아웃에 앉아있던 신지균의 옆에 홍성욱이 자리를 잡았다.
“재기 하려고?”
멀쩡히 캐스팅 디렉터 일을 하고 있는 홍성욱이다.
재기라는 말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았다.
“새로 시작할까 고민 중이에요.”
“쟤는 네가 옛날에 문제 일으킨 건 알고 있냐?”
신지균의 시선이 저 멀리 이온으로 향했다.
“천천히 말해야죠.”
“여전히 대책 없네.”
“대책이 없다기보다는...... 아직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하긴··· 나는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야?”
“당분간 저 친구 연기 기본만 잡아주세요. 나중에 저녁 먹으면서 진지하게 얘기할 거니까요.”
“그러다 날아가면 어쩌려고?”
“제 팔자려니 해야죠.”
“쟤 니가 못 잡으면 내가 잡아도 돼?”
“하하하, 그럼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선생님이시라면 환영입니다.”
“재미없는 놈.”
“가르쳐보니 어때요?”
“똘똘해. 게다가 눈빛이 참 좋아. 마치 병호처럼......”
“그 친구 얘기를 왜 또 꺼내시고 그래요?”
홍성욱이 괜히 글러브를 만지작거렸다.
뭔지 모르지만 그에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 모양이다.
“왜? 후회돼?”
“잘 나가니 다행이죠. 빌빌 거렸으면 더 기분이 엿 같았을 거예요.”
“속도 좋다. 그 놈은 그런 생각 안 하는 거 같던데?”
“악연도 인연이고. 선연도 인연이고요.”
“그 악연에는 네 책임도 있어.”
“압니다.”
“너도 그 동안 성장했으니까. 똑같은 실수는 안 하겠지.”
이 바닥에서 배신 한 번 안 당해본 매니저 없고, 매니저에게 뒤통수 안 맞아본 연예인도 없다.
세상에 이런 아사리판도 없다.
하지만 개판 같은 연예계에도 나름 질서가 있고 암묵적인 룰들이 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간에.
그러니 시궁창 같아도 돌아가는 것이다.
“......!”
신지균이 속한 팀이 패배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분하거나 아쉬워하지 않아했다.
팀원들에 섞여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심동혁과 마주쳤다.
이온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런 데서도 보네?”
“신지균 선생님 따라서 구경 왔습니다.”
“팔자 좋다?“
“......?”
“아주 제대루 물었어~”
심동혁의 시선이 멀어지는 신지균의 등으로 옮겨갔다.
“벌써부터 영업도 뛰고. 새끼가...... 약삭빨라.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자기는 되고 후배인 이온은 안 된다.
전형적인 내로남불 마인드다.
“어설프게 양다리 걸치지 말고. 빨리 진로 결정해.”
“그럼 월요일에 체육관에서 뵙겠습니다.”
이온이 심동혁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신지균을 쫒아갔다.
“나 너 싫어. 알아? 넌 이미 우리한테 싸가지 없는 걸로 찍혔어. 한 달 버틸 수 있나 내가 지켜본다.”
이온이 언젠가 심동혁이 했던 저주의 말을 흉내 냈다.
재수 없는 캐릭터를 흉내 내기에 적당한 롤모델이 심동혁이다.
비열하고 못된 캐릭터로는 임대한이 있다.
이온은 틈틈이 주변 사람들을 흉내 내곤 했다.
연기가 능숙하지 않으니 누군가라도 흉내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한 배역에 너무 깊이 가지 않는 것이 좋아. 악당·강간범 같은 건 가능한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너무 코믹하게도 좋지 않고···. 코믹이 이슈가 돼 바로 올라가더라도 배우가 얼마나 많이 보여줄 수 있을까? 소비만 되다가 어떤 순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 큰 그림을 그려. 성실하게 하면 언젠가는 올라갈 거니까.”
“오늘 마지막 수업입니까?”
“하산하고 싶어?”
“아닙니다.”
경험치가 부족한 배우가 능력을 맹신하고 폭주하다 스스로를 망치고 자신이 참여한 작품에 폐를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열정이 치기나 객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배우는 연기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병이 생긴다.
한국에서는 몰입하는 건 가르치면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다.
배역 투사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오는 방법을 이른 시기부터 가르쳐야 배우들이 마음의 병 때문에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